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추향(人間秋香)/박양근
낙엽이 바삭거리는 길을 걸으면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서 해거름이 되는 가을 오후에 종종 인근 산길로 산책을 나선다. 늦은 무렵인데도 허전하기보다는 마음이 오히려 가벼워지는 시간이다. 아침 산책이 마음을 들뜨게 하고 걸음을 재촉한다면 오후의 낙엽 길은 보푸라기 같은 잡념도 가라앉힌다. 이때는 무슨 잎이든 태우고 싶다.
냄새는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한다고 말한다. 감성이 그만큼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탓이다. 향기가 깔린 산길을 따르다 보면 바위틈 사이에서 귀한 난을 찾아내기도 하고, 풋풋한 풀 냄새를 따라가면 신록의 그늘과 잔디밭이 어울린 아늑한 장소에 다다르기도 한다. 궁중에서 사용하던 사향이며 현대여성이 애용하는 향수를 굳이 들먹거릴 필요가 없다. 가장 예민한 감각이 후각임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순간적으로 눈을 감는 버릇이 있다. 무엇이든 냄새로서 알려는 본능 때문인지는 모르나 소나기가 내리기 전에 항상 흙냄새를 맡을 정도다. 진화가 덜되었다고 핀잔을 준들 내 나름의 인간 판별법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튼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것, 곁에 머물게 하는 것, 그것이 냄새일 듯하다. 수년 전에는 단독주택에 살았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그 옆집에는 두 그루의 감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담벼락 쪽으로 기운 가지 덕분에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내 감나무처럼 보였다. 듬직한 모양을 이룬 감나무에는 사철을 가리지 않고 참새들의 날아들고, 초여름이면 제법 핀 감꽃의 향기가 창문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무더운 날에는 의자 서너 개를 내어놓아도 될 만큼 넉넉한 그늘이 깔렸다. 하지만 어찌 감나무의 크기만 보고 참새며 사람들이 모여든다 할까. 보이지 않는 향훈(香薰)이 있어서일 것이다. 이래저래 감나무의 수덕(樹德)을 적잖게 입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연탄가스와 척박한 토질 때문인지 초가을부터 감잎이 연이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도시에서는 감나무조차 타향살이를 면하지 못하는지 홍시 하나 달리지 않는 주제에 잎은 걱정거리마냥 무성하게 매달렸다. 그만큼 낙엽이 많았다. 설상가상 바람이 불면 자란 곳을 마다하고 죽어라 내 마당 안으로만 떨어졌다. 쓸어내는 일도 하루 이틀, 남의 집 쓰레기라고 여기니 더욱 성가셨다.
그런데 어느 날, 생뚱스럽게 그것들이 기특하다 싶었다. 한동안 소식 없던 탕아가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할까. 못이기는 척, 바람을 친구 삼아 좁은 마당에서 마음껏 뒹굴도록 눈감아주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면서 감잎이 적잖게 쌓였다. 바람이 불면 떼를 이룬 나뭇잎이 뜰 안을 구르는 소리가 밤을 새웠다. 궁리를 한 끝에 거름더미를 만들지 주지는 못할망정 태워주기로 작정했다. 하늘에서 하강한 손님인 만큼 하늘로 날려 보내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리라. 게다가 새소리를 들려주고, 그늘도 드리웠고, 하다못해 서너 개의 푸른 땡감으로 눈요기를 주었으니 최상의 대접을 하고픈 심정이다. 그러니 태워준다. 감잎에게 천장(天葬)의 예를 베푸는 것이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자 이내 불자락이 번진다. 선홍빛 불 단풍이 피면서 잔뜩 쪼그라져 있던 잎이 부채처럼 활짝 펴진다. 수십 척 화선(火船)이 떠오른다. 한 해 동안 버리지 못한 헛된 꿈이며, 지금껏 잊지 못한 마음의 아픔을 태우는 일엽편주가 하늘로 난다. 잠시 후, 묵은 마음만 하얀 재로 남았다.
매콤한 냄새가 마당 주변에 가득 찼다. 타는 냄새가 떨쳐내지 못한 미련처럼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코끝이 맵싸해진다. 남들은 잎을 태운 냄새가 매캐하다고 말하지만, 내겐 땡초를 넣고 끓인 된장 맛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 것이 되살아난다더니 어느덧 잎이 타는 냄새조차 지나간 그리움을 되새김해주는 나이에 다다랐나보다. 파르스름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끝에서 한 해의 끝자락이 서걱인다.
가을을 태울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저마다 냄새가 다르다는 점이다. 힘들게 자란 나무가 타면 탁할 것만 같고, 순리를 따른 나무를 태우면 그 냄새도 순할 것만 같다. 나뭇잎의 냄새조차 생육(生育)을 짐작하게 한다면 사람 냄새는 체취이기 보다는 영혼의 냄새라 하겠다. 멋이랄까, 향기랄까. 바람 따라 번지는 연기를 바라보니 더욱 그렇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분위기만큼이나 자신의 냄새를 지니고 싶어 한다. 어쩌면 냄새에 대한 욕구가 더 본능적일지도 모르겠다.
“아! 이 냄새.”
은연중에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다가설 수 있는 누군가 있으면 한다. 시력도 약해지고, 때때로 귀도 멍해지는 요즈음, 보이지 않는 냄새에서 더 진한 그리움을 느낀다. 은근한 냄새는 미소 띤 표정이나 뜨거운 포옹보다 가슴을 더 쉽게 녹여준다는데, 가을사람이 좋아지는 이유도 이것이 아닐까 싶다.
내 냄새는 어떨지 궁금하다. 그럭저럭 지내면서 내쉰 숨길인지, 쫓기면서 토해낸 한숨인지, 아니면 힘겹게 살아가면서 뱉은 단내인지. 차라리 무색무취라면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이나마 있을 텐데. 나이는 중년, 계절로는 초겨울, 하루에서는 어스름, 아직도 사는 것이 가파른 비탈길 같은데 마주한 바람은 여전히 잎만 떨어뜨린다.
빈 마음으로 돌아가는 몸짓을 배우려던 올가을도 벌써 지났다. 이사를 온 아파트단지에는 감나무 대신에 벚나무가 주위를 두르고 있다. 나서기보다는 스스로를 거두어들이는 미덕이 감나무에만 있지 않을 터. 초겨울로 접어든 오후 무렵이면, 불현듯 벚나무 낙엽을 태워보고 싶어진다. 나무도 사람을 가리지 않는데 감나무든 벚나무든 어찌 가리겠는가. 태움의 향기가 내 냄새를 가려주기만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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