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돌 / 정 태 원
'정도리'는 몇 해 전 우리나라 최남단 땅 끝 마을을 답사하고 가는 길에 들린 완도에서 만난 작은 포구 이름이다.
해변에는 새하얀 모래 대신 어른 주먹보다 큰 까만 돌로 뒤덮혀 있어 경이로웠다.
짙푸른 해송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다도해 앞 바다를 꿈꾸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물가물 보이던 수평선과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으로 해서 더욱 빛나던 옥빛 바다.
그림같이 서 있던 크고 작은 섬들, 만선의 기쁨을 듬뿍 안고 돌아오던 멸치잡이배, 고무신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 가장을 반기던 아내와 늙은 어머니와 두 아들….
잡은 멸치는 온 식구가 달려들어 그 자리에서 바닷물이 펄펄 끊는 솥에 넣었다가 건져 널었다.
포구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들의 삶이 하도 치열하고 숨가빠서 나는 새까만 해변에 앉아 그만 넔을 잃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따끈따끈하게 익은 까만 돌들은 훌륭한 찜질방이다. 네 활개를 치고 누워 하늘을 본다. 푸른 바다가 그곳에도 있다. 뭉개구름이 조각배처럼 떠다닌다. 누워도 일어나도 푸르름 일색이다.
그 푸른 바다 위로 금방 알에서 깨어난 수천수만 마리의 까만 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아오를 것만 같다.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파도에 밀리고 깍인 것일까. 타원형의 까만 돌은 하나 같이 반질반질 윤이 나서 곧 마술에서 풀려날 듯싶다.
정도리를 떠나올 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쉽고 아쉬워서 까만 돌 몇 개를 안고 돌아왔다. 거실 탁자 위에 놓고 눈맞추며 몇 날을 행복했다.
신통하게도 까만 돌은 이야기꾼이다. 차르르 차르륵 파도소리도, 끼륵끼륵 갈매기 울음소리도 곧잘 흉내낸다. 해송과의 밀회와 살금살금 기어나오던 바다가재 이야기도 들려준다.
해님과 달님과 별님이 고향에서는 얼마나 다정했는지 모른다고 속삭인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 이야기를 할 때는 약간 목이 잠긴 듯했다.
그날 이후부터였을까? 까만 돌은 말수가 적어졌다. 자르르 흐르던 몸의 윤기도 차츰 그 빛을 잃어 간다. 수반에 놓고 목욕을 시켰지만 허사였다. 점점 부스스한 모습으로 변해서 눈물을 글썽인다. 내 욕심이 까만 돌의 행복을 깨트린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정말 미안하다. 기회 닿는 대로 곧 고향에 보내줄게…."
차마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베란다에 놓아두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 곳에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그냥 몇 해를 흘려보냈다.
며칠 전 김장 준비를 하면서 절인 배추 위에 무심코 얹은 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도리'의 까만 돌이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을 잊으셨나요? 가고 싶어요! 보내주세요!
그는 울고 있는 듯하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다도해 앞 바다가 떠오른다. 그림같이 떠 있던 크고 작은 수많은 섬과 가물가물 보이던 수평선. 아! 반짝이던 작은 포구 . 그의 고향.
얼마나 그립고 가고 싶었으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쉽게 그곳에 갈 수 없다면 까만 돌을 가까운 서해바다라도 데려다 주어야겠다.
파도에게 갈매기에게 우리 까만 돌 안아주고 그리운 고향 소식 전해다오 간청할 것이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정도리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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