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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락 / 김시헌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2. 10. 15.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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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락(苦樂) / 김시헌(金時憲)

 

 

 옆방의 부부싸움은 대개 열두 시쯤 되어야 시작된다. 앙칼진 여자의 항변이 나오고 돌을 치는 것 같은 강한 남자의 고함이 높아 가면 마침내 물건 부수는 소리로 발전한다. 그 때가 되면 벌써 나는 잠을 깬다. 나는 깬 채로 한동안 싸움 소리를 듣기만 한다. 찬장을 부수는 소리, 문을 때리는 소리,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 사람 치는 소리 등이 뒤범벅이 돼서 위험감이 느껴져야 비로소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를 흔든다. 아내는 멋도 모르고 눈이 동그래진다. 싸움을 말리라고 눈짓을 하면 그제야 옷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밖으로 뛰어 나간다.

 

 남의 부부싸움에 너무 민감하게 개입하는 것이 싫어서 아내를 보내 놓고 한동안 관찰만 한다. 개싸움이나 닭싸움처럼 붙잡고 밀고 때리는 모양이다. 투닥투닥 사람 치는 소리가 더욱 심하게 들려오고 그것에 가세해서 아내의 싸움 말리는 소리가 사이를 뚫고 섞인다. “나 죽는다!” 하는 부인의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올 때쯤 되면 마침내 나도 출동을 해야 한다.

 

 남편은 체구가 작다. 부인보다 키가 작고 기운도 부인을 따르지 못한다. 한데도 남편이 공격편이 되기 때문에 비명은 언제든지 부인 쪽에서 먼저 올린다.

 

 건너가 보면 두 부부는 뱀트림이 되고 있다. 팔다리가 서로 꼬이고 엉켜서 한덩어리다. 나의 아내는 달라붙어서 그 뱀트림을 풀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나는 무슨 큰 사업이나 벌이는 기분으로 작업에 착수한다. 남의 부인에게 먼저 손을 댈 수는 없고, 남편 쪽의 다리나 팔을 잡고 힘 있게 당겨본다. 그러나 엉킨 다리 팔은 꼼짝을 않는다. 할 수 없이 감겨 들어간 남편의 손가락을 나꾸어서 뒤로 젖힌다. 아픈 모양이다. 아야야! 소리를 치면서 손을 푼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한데 엉킨 부인을 끌어 잡아당긴다. 부인의 체구가 커서 쉽게 당겨지지 않지만 자신이 풀려나오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협력이 돼서 몸은 확 풀린다.

 

 부인을 방밖으로 떠밀어내면 남편은 닭 쫓는 사람모양 확 뒤따른다. 그러면 나는 남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체구가 작기 때문에 내 품안에서 그는 벗어나가지 못한다. 나의 아내가 부인을 데리고 대문 밖으로 도망을 가 버리면 그것으로 싸움은 대단원이 된다.

 

  “저년이 화냥년입니다. 저런 년은 죽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놓쳐버린 남편은 나를 붙들고 호소를 한다. 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곧 안다. 남편에게는 직업이 없다. 생계를 해결하기 못하니까 부인을 남의 식당에 보내 놓고 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시간은 대개 열한 시나 열두 시다. 그들의 싸움이 밤 열두 시쯤 되어야 터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남편은 부인을 식당에 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보내놓고 보면 속이 상한다. 다른 남자와 꼭 무슨 일이 생겼을 것 같은 불쾌감이 생긴다. 그 불쾌감이 쌓이면 한바탕씩 터져야 한다.

 

 그럭저럭 싸움이 종국에 가고 구경꾼도 돌아가게 되면, 부인도 언제 돌아오는지 남몰래 와서 잠에 든다.

 

 이튿날 아침이 되면 집안은 아주 고요하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싶도록 원상으로 돌아가 있다. 부인은 일찍부터 식당에 출근해서 없고 남편은 늦잠을 잔다. 지난밤의 피로를 푸는 모양이다. 그러나 마당가에는 전날 밤의 전적이 보인다. 유리그릇 깨진 파편이며 문살이 꺾어진 문짝이며 아무렇게나 던져진 실내 장식품들이 정돈이 안 된 채로 굴러다닌다. 태풍일과라고 할까? 강한 바람이 와서 휘저어 놓은 직후와도 같다.

 

 일요일 같은 날은 나도 늦잠을 잔다. 자고 있으면 마당에서 뚱땅거리는 망치 소리가 난다. 남편이 일어나서 문을 수리하는 소리다. 나는 문밖을 나가서 마당을 거닌다. 남편은 일하던 손을 멈추고 나에게 “미안합니다.”하고 인사를 보낸다.

 

 실직으로 놀고 있는 남편은 종일토록 할 일이 없다. 생각한다는 것이 식당에 나가 있는 아내의 동태뿐이다.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네는 남편의 옆을 지나면서 “오늘은 심심하지 않겠습니다.”하고 한마디 비꼬아 준다. 그러면 남편은 빙그레 게면쩍은 웃음을 짓는다. 자기 손으로 부수어 놓고 자기 손으로 수리를 하고 있는 그의 작업을 구경하고 있으면 자꾸 우스워진다.

 

 이튿날 저녁은 대개 부인이 좀 일찍 돌아온다. 무슨 구실을 대서 조퇴라도 하는 모양이다. 아이들의 웃는 소리, 음식을 나누어 먹는 소리, 남편의 큰 말소리 등으로 가정은 한때 행복의 꽃이 핀다. 누구의 가정도 따르기 어려운 평화와 행복이 한때를 즐겁게 만든다.

 

 처음 그 집에 이사를 갔을 때는 위험해서 살 수가 없었다. 살인 사건이 날 것 같은 위급한 상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부부싸움은 계속이 된다. 평화와 싸움, 싸움과 평화의 반복이 그 집 생활의 전부같이 보인다. 그런데도 희한하게도 생활은 다름없이 계속이 된다. 아기를 낳고, 새 그릇을 사들이고, 손님을 맞이하며, 갈 곳도 간다. 아마 싸움이 없으면 권태로와서 살 수가 없는 듯이 보인다.

 

 사람은 고락의 반복 속에서 인생을 치른다. 苦가 닥쳤을 때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절망을 느끼는데도 樂이 오면 그런대로 살맛이 있다고 생각한다. 옆집의 부부싸움은 그러한 인생의 축도를 생각하게 한다.

 

 

 

|작법 해설|

 

문학은 문자언어로 된 예술작품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학이냐 가 첫 번째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문장형식을 통해서다.

문학에는 크게 창작문학과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 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문학을 식별할 수 있는 첫 번째 잣대가 바로 그 문장 형식인 것이다. 일반산문문학(에세이)의 문장형식은 생활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문장 형식을 취하게 된다. 반대로 창작문학 작품의 문장 형식은 개념적이 아닌 생활현장을 묘사하는 문장법과 형상화법의 문장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서두를 형상적 문장으로 열고 있다. ‘옆방의 부부싸움은 대개 열두 시쯤 되어야 시작된다.’는 문장이 형상적 문장인 까닭은 대상의 생활양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형상화란 본질적으로 생활하는 존재로서의 대상을 들어냄을 의미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苦樂」이다. 종결문단에 붙이고 있는 에세이적 해설 그대로 인생은 고락의 반복 속에서 진행된다는 주제를 작품 전편에 걸친 부부싸움 모양을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더 줄여서 말한다면 「苦樂」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옆집 부부싸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형상화) 있는 작법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鳥자 치킴>은 ‘평화와 싸움, 싸움과 평화의 반복이 그 집 생활의 전부같이 보인다.’는 그 집의 생활양상을 눈에 보이게끔 형상화하고 있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희한하게도 생활은 다름없이 계속’ 되고 있는 그것이 곧 인생의 「고락」이기 때문이다.

 

                                          부부 / 김시헌

밤중에 잠을 깰 때가 있다. 대개는 용변 때문이다. 일어나서 툇마루를 지나 마당에 내려서면 어떤 때는 달빛이 하다. 오밤중에 보는 둥근 달은 신비하기조차 하다. 티 없이 트인 달의 얼굴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달처럼 환해진 것 같은 자기 마음에 대한 착각이리라. 화장실이 마당을 건너가야 나타나기 때문에 밤에 달을 보는 것은 화장실로 해서 얻는 부수입이다.

달빛이 아까워서 마당에서 좀 서성거리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문을 다 열어 놓은 방안은 달빛의 여광으로 사람과 물건을 낮같이 볼 수 있다. 방에는 아내가 혼자 잠들어 있다. 아내의 나이는 지금 오십에 육박하고 있다. 여름이어서 이불을 걷어찬 채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모기장 속에 갇혀서 세상을 잊고 있는 아내의 몸 전체를 벽에 걸린 그림처럼 바라본다.

낡은 기계가 된 아내의 몸은 많이 쇠잔해 있다. 통통하고 몽실몽실했던 30년 전의 곱던 피부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어깨의 뼈, 기운을 잃은 팔뚝, 장다리는 나무 작대기모양 꼿꼿하기만 하다. 아내는 신부 때 턱 모양이 예뻤다. 둥그스름한 선이 잘 만든 빵떡을 연상시켰다. 빵떡 같다고 하면서 소녀를 다루듯 턱을 만지려 들면, 겨우 빵떡이냐면서 내 손을 되밀었다. 그 턱도 이제는 고무 주머니가 되었다.

몸의 어느 한 부분도 아름답다든가 예쁘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없다. 앞으로 시간이 또 지나가면 주름은 더욱 많아지고, 볼은 더욱 깊어지고 피부는 나무껍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육체 때문에 아내가 옛날보다 더 미워진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50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 놓은 아내의 엉성해진 골격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 인간의 역사를 보는 감회가 된다. 좋게 말해서 인생의 완성이나 정리기라고 할 수 있고, 다르게 말해서 인생은 허무요 비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현명하다. 자기의 늙음에 대해서 말이 없다. 생각하다 생각하다 말을 잃었는지 모른다. 말해 보아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체념을 하였는지 모른다. 결혼하던 첫날밤 나는 너무도 숫된 스물 두 살의 남자였다. 여자에 대한 체험이 없었던 나는 가슴만 두근거렸다.

당시의 풍속대로 아내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몸에 손이 닿는 것을 의식한 아내는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도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이다. 내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겨 놓기는 해도 움칠움칠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내라기보다 나에게는 처음으로 몸을 가까이 하는 한 사람의 여인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문구멍으로 엿듣던 사람들이 흩어져 가자, 그제야 말을 걸어 보았다. 무엇을 처음 물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묻는 말에 아내는 순순히 대답을 했다. 고요하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생각보다는 대담한 대답이었다. 내 귀로 들어간 첫 여인의 음성이라고 할까? 말의 내용은 잊었지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듣던, 신선하고 고요하고 다정한 음향이었다.

나는 그때 동작이 너무 서툴렀다. 둔하고, 어색하고 촌스러운 몸짓이었다. 한 번 더 결혼을 한다면 옛날 같은 그러한 서툰 동작은 안 하리라 생각되지만, 그때 서툴렀기 때문에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 사람들은 첫사랑을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나의 첫사랑의 대상은 바로 아내였다. 정이 들기 시작한 나는 대단한 연정으로 연애 감정에 빠져 들어갔다. 아내는 친정에 있었고, 나는 직장 때문에 먼 곳에 혼자 가 있었다. 당장 살림을 차릴 사정이 못되었던 것이다.

애인을 생각하듯 나는 온종일 아내 생각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아내의 사진 한 장이 유일한 위안물이었다. 서랍 속에 넣어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 보았다. 눈, 코, 입의 모양, 빵떡 같은 턱, 그리고 전체의 표정이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사랑에 미치는 모양이다. 편지도 많이 썼다. 연애 편지와도 같았다. 가진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아내에게서 편지가 오면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다. 편지 중의 어떤 구절은 가슴속 깊은 곳을 만족시켜 주는 참 감미로운 충격도 있었다.

나는 그때의 감상(感傷)을 소중한 나의 인생의 재산으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면 첫사랑의 감정이 그와는 다르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애정과, 아내 아닌 다른 이성과의 애정은 질에 있어서 많이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첫사랑의 감정도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잠들고 있는 아내의 표정은 양처럼 평화롭다. 늙었지만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순진해 보인다. 자고 있는 악인은 없다는데 아내가 악인이었다 해도 저렇게 평화롭게 보일까?

신부 때와도 같은 얌전도 없고, 여성이 가지는 조심성도 없다. 아내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멋대로 자고 있다. 나이가 많아지면 여성은 중성(中性)이 되어 간다. 옛날과 같은 여성을 아내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있다면 30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해 온 역사의 부피이다. 전우애와도 같은 믿음이라고 할까? 아내 때문에 속을 썩힌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 앞에서 힘이 약해진다. 나이 앞에서는 더욱 더 약해지는 모양이다. 나는 때때로 아내와 나에게 남아 있는 인생의 길이를 생각해 본다. 10년일까, 20년일까? 그래서 어느 날 한쪽 편이 훌쩍 먼저 영원에의 여행을 떠나간다면 남은 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때때로 잡지에서 아내를 잃은 외로움을 쓴 수필을 읽는다. 수필을 쓰고 수양이 되고 연령이 놓아진 사람도 외로운 심정을 안에 가두어 두기는 괴로운 모양이다. 그 수필을 읽으면 동정과 이해와 공감이 한다. 그러나 수필을 쓴 사람뿐 아니고,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인생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 나 자신의 일처럼 적막해진다.

밖에는 달이 밝다. 성장한 아들 딸들은 다른 방에서 깊은 잠에 떨어졌다. 넓은 우주 공간에 나와 아내만이 남아 있다는 공허감이다. 나는 베개를 당겨서 자리에 눕는다. 잠이 곧 올 것 같지 않다.

어디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여름이 깊어진 모양이다. 또르륵 또르륵 또르륵! 한참 동안을 울더니 뚝 그친다.
귀뚜라미도 무슨 생각을 해 보는 모양이다. 다시 또르륵 또르륵 하면서 울어댄다. 밤이 외로워진다.

 

 

안개에 깃들다

안개 범벅에 사방이 희다. 낙동강이 휘감은 사문의 마을에 닿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십여 분을 걷는다. 이쯤에 돌돔과 광어가 유영하는 수족관이 있는 자리. 저쯤에 치킨 가게와 열쇠가게, 여기 목련과 산수유나무가 있는 자리. 가늠한다는 거. 모름지기 이곳 원주민만의 오랜 관찰과 사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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