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동네에 묻은 보물지도 / 권남희
앳된 얼굴의 외국인 남녀가 좀 낡아보이는 4인용 밥상을 들고 지하철 한쪽에 앉아 소근거립니다. 어느 누가 썼던 것인지 헌 밥상 한쪽씩을 붙잡고 어찌나 다정하게 속삭이는지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수줍은 듯 , 설레는 듯 그 표정에는 어서 집에 도착하여 상을 펴놓고 차 한 잔 마시면서 분위기에 빠지고 싶다는 조급함이 풍겨납니다. 친구 집에 들렀다가 얻었는지 , 알뜰장터에서 구했는지 밥상은 귀퉁이가 낡고 얼룩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대수일까요. 부족함은 사랑으로 메꿔 나가겠지요. 나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데도 그들 속삭임에 흠뻑 몰입 된 채 그들 꿈에 나의 추억을 얹어 묻어가려 기를 씁니다.
그들의 소박함에서 나를 돌아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밥상 하나 없이 쟁반에 밥을 차려먹었던 시간이 아름다운 그림처럼 남아 있는 그곳…….
아직도 나는 한강변을 지날 때마다 돌산 그 산비탈 집을 확인하듯 바라봅니다. 달동네였다고나 할까요? 산자락은, 다닥다닥 붙은 집들로 개나리 한그루 제대로 빌붙을 수 없을 만큼 형태만 보였던 동네였습니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골목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오르면 우리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숨어들었던 방 한칸과 연탄아궁이가 있습니다. 군 제대를 마친 복학생과 취업도 못한 여대 졸업생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함께 지내는 일에만 힘을 합했습니다.
밤이면 하늘이 다른 곳에서보다 가깝게 느껴져 꿈같은 계획을 말할 때는 참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부엌도 없고 살림살이라고는 수저 두 벌, 냄비 하나, 밥그릇 두 개가 전부였던 곳이었습니다. 마치 바위에 붙은 굴 껍데기처럼 집들은 그렇게 촘촘이 박혀 주인집이 아니고는 부엌 한 칸도 가질 수 없는 동네가 있었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그 봄 푸른 하늘에 꿈만 두둥실 띄운 무모한 커플이 갈 곳은 없었습니다. 그의 집에서 약간 부풀려 받은 등록금을 조금 떼어내 그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부터 방을 찾다가 끝내 산꼭대기까지 왔습니다. 그나마 같이 지낼 수 있는 방이 있다는 사실 하나에 뛸 듯이 기뻐하며 우리는 손을 잡고 당장 필요한 냄비를 사러 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렸을 때 동네 머스마들과 벽돌가루로 고춧가루 만들고 싱건지나물로 상차리던 소꿉장난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날마다 연탄 두어 장씩 사들고 올라와 불을 살려 냄비 밥을 하고 계란프라이 하나에 이마를 맞대고 숟가락을 들이대면서도 이야기는 무궁무진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공부하는 일보다 참 중요하면서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학교에 가고나면 재래시장을 구경하며 하루치 밥상차릴 일을 궁리하지만 우리 살림에 살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감자 몇 개, 꽁치, 두부, 콩나물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밥상은 많이 초라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부자가 되어 불란서 식 집을 짓고 근사한 입식부엌을 들이면 불고기도 굽고 아이들에게는 밥상보다, 식탁에서 밥도 먹게 하겠다며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원 세상에… 집으로 가자’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그의 아버지는 연탄아궁이와 양은냄비를 보며 혀를 끌끌 찼습니다.
아버지에 이끌려 석달 만에 산을 내려오던 날 나는 그곳에 이사오는 또 다른 학생 커플에게 우리들의 냄비를 선물했습니다.
짧지만 우리가 머물렀던 그곳을 언젠가는 꼭 찾아오리라 다짐하였습니다. 우리를 닮은 그 커플에 이유 모를 동지애를 느꼈던 우리는 한동안 ‘그들은 잘 살아가고 있을까’ 소식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의 소식이라기보다 그곳에서 행복을 알았던 우리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 나의 부엌은 점점 넓어지고 수십 개의 냄비를 가지며 일상은 대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는 살림으로 커졌지만 이제 세상 어디를 가도 산꼭대기 그런 부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지상에서 그리도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쑥덕거리던 그런 행복은 아무 데서나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둘만의 시간이 하나의 냄비 안에서 얼마나 알짜배기 행복을 만들어냈는지를 돌아보며 돌아오지 않는 그 시간을 그리워할 뿐입니다.
연탄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냄비밥을 하고 밥이 식을까 재빨리 김을 굽던 그 자리는 내 인생의 보물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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