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 서 순 옥
1. 숨어든 도시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나는 멍햇다. 내 얼굴이 너무 놀란 표정이었는지 오히려 상대방이 당황하여,
"아! 내가 잘못 알았나 봐요."
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죄짓고 못 산다는 말이 있듯 숨어서도 살 수 없는 것이구나. 순간 무서웠다. 물어본다고 남의 가정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말 해 주는 경비 아저씨도 미웠고, 허락 없이 남의 집 사정을 묻고 다닌 그 여자도 야속했다.
낯 선 신도시 중동에 아파트 분양을 받아 이사를 왔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몰래 야반도주하여 숨어든 사람처럼 문 걸어 잠그고 조용히 살고 싶었다.
여러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등교 길에 막내 딸을 전철역에 데려다 주고 오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윗집과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자기 집에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한다. 가끔 마주칠 때 인상이 푸근하고 익숙한 얼굴이어서 편한 마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외모만큼 집안이 깔끔했다. 그녀는 찻물을 올려 놓고 내 옆으로 오더니 손을 꼬옥 잡는다. 다정한 친구나 언니 같은 따뜻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근녀가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까지도 왜 그녀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녀는 위 아랫집이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경비 아저씨에게 우리 집 이야기를 물어 보았다고 한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조용히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잘 달래고 잠재웠던 가슴을 쥐어 짜고 말았다. 며칠 째 뒤척이다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이웃과 담을 쌓고 사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알고 지내면 바람막이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는 두더지처럼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슴처럼 무리지어 사는 곳이었다. 윗집 여자는 내가 땅 밑 두더지가 아닌 밝은 사슴 농장의 사슴 한 마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그녀는 알고 보니 나와 같은 고향이었고 함ㄴ참 선배 벌이었다.
2. 사람의 도시
큰 딸이 웃으며,
"엄마, 많이 바쁘십니다. 이 곳에서 조용히 사신다더니..."
엄마가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우스개 소리로 하는 것이 싫지 않다.
반상회가 끝나도 몇 명은 가지 않고 계속 남아서 끝자리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섞여서 건강을 휘하여 산에 다니자고 하면서 산악회를 만들었다.
모두들 아파트 분양을 받아 타지에서 같이 모여든 처지에 형님 아우 하면서 뭉치게 되었다. 함께 산을 다니면서 이 집 저 집 한솥밥을 먹다보니 집집의 형편도 알게 되고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평소 사람들을 좋아하던 나도 쉽게 어울리게 되었다.
우리 집에도 이웃이 드나들게 되었다. 베란다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크고 작은 화초들과 나무들을 보고 모두들 멋있다고 탄성을 자아냈다.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더니 거실 장식장 한 편에 놓여 있는 남편의 내과 전문의 명패를 누가 보았는지 주방에 있는 나에게,
"남편은 교환교수로 외국에 있나봐요?"
평소에 보이지 않는 얼굴 없는 남편이므로 그렇게 물어 볼만도 하였다. 내 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남편은 어림짐작으로 교환교수가 되어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날도 산을 내려오면서 "남편이 성탄 때는 오겠네?" 우리들이 잘 지켜주었다고 말해야겠다는 등, 불자동차를 불러야겠다는 등 농담까지 섞어가며 물었다.
"우리 집에 가서 차나 합시다."
나는 오늘로써 그동안 부담스러웠던 침묵을 깰 작정이었다.
"자 빨리 얘기해봐."
뭐가 그리도 궁금할까. 보이지 않는 남편이 궁금할 것일까. 혼자 살고 있는 내 사정이 궁금한 것일까. 애꿎은 커피만 몇 모금 마시다가,
"못 온대요!"
라고 실토를 하고 말았다. 놀란 눈동자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아랫집 대구 형님은 유난히 큰 눈망울을 굴리며,
"거기서 여자가 생겼구먼!"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어서 자세히 얘기하라고 재촉하는 눈치였다.
나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고개를 숙인 채,
"바람이라도 났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은 다시는 못 올 곳으로 떠났어요."
방금 까지도 나에게 집중했던 눈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대답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져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누군가 먼저, 예쁘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오히려 고맙다고 애써 웃어 주었다. 대구형님은 성당에 다니지도 않는 나에게 묵주반지도 건네주었다.
도시는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산 사람 이야기를 하며 사는 곳이었다. 이웃 사람들이 궁금해 한 것은 죽은 남편의 이야기가 아니고 혼자 살아가고 있는 내 이야기였다.
3. 바다의 도시
앞집 하고는 옮겨 심은 나무처럼 낯선 이웃으로 만나 함께 뿌리를 내리며 열여덟 해를 이웃하고 살았다. 사람의 인연은 묘하다. 터 놓고 살다보니 앞집 남편이 우리 남편 고등학교 후배가 되고, 나하고는 초등학교 후배가 되는 사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웃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은데 하늘이 도우심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럴 때 남편이 함께 있었다면 사람 좋아하는 그도 얼마나 신나 했을까. 후배는 나를 선배님이라고 깍듯이 대해 주어 늘 든든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 후배가 이사를 간다고 짐들을 꺼내 놓고 있다. 물빠진 바다의 뻘처럼 같이 나누고 살아 온 흔적들이 하나 둘 맨살을 드러내는 것 같다.
남편이 내 곁을 떠나기 전 우리 집도 앞집 후배네 집처럼 해징녁이면 어둑해진 창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아늑하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인사로 헤어진 남편은 자신이 의사이면서도 심근경색을 미처 피해가지 못하고 쓰러져 영영 집으로 돌아 올 수 없게 되었다. 바늘구멍 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남편을 떠나보내는 과정과 절차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우리를 달래줄 수 없었다. 나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드릴 수 밖에 없었다. 사라져 버린 반쪽은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늘의 구름이었다. 삼남매를 위해서라도 슬픔으로 주저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사람이 없으면 도시는 폐허가 될 것이다. 이 도시도 살들에 의해 생기게 되었고,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생기가 넘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리를 비우고 나가면 바닷물이 들어 오듯이 그 자리를 반드시 사람으로 채운다. 숨어 살자고 찾아 든 이 도시가 나에게도 새롭게 살아갈 터전이 되었다. 도시는 물퍼낸 자리가 남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출렁이는 삶의 현장이었다.
4. 태양의 도시
공사가 끝난 건너 편 재건축 아파트는 몰라보게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아파트를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마음을 태웠는지 모른다.
이곳으로 이사온 후 멀리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누워있는 산을 매일 건너다보는 일은 나만의 즐거움ㅇ이었다. 봄이면 아카시아 향기가 건너오고 여름이면 흔들리는 잎새의 바람이 집안까지 들어온다. 가을에는 색깔 고운 단풍이 병풍을 만들고, 잎과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이별의 의미도 가르쳐 주었다. 겨울에는 눈을 맞고 의연하게 서 있는 수묵화도 감상 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숨어 지내자고 찾아 든 이 도시에서 뜻 밖에 바라다 보이는 그 산이 나의 막힌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다. 계절마다 변하는 그 모습은 마치 나와 대화라도 나누는 것같이 나의 아린 상처를 위로해 주었다. 남편은 곁에 없었지만 아직도 내게 온전한 산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건너편 아파트 재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자고 깨면 죽순 올라오듯이 솟아오르는 아파트에 가려 눈 앞의 산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매일 바라보며 "단신이 최고야' 라고 남모르게 속삭이던 그 산이 회색 기둥들에 가려 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공사가 끝난 후 어디선가 새로 이사오는 사람들의 이삿짐 내리는 모습이 연일 계속 되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는 순간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없어진 줄 알았던 산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도시가 아무리 변화무쌍하게 달라진다 해도 산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 그 곳이 곧 온갖 산 것들이 살아가고 있는 산이었다. 반쪽만 남은 서쪽 산에도 날마다 저녁노을이 곱게 물들고 동쪽 산에서는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자고 나면 한 층 한 층 솟아 오르는 아파트처럼 도시는 끊임없이 내일을 잉태하고 낳는 태양의 자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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