마음 / 최 민 자
마음은 애벌레다. 몸 안 깊숙이 숨어 살면서 수시로 몸 밖을 기웃거리는 그는 목구멍 안쪽, 뱃구레 어딘가에 기척 없이 잠적해 있다가 때 없이 몸 밖으로 기어 나온다. 마주 잡은 손에, 더운밥 한 그릇에, 시골서 부쳐온 고구마 박스에 슬그머니 따라붙기도 하고 돌아앉은 어깨에, 황황한 옷자락에 내려앉기도 한다. 물처럼 흐르고 불처럼 타오르고 총알처럼 날아가 누군가의 심장에 박히기도 하는 마음은 저희끼리 작당해 꿈틀꿈틀 길을 내거나 은밀하게 고치를 짓고 활자 속에 웅크러 들기도 한다. 고이고 흐르고 출렁이고 쏟아지고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차갑게 식기도 하는 마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마음도 보인다. 감추어도 삐죽 드러나는 꼬리처럼 종국에는 기어이 발각되고 만다.
마음은 바이러스다. 마음과 바이러스는 공통점이 많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한다는 점, 살아 숨쉬는 생명체에 서식한다는 점, 독자적인 생명력은 없어도 증식하고 복제하고 숙주에 의한 변이가 다양하다는 점 등이 그렇다. 함께 먹고 함께 호흡하는 밀착일수록 더 빨리 감염되고 더 자주 전이된다. 둘 다 육안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핵산과 단백질 껍데기가 결합해야 생명체로 작동하는 바이러스처럼 몸과 마음이 분열되지 않아야 온전한 인격체로 행세할 수 있다. 정체를 알아도 정체불명인 바이러스처럼 내 안에 살면서 내 맘대로 안 되는 것도 마음 아니던가. 마음을 매어두는 고삐도 마음이요 마음을 움직이는 지렛대도 마음이지만 마음만큼 마음대로 다스려지는 것도 없다.
마음은 길치다. 풀어놓으면 방향을 잃고 어찌할 줄 몰라 한다. 마음에는 말뚝이 있어야 한다. 몸이 묶이면 구속을 느끼지만, 마음은 묶여야 자유를 느낀다. 마음이 묶일 가장 좋은 말뚝은 누군가의 몸일지도 모른다.
빗살무늬토기를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누가 이 질박한 흙 그릇에 처음으로 무늬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왜 꽃이나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지 않고 어슷한 줄무늬를 아로새겼을까?
누군가 날카로운 뼈바늘 같은 걸로 그릇 아가리에 첫 획을 긋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감격하여 가슴이 뛴다. 그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추상화가였을지 모른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들소 그림 같은 사실화인데 비해 신석기의 빗살무늬는 리드미컬한 기하학 문양이다. 그 가는 빗금 하나가 현대 미술의 주 흐름인 추상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달에 첫 발자국을 낸 암스트롱만큼이나 위대한 첫 손자국이 아닌가.
미술사학자 보링거(Wilhilm Worringer)에 의하면 인간의 추상 충동은 인간 내면과 외풍 환경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불안심리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는 신석기 토기의 빗살무늬를 '공간에 대한 공포'로 해석한다. 원시 공동체였던 구석기 시대 이후 계급과 소유가 생겨나고, 그로부터 야기되는 불안이 현상 너머의 초월적 질서를 추구하게 되어 토기의 빈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려는 무의식적인 리듬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인간과 외계 현상 사이가 비교적 행복한 친화 관계일 때는 사실주의가, 변화와 불안이 많은 시기엔 추상주의가 유행했다 하니, 20세기 이후의 추상적인 흐름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듯도 싶다.
빗살무늬를 다시 바라본다. 이 정교한 사선의 시작은 사냥 나간 남정네를 기다리던 젊은 아낙의 초조함에서 출발했을 것 같다. 무심히 동굴 밖을 내다보다가 때마침 휘몰아치는 빗줄기를 보고 불안해진 마음이 무심한 빗금으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비 때문에 사냥을 못나간 사나이의 우연한 손놀림일 수도 있다. 그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에 대해 안정되고 질서정연한 규율을 추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공간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시간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산다. 그들은 황량한 벌판에 홀로 남겨질 듯한 두려움으로 그릇 표면을 빼곡히 채웠지만, 우리는 빈 시간에 대한 강박의식 때문에 하루를 빽빽하게 채우려 든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공간적 거리의 의미는 축소되고 속도와 시간이 경쟁력이 된 시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야말로 인간의 중요한 행동양식이라는, 한 사회심리학자의 말을 사람들은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느긋함이 게으름으로, 유유자적이 빈둥거림으로 전도된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일하는 것은 여유보다는 무능에 속한다. 남의 밭에는 곡식이 푸른데 홀로 땅을 놀리는 기분이랄까. 거두든 못 거두든 심고 가꾸는 척 허둥거려야 스스로 조금 위안이 된다.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일수록 일정이 꽉 짜여 한가할 틈이 없다. 이동전화를 옆에 차고 이동 수단을 바꿔가며 도시라는 사냥터에서 유목민처럼 살아간다. 돈과 권력, 지식과 정보, 사랑과 쾌락- 원하는 사냥감은 제각기 달라도 무엇에 쫓기듯 무엇을 좇으며 낮도깨비처럼 밖으로 떠돈다. 한 여행 가이드의 말을 빌리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여행마저도 휴식이나 충전의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한 군데서 여유 있게 쉬는 것보다는 힘들게 다리품을 팔아가며 여기저기 지치도록 끌고 다녀야 본전 생각을 덜한다는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을 기웃거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도 내 일상의 빗금 긋기에 다름 아니다. 빈 시간, 빈 가슴을 채워두기 위하여 남들처럼, 유행처럼 빗금을 긋는다.
촘촘히 채워진 시간의 무늬에 그럴싸한 제목을 붙여본다.‘無題' 또는‘作品 4-7’……. 모호하다. 나조차 내 그림을 알 수가 없다. 이것들이 정녕 내가 그리고픈 그림은 아니다. 빗살무늬 대신 조선백자의 넉넉함을, 동양화의 여백을 그리고 싶다.
여백이란 비어 있음의 표현이지 그리고 남은 허드레 공간이 아니다. 마음의 통풍과 영혼의 소통을 계산하여 일부러 비워두는 원만함일 뿐, 그릴 게 없어 비워둔 자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백자를 빚고 사군자를 치던 선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빈 동굴에 메아리가 퍼지듯 비어 있음이 울림을 만드는 이치를.
이제는 좀 비워두고 싶다. 촌스럽고 한물 간 유행이라도 꽃과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고 싶다. 텅 빈 하늘에 노을 한 자락, 꽃향기를 그리워하는 새의 노래, 그 넉넉한 여백을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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