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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라는 병病 - 이 양 주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3. 5. 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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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이라는 병病 / 이 양 주

 “아가씬 생각이 너무 많아 탈이네요.”
   수시로 찾아오는 두통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약국을 찾았는데, 약사가 빤히 쳐다보더니 한 말이었다. 임시방편으로 두통약은 일단 처방해 주지만 근본적으로 두통에서 해방되려면 생각을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순간 ‘생각이야말로 병이다.’란 작가 고은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처음 그 글귀를 발견했을 때 고은 선생이 마치 내 머리를 툭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전문약사의 진단이 그것과 일맥상통한 것 같다. 나를 들켜버린 느낌이랄까. 스스로도 두통의 주기가 어떻게 찾아오는지를 보아 왔는지라 그의 말에 쉽게 수긍이 갔다. 그렇게 콕 찍어주니 한편으론 속이 시원했다. 어쨌든 내 두통의 원인이 일단은 너무 많은 생각이라고 진단이 났으니 처방을 따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문제는 산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다는 건 생각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신념을 가지던 나이였다. 생각 없이 어찌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생각 없이 어떻게 꿈꿀 것인가. 열심히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며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밥을 먹으며, 길을 걸으며, 잠자리에 들면서, 새벽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도,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면서도 생각을 놓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해 왔었다. 생각이 가득 찬 책을 읽고, 생각이 노래하는 음악을 들었다. 쌀이 떨어졌을 때도 허기진 배보다는 정신을 채우러 발길은 서점으로 레코드 가게로 영화관으로 드나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끊임없이 따라다녔고 나는 ‘생각’이란 놈을 지독하게 즐겼다. 내심 꽤 괜찮아 보이는 동반자를 둔 것 같아 한편으론 자랑스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생각은 늘 나를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때론 생각이 머리를 향해 계속 위로 솟구쳐 이마에 열이 쩔쩔 끓고 온몸이 견디지 못해 요동쳤다. 머릿속에 온통 무거운 걸, 뜨거운 걸 넣었으니 과부하가 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급기야 생각이 몸속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혼란 그리고 정체. 어떤 날은 엉킬 대로 엉킨 생각이 검은 피가 되어 더 이상 돌지 않았다. 생각의 체증은 속 체증으로까지 연결되었다. 나는 자가 처방으로 엄지손가락에 실을 칭칭 감아 바늘로 따서 검붉은 피를 빼냈다. 생각에 지독하게 끄달릴 때마다 반복되는 지병. 생각이 나도 모르는 사이 정신뿐만 아니라 몸까지 점령한 것이다. 생각에 나는 한없이 끌려다녔으며 휘둘리고 있었다.
   생각은 시시각각 대상을 바꾸며 쫓아다녔다. 나중엔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쫓아다님’ 그 자체에 묶이고 있었다. 이것은 아니다. 구속이다. 집착이다. 벗어나야 한다. 자유롭고 싶다고 속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약사의 처방을 받던 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생각에게서 확실히 탈출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 이후로 명상, 선이라는 단어가 점점 신선하게 내게로 다가왔다.
   내겐 빨래하기를 즐기는 습성이 있었다. 당시엔 세탁기가 없어서 일일이 손빨래를 하던 시절이었다. 우울한 날이면 마치 의식을 치르듯 빨래를 즐겼다. 내가 빨래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랄까. 일상에 후줄근해진 몸과 마음을 물에 푹 담그고 비비고 헹구어 빨랫줄에 걸쳐 축 늘어뜨릴 때면 무거운 자아를 걸쳐놓는 느낌이 들었다. 신선한 바람에 흔들리고 햇빛에 말리면서 뒤에 찾아오는 말쑥함은 한결 가벼워진 자아로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하나 그때도 생각은 그 순간에 완전히 몰입하지는 못했다. 공연히 일어난 딴생각에, 때론 허망한 생각에 잡혀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현재 시제는 빨래 중이었으나 생각은 과거나 미래에 빠져 있기가 다반사였다.
   그날은 휘영청 하니 달이 참으로 밝았다. 나는 주로 하루의 일상이 끝나는 밤이면 빨래를 하였다. 빨래를 하려고 커다란 통에 물을 받아 놓았는데, 거기! 달이 들어 있었다.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온전한 모습으로. 시간이 정지되고 바람이 완전히 멈추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나도 주변도 모든 것이 달물에 빠지고 달물에 젖어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다.
   ‘지금 그리고 여기’란 구절이 확 다가왔다.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졌다.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었다. 생각을 놓으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도가 뭐냐고 묻는 질문에 ‘밥 먹을 때는 밥 먹고 잠잘 때는 잠자라.’는 그 단순한 답이 명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답을 찾으려 생각이 또 다른 생각에게 질문을 거듭하며 무수히 고심하고 발버둥쳤지만 늘 허사였는데. 감히 내게 온 작은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또한 생각의 유희라고 할지 모르나, 몸과 마음이 그렇게 가벼워지며 확연해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때의 체험을 이후로 단순하게 산다는 것, 평범 속의 진리를 발견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서서히 두통에서 벗어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도 지독한 생각에 잡히거나 몸의 균형이 깨어지면 놈이 내 머리를 쿡쿡 찌르며 공격한다. 하지만 이젠 놈의 얼굴을 알아보아 방어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는 않는다. 가끔씩은 놈과 즐기기도 하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까르페 디엠(Carpe Diem)! 순간을 즐겨라!
   책상 앞에 붙여 놓고 가슴에 새기는 글귀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지금 기쁘다. 충분하다. 나는 지금 슬프다. 이 또한 충분하다. 우리는 지금 함께 있다. 참으로 참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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