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의 단상 / 송 보 영
초로初老의 여인이 걸어오고 있다. 치렁치렁한 긴 외투자락을 감당하기도 버거워 보이는데 한 손에는 커피 잔을 또 다른 손에는 두툼한 책 한권이 들려 있다. 나름 무엇인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혼자서 웃기도 하고 중얼중얼 거리기도 하며 걸어오더니 테이블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손 안에 든 책을 펼쳐든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해 보이는데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는 눈발이 제법 거센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목에서 잠시 쉼을 얻기 위해 들른 휴게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다.
오늘은 뜻밖에 횡재를 한 날이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마음을 빼앗길만한 책 한권을 품에 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유인즉 대형서점에나 있을 법한 책으로 단행본으로서는 상당히 고가인 것을 원래의 가격에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을 지불하고 산데다가 잠깐 훑어본다는 것이 깊이 있고 아름다운 문장력이 내뿜는 향기에 취해 따끈했던 커피가 식는 줄도 몰랐으니 대단한 횡재를 한 것 아닌가.
이런저런 일들로 해 길을 나설 때가 많다. 직업상 주로 일의 연장선상에서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시간만큼은 내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시간들이다. 분주한 일상을 내려놓고 내안의 나와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철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산야의 풍경들을 볼 때면 세월의 때가 끼어 무디어진 감성들이 깨어나는 순간이기도 하기에 그렇다.
오늘 나와 마주한 차창 밖의 풍경들은 자우룩이 내려 쌓이는 눈꽃들을 품어 안으면서 환호하는 대지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풍요로웠던 생명들을 떠나보내고 난 뒤의 텅비어버린 들녘은 허허롭기 그지없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서있는 나목들은 안쓰러울 만큼 남루해 보였었는데 메마른 땅위의 모든 것들 위로 새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한 순백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는 순리를 거스르는 법이 없다. 봄이 지난 뒤 곧바로 가을이 오는 법이 없고 가을을 지나지 않고 겨울이 오지는 않는다. 겨울의 끝자락인 지금은 자연의 순환에 따라 봄이 올 준비가 시작되고 있는 시간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쏟아져 내리는 이 하얀 눈발은 하늘의 축복이다. 지난겨울 내내 불어대던 모진 칼바람을 견뎌 낸 나목들에게나 품안에 품었던 수많은 생명들을 내려놓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대지 모두에게 있어 축복이다. 온 들녘을 뒤덮고 있는 은빛 물결들에게 햇살이 들면 저들은 소리 없이 녹아내려 땅 속으로 스며들리라. 대지의 품안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던 생명들은 세상 밖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때를 따라 찾아와 준 생명수로 마른 목을 축여가며 힘찬 태동을 시작할 것이다.
내안의 나를 들여다본다. 심한 갈증으로 목이 말라 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목이 마를까. 내 안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아 표출해야겠는데 정제된 꼭 맞는 어휘가 떠오르지 않아 어휘의 궁벽함으로 해 심히 목이 마르다. 글을 쓰기위한 어떤 주제를 두고도 수많은 고통의 자맥질을 통해서만이 얻어지는 응집된 사유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박 겉핥기에 그칠 수밖에 없는 나의 능력 없음으로 하여 심한 갈증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고갈되어버린 내안에 있는 언어의 우물에 맑고 투명한 물이 고인다면, 그 물을 아주 조금씩 아껴가며 길어 올려 메마른 글밭에 뿌려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머지않아 닥아 올 봄날을 위해 메마른 대지위로 눈이 내려 새로운 발돋움을 시작하는 생명들의 갈증을 해소 시켜주는 것처럼 내 안의 타는 목마름을 해소 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창밖에는 아직도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주문과 동시에 갈아서 내려주는 원두커피의 그윽한 향과 갓 구워낸 커피번의 달콤한 유혹에 이끌려 이곳을 지날 때면 들르게 되는 휴게소 창가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져 있는 풍경들과 손안에 들려 있는 책 한권을 보며 생각해 본다.
어쩌면 분주한 일상 속에서지만 길 위에서 얻어진 이 작고 소박한 기쁨이, 짧은 사유의 시간들이 나의 목마름을 조금은 해소 시켜 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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