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 나영균(羅英均)
그 집은 센트 죤즈 로드 십육번지에 있었다. 그 집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잔디가 선명한 공원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곧 센트 죤즈 스트리트의 번화가로 나가게 되지만 그 골목 안만은 마치 외계와 단절된 듯이 침울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주인은 루마니아 태생의 사십대 여자였다. 갸름한 얼굴을 마주보다가 시선을 어쩌다 떨구어 보면 허리께로부터 갑자기 굳어진 듯함 몸매와 기둥 같은 두 다리에 깜짝 놀라 얼른 시선을 그의 얼굴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여자였다.
처음으로 그 집에 들어서던 날, 컴컴한 홀에서는 독특한 냄새가 났고, 이따금 머리 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뿐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여자는 풍부한 성량을 억지로 억제하고 적게 이야기하는 듯한 인상이고, 말끝마다 <마이 디어>을 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내 방은 이층이었다. 그 집에서 가장 넓고 좋다는 방이라지만, 먼저 본 다락방처럼 천정이 경사지지 않고 좀 넓다는 것만이 나을까 초라하기는 비슷한 정도였다. 십대 소년처럼 홀쭉한 침대가 둘, 설합이 어긋난 옷장 하나, 얇다란 책상과 나무 의자, 그리고 주저앉은 듯한 안락의자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짐을 풀고 앉아 있으려니까 노크 소리가 났다.
“양, 괜찮아요?”
문밖에서 여자가 말했다. 도시 서양인을 대할 때 이름을 가르쳐 주는 일이 큰 일이다. 몇 번씩 큰 소리로 또박또박 발음해 들려주건만 어떻게 된 건지 ‘영균’의 ‘균’자를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이 없다. 겨우 가르쳐 놓았는가 하면 며칠 후엔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들어보지도 못한 묘한 이름으로 둔갑을 해 버린다. 큰 소리로 또박또박 발음하기를 대여섯번을 되풀이하기가 귀찮아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이름을 둘로 쪼개서 윗글자만 가르쳐 준다.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두 글자를 다 가르치기보단 조금 나아서이다. 그런데도 제대로 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드물다. 이 하숙 주인도 홀에서 일껏 가르쳐 준 것이 한 시간이 못 되어 무슨 조화인지 <양>으로 낙착이 된 모양이었다.
들어오라니까 들어가도 되느냐고 소리를 죽여 말한다. 쟁반을 들었다. 코코아 비슷한 액체가 든 큼직한 잔과 꼭 해태 비스켇 같이 생긴 비스켇 두 쪽을 담은 접시가 그 위에 얹혀 있었다.
자기 전에 이걸 먹으면 잠도 잘 오고 몸도 따뜻해지니까 생각해서 너에게만 가져왔다고 소곤댄다. 어째 좀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 암팡한 눈과, 마주 부비는 손과, 죽인 소리와, 굳은 허리의 효과라기보다 친절을 주장하는 말과 사실이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까 현관에서 이층방으로 짐을 놀려올 때 그 여자는 곁에 손을 맞잡고 선 채 디스크가 있어서 거들어 주지 못한다고 했었다. 알기 쉬운 말로 허리병인 디스크가 편리하게 이용될 때도 있다고 생각했던 바였다.
코코아 같은 액체는 <오발딘>이라는 것이었다. 코코아와 밀가루와 설탕을 섞으면 이런 맛이 날 것 같은 정체 모를 물건이다. 주인은 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지금의 남편과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때 군인으로 루마니아로 온 그와 만났다는 것이다. 친족 친구의 반대와 사회의 규탄을 물리치고……라는 이야기였다.
소리를 죽이며 이야기하는 그녀는 이따금 내가 어떤 감명을 받았는가를 확인하듯이 내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이러는 동안 한번은 방문이 소리 없이 오센치 쯤 열리더니 틈새로 “굳 나이트 다알링”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주인 여자는 돌아보고 역시 “굳 나이트 다알링”한다.
문틈의 목소리는 2차 대전 때의 영웅 그녀의 남편인 모양이었다. 방에 돌아가면 만날 터에 발걸음을 죽여 남의 방문 밖에 와가지고 이렇게 인사하고 가는 심사는 글쎄, 서양식이라면 그만이겠지만 약간 느끼한 감이 드는 것이었다.
아침에 식당에 내려가니까 젊은 남자 넷이 식당에 앉아 있었다. 어제 머리 위에서 들리던 발걸음의 임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본 그들은 의외로 모두 외국인이었다. 하나는 호주인, 셋은 이란인이었다. 그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먹기만 했다.
화제가 있건 없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서양의 식탁이려니 생각했던 나는 조금 의외였다. 나는 혼자 무어라 할 수도 없어 씹다 뱉아 놓은 것 같은 스크램블트 에그와 오센치 쯤 되는 길이의 베이콘 두 쪽과 삼각으로 썰은 얇다란 토스트 한 쪽을 필요이상 공을 들여 먹었다. 결국 그들은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끝나는 대로 각기 나가 버렸다.
멀건 차를 혼자 마시고 있으려니까 주인이 부엌에서 들어오더니 미안하고 민망하다고 속삭였다. 이 네 하숙생은 아무리 해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란 학생들이 말을 안 하는 이유는 영어가 서툴기 때문이고, 호주 학생은 영어를 하지만 사투리가 있어서 해 봐야 이란 학생들이 어리둥절할 뿐 의사소통은 안 되기 일반이어서 아예 서로 잠자코 있기로 한 모양이란다.
방에 올라가니까 주인이 따라 올라와 창의 커튼을 열었다. 열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옆으로 몰아 배배 꼬아가지고는 창틀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러니까 방이 한층 더 궁상맞아 보였다. 커튼이라야 꽃무늬가 있는 뽀뿌링을 철사에 꿰어 매단 것이었다. 주인은 물가가 올라 해 나가기가 어려운 데다, 이 방은 해가 잘 들어 커튼이 쉬 바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라고 소근거렸다.
주인이 내려간 뒤 창가 책상 앞에 풀이 죽어 앉은 내 눈에 마당 뒷담 위로 검은 고양이가 소리 없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눈이 샛노랗고 허리와 다리가 유난히 뚱뚱한 흉측한 고양이었다.
그 고양이의 소리 죽인 걸음걸이를 보며 나는 단연 이 하숙을 나갈 결심을 했다.
|작법 해설|
소설은 인물을 형상화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고, 시는 언어창조를 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설이 형상화하는 문학적 대상과 시가 창작하는 문학적 대상은 다르다. 물론 그 다름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일 뿐이다.
그렇다면 창작문예수필이 형상화하는 문학적 대상은 무엇인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적 창작대상은 인물도 아니고 언어도 아닌 대상과 사이의 문학적 교감이다. 즉 사물에 대한 정서적 교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상 사물과의 정서적 교감은 창작문예수필 작품에서 어떤 형식으로 들어나고 있는가? 그 대답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종결어, “그 고양이의 소리 죽인 걸음걸이를 보며 나는 단연 이 하숙집을 나갈 결심을 했다.” 문장 속의 ‘나갈 결심’이라는 그 집에 대한 작가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종결문장, “주인이 내려간 뒤 창가 책상 앞에 풀이 죽어 앉은 내 눈에 마당 뒷담 위로 검은 고양이가 소리 없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눈이 샛노랗고 허리와 다리가 유난히 뚱뚱한 흉측한 고양이었다.”는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작법인 소재에 대한 은유창작법을 보여주는 명문장이다. ‘눈이 샛노랗고 허리와 다리가 유난히 뚱뚱한 흉측한 고양이’는 하숙집 여주인의 상징적 은유인 동시에 ‘나갈 결심’이라는 정서의 형상화이다.
이 작품의 작법에 관해서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문장법이다. 첫 문장, ‘그 집은 센트 죤즈 로드 십육번지에 있었다.’를 주의하여 보자. 화자의 어떤 생각이나 느낌도 배어 있지 않은 객관적 묘사법의 문장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같은 객관적 문장법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객관적 문장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작가 혹은 등장인물이 ‘어떻게’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판단하기 전에 독자 스스로가 느끼고 판단하게 하기 위한 데에 있다. 예를 들어서 길을 가다가 어떤 여자가 퍼지게 앉아서 통곡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하자. 행인은 그 여자가 왜 그런 식으로 울 수밖에 없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여자의 통곡에 공감하지 못한다. 주관적 문장법의 결점이 여기에 있다. 작가가 먼저 앞장 서서 노래 할 것 다 하고 슬퍼 할 것 다 해 버리면 독자는 어리중절 할 뿐이다. 문학이란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해서,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대상을 객관화하는 일이다.
그 같은 문장법 혹은 문체는 작가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쓸 때 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확인을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작가가 집필하는 모습을 보면 글이 샘솟듯 쏟아지는 것 같다. 그러니 언제 내가 방금 쓴 문장이 객관적 문장인지 주관적 문장인지 일일이 따져가며 쓸 수 있겠는가? 문장을 고치는 일은 초고를 완성한 다음이나 혹은 중간에라도 웬만큼 작품 형태를 갖추었을 때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작가의 창작적인 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작가의 뇌구조가 창작적인 문장법의 뇌구조로 형성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소설가들의 뇌구조는 소설체 문장 세계로 가득 차 있고, 시인의 뇌구조는 시적 언어들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수필이 신변잡기 소리를 듣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수필가들의 뇌구조가 신변잡기적인 문장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작품의 <鳥자 치킴>은 “눈이 샛노랗고 허리와 다리가 유난히 뚱뚱한 흉측한 고양이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양이를 그렇게 발견한 것이 이 작품 창작의 결정적인 열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