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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고 춘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9. 10. 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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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  /  고  춘

 

   세상에 떠돌고 있는 숱한 거짓말 중 가장 확실한 거짓말로 사람들은 흔히 두 가지를 입에 올린다. 그 하나는 장사치들의 밑지고 판다는 헛소리요, 다른 하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어서 죽으면 좋으련만 죽지 않고 모질게 살고 있다.’는 노인들의 푸념이라는 것이다. 일견 둘 다 세태와 인정의 기미를 꿰뚫어보는 안목에서 나온 탁견인 것 같지만, 기실 그중 하나는 과녁에서 한참 빗나간 오발이다.
   장사치들의 본전도 못 건지고 판다는 말은 너무도 낯 두꺼운 거짓말이다. 설사 떨이를 본전보다 싸게 파는 경우라도, 그 물건으로 진즉 이문을 남길 만큼 남겼으니 이제는 판을 걷어치우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데, 그것이 왜 밑지고 파는 짓이겠는가? 또 때로는 어떤 사정상 물건을 안 팔고 두었다가 자칫 변질이 우려되어 본전 밑 값으로 파는 경우도 있긴 있겠으나 그 또한 그 물건에 그 값은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닌 것이다. 이런 속내는 누구보다도 상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웬만한 사람은 환히 알고 있는 그런 거짓말을 그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객을 빤히 응시하며 ‘안 살 테면 관두라.’고 성깔까지 부려가며 내뱉는다. 뻔뻔스러움의 극치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하기 위하여 스스로 걸치는 염치라는 옷을 송두리째 벗어던지고,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낯 뜨거운 몰골이다. 이것이 예로부터 백성들의 계급 관념에서 장사치들이 꼴찌를 차지하게 된 소이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고 짐승이고 숨탄 것들은 다 늙으면 죽게 마련이니, 나도 더 추한 몰골 보이기 전에 어서 죽고 싶다.’는 노인들의 푸념도 장사치들의 낯 두꺼운 거짓말처럼 과연 백주에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세상살이에 아무런 희망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병으로 죽을 것 같은 통증에 시달리는 경우, 또는 소생 가망은 전혀 안 보이는데 값비싼 의료비만 축내며 의미 없는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경우,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죽고 싶다.’는 말이 과연 그냥 해보는 거짓말일까?
   사람이 늙으면 신체 기능이 저하하여 죽음을 예고하는 이상증후가 삭신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거동할 때마다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마련이다. 그럴 때 주변의 일들이 그다지 소망스럽지는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평범한 생활여건이 자신을 에워싸고 삶의 미련을 부추긴다면 또 모른다. 그런데 돌아다보는 구석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더 살아보아야 좋은 일보다는 더 많은 나쁜 일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예견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죽고 싶다는 말이 과연 그냥 입버릇으로 해보는 헛소리란 말인가?
   또 설혹 자신의 처지가 건강상으로나 경제적 수준에서 아직 견딜 만은 하더라도, 팔팔한 젊은 생명들이 약동하는 삶을 구가하는 속에 끼어, 이미 추한 몰골이 되어버린 육신과 쇠잔한 기운으로 근근이 명줄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버릇처럼 새나오는 ‘죽고 싶다.’는 말이 과연 마음에도 없는 표리부동한 위장일까? 그런 말들이 진실로 거짓말일 만큼 삶 속에는 어떻게든 이승에 남고 싶은 매력이 숨어 있는 것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비속한 격언이 담고 있는 ‘이승’의 그 매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람이 죽음에 임하여 주변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더 연장하고 싶다는 동인動因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단연코 그런 인자因子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빈부귀천 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접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며, ‘호모사피엔스’이기에 더더욱 겪어야 하는 소위 고등동물의 운명적 종말일 것이다. 그런데도 의미 없는 명줄을 하루하루 이어가고 있는 늙은이들도 삶의 미련과 유혹 때문에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눈이 삶을 관조하지 못한 것이었음을 언젠가 세월이 그들에게 속삭여 줄 것이다.
   비록 늙고 병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는 게 이게 아니다.’ 싶으면 진실로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가치 지향적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 미련 없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런대로 한 세상 의연히 살다가 가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나는 아무래도 떨칠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가 만년에 도달한 ‘능동적 니힐리즘’에 내가 요즘 크게 공감하고 있는 소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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