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풀갱어 / 안현주
길을 가다가 모퉁이를 돌려는 찰나, 보이지 않는 반대편 모퉁이에서 오는 누군가와 얼굴을 부딪칠 뻔 한다. 그런데 그 상대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면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순간 눈은 있는 대로 크게 떠질 것이고 입은 크게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 입속에선 ‘헉’ 하는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이 세상 어디엔가는 자기와 꼭 닮은 사람, 도플갱어가 살고 있다는데.
L은 자기 일에 대한 성실성이나 일을 처리해 나가는 방식이 뛰어났다. 싹싹하고 예의도 발라 위아래 알아서 처신하는 것까지 맘에 들었다. 항상 명랑 쾌활하여 주위에 있는 누구에게나 행복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아가씨였다. 그 나이대의 아들이 있다면 며느리 삼고 싶을 만큼 아껴 주고 싶었고 사랑스러웠다. 회의 시간에 그녀의 동료들 앞에서 그녀를 칭찬한다는 것은 상사로서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조심을 한다면서도 불쑥불쑥 그녀에 대한 칭찬의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내게 신임을 받고 예쁨을 받았다. 그녀는 외모도 결코 예뿐 얼굴이 아니다. 그녀의 다른 동료들에 비해 대학도 썩 괜찮은 곳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처음 면접을 왔을 때 문을 밀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외모를 보지 않고 능력 위주로 사람을 뽑는다고 나름 자부하던 나도 좀 심하다 할 정도였다. 그러나 면접 시간이 진행될수록 프레젠테이션도 잘 해내고 싹싹하고 명랑하며 맡은 바 일도 잘 처리할 것 같은 믿음을 심어줬다. 무엇보다도 인간성이 좋을 것 같아 낙점을 찍었다. 그 이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앞으로는 직원을 뽑을 때 출신 학교 레벨을 안 볼 거라며 그 한 사람의 됨됨이와 인간성과 성실성만 볼 거라며 자신 있게 말하고 다녔다.
하던 일을 그만둔 이후에 L과의 소규모의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규모가 작아 실무는 거의 그녀가 보다 보니 아무래도 그녀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체제였다. 자연히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나는 뒤로 빠지는 형태가 되었다. 그녀에게 종전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인 이익도 안겨 주었다. 심지어 나보다도 더 많은 금전적인 혜택도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알 수 없는 어디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에이 설마 하고 머리를 흔들어 털어 버리며 그녀를 믿었다. 졸졸 새는 누수가 점점 그 양이 늘어나더니 종래엔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흘러갔다. 믿음에 대한 배신감에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지냈다. L은 같이 하던 일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더니 종래엔 통째로 다 삼켜버렸다. 삼십도 안 된 젊은 사람이 아주 노련한 협잡꾼이 하는 짓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처리해 나갔다. 옛 전래 동화에 나오는 여우 누이가 사람들을 다 잡아먹고 돌아서서 입맛을 디시며 씨익 웃는 그런 장면이 자꾸 오버랩 되었다. 심장이 뛰고 치밀어 오르는 분로의 열기가 약을 복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에 고통을 주었다. 어떤 것으로도 마음을 다스리거나 가라앉일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렇게 이익을 주고도 이런 배신을 당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괴로워할까. 찬찬히 뒤돌아보았다. 분명 잘못한 사람은 상대방인데 분노의 칼날은 가해한 상대방을 향해 있는 게 아니라 당하고 괴로워하는 나를 겨누고 있었다. 문득 거울을 본다. ‘언젠가 너도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한 적은 없는가. 네가 모르는 전생에라도 더도 덜도 말고 그만큼 누군가를 막막하게 하고 가슴 치게 한 일을 만든 적이 없었을까.’ 그렇다면 이건 원망과 분노로 괴로워하고 응징한다고 끝나질 않을 것 같았다. 용서하지 않고는 도저히 괴로워 견딜 수가 없다. 상대야 스스로 어떤 형태의 벌을 받든 말든 나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싫지만 용서하기로 했다. 하지만 숨어 있던 배신감이 또 불쑥불쑥 치밀어 오른다.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어디 얼마나 잘되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도 끊임없이 고개를 쳐든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잠결이 고르지 못하다. 이 용서는 어떻게 해야 평정심을 되찾아 줄까. 도대체 용서를 한다고 되뇌어도 끝나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상대방에 대한 이 마음을 어떻게 풀어서 정리할까. 용서란 상대방 가슴의 돌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내 가슴의 돌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상대방이 잘되도록 빌어 주고 마음의 응어리까지 풀어내야만 용서는 마무리되는 것인가. 일흔일곱 번을 용서를 해야 할 정도의 상대방은 도대체 누구인가. 또 다른 나의 분신이 아니고서야, 자기 자신이 아니고서야.
거리에 흘러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본다. 저 사람들 중의 누가 어떤 인연으로 앞으로 나와 조우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각도를 달리하여 걸어가는 무수한 나의 분신들이 아닐까. 세상이라는 동그란 원 안에서 각각의 개체로 살아가지만 한 덩어리를 이루어 굴러 가야 하는 원이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삐죽삐죽 나와 있으면 굴러가 가지 않을 것이다. 굴러서 삶의 완성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르려면 어느 부분이든지 부드럽게 둥글어야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투병 중인 암으로 다시 입원했다 한다. 빨리 쾌차하도록 빌며 원을 다듬어 굴려본다. 도플갱어, 이름을 달리한 무수한 우리 자신이니까.
(작법 해설)
이 작품의 소재는 믿었던 ‘그녀’의 배신으로 보면 될 것이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받는 고통에는 약이 없다. 작중 화자는 “용서하지 않고는 도저히 괴로워 견딜 수가 없”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즉 용서라는 처방을 스스로에게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란 쉬운 것이 아니다. 더구나 배신한 그녀가 잘못을 깨닫고 돌아와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닌데 피해자인 내편에서 일방적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의 성립조건부터 이루어지 않는 또 다른 고통이 된다. 그런 고통 속에서 찾아 낸 방법이 도플갱어다.
도플갱어(doppepganger)란 자신과 똑 같은 분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녀’를 용서 할 수 있는 조건은 그가 타자가 아닌 또 다른 자아 즉 도플갱어일 때에라야 가능하다는 발상인 것이다. 이 작품의 창작 발상은 도플갱어를 “이름을 달리한 무수한 우리 자신”으로 보므로 그 안에 나를 배신하고 간 그녀도 포함시킬 수 있다는 발상에 있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이 나 자신의 분신인 그녀를 용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평자가 이 작품을 비평 대상 작품으로 선정한 까닭은 이상과 같은 ‘도풀갱어’ 발상에 있다. 기존의 수필쓰기의 일반적인 양상은 아무리 심각한 상황, 어떤 큰 고통에 직면한 사건을 소재로 선택하였다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한 작가로서의 고민의 한계가 상식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상식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은 문학적으로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 작품의 문학적 문제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고통’에서 뽑아낸 어떤 주제를(이 작품에서는 용서의 문제) 어떻게 형상화 하거나 혹은 형상적으로 서술할 것이냐의 문제다. 신변잡기라는 혹평을 듣고 있는 기존의 수필쓰기라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고통’, ‘때려 죽여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는 고통’, ‘끝내는 몸져누워 사경을 헤매게까지 되었다’ 등등의 이미 누구나 다 경험해서 알고 있는 상식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상투적인 묘사 안에서 맴돌다가 작품을 끝맺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한계 안의 묘사는 아무리 있는 말 없는 말 다 갖다 치장해도 상식의 울타리 안에 있기는 마찬가지다. 즉 뻔히 다 아는 이야기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달래가 붉게 피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식의 묘사를 아무리 되풀이해도 그것들은 이미 써 먹을 대로 써 먹은 뻔히 다 아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문학의 독자들이 정신없는 사람들이 아닌 바에야 무엇 때문에 이 바쁜 세상에 힘들게 번 돈을 책값으로 지불하고 뻔히 다 아는 이야기를 사다 읽겠는가?
문학이라는 것이 <창작ㆍ창작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창작ㆍ창작적>이란 상식이 아닌 것,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상식이란 반복적 경험을 통한 인식의 고정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상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이때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첫 경험, 예를 들면 달 착륙도 우주인이 달에 착륙하는 그 첫 한 순간만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을 뿐 그 첫 순간이 지나면 그것은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인류가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영구히 새로운 미지의 경험이 될 수 있는 그런 것은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그 대답을 해 주고 있는 것이 문학이라는 창작세계인 것이다. 문학이 창작하는 세계는 현실이 아닌 상상의 세계, 혹은 허구적 세계이기 때문인 것이다.
비평자가 이 작품을 비평대상으로 선정하게 된 문학 이론적 이유가 바로 이 상상적 세계의 창작, 다른 말로는 허구적 세계의 창작에 있다. 그 상상적 세계의 창작이 다름 아닌 도플갱어인 것이다. 도플갱어는 현실의 언어, 즉 사실이다. 작가는 도플갱어라는 사실을 타자를 자신의 분신으로 보는 작품의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한 방법에 적용하고 있다. 그 결과 이 작품 속의 도풀갱어는 현실의 불특정 타자가 아닌 용서할 수 없던 ’그녀‘라는 특정 대상이 타자가 아닌 자아가 되는 존재론적 변신을 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의 창조적 전용(轉用)이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 세계다. 그 기본적인 방법이 소재에 대한 비유(은유 ・ 상징) 창작이다.(평론가 이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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