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 허 영 옥
마동으로 가는 길은 잔잔한 호수가 있는 한 폭의 동양화다.
굽이굽이 산을 끼고 돌다보면 맑은 호수가 그림자처럼 총총히 따라오고 길옆으로 바람에 서걱대는 늙은 갈대와 억새가 초로의 부부처럼 다정히 나부낀다.
작은 흔들림을 하고 있는 갈대, 그는 항상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본분에 어긋나지 않는 자세로 살고 있건만 사람들은 흔히 주관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갈대와 같다고 한다. 다른 나무와 풀에 비해 부드럽고 유연할 뿐 비겁하거나 졸렬하지도 않은 데 말이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유태인의 탈무드를 보면 '언제나 갈대처럼 유연하라' 라고 씌인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갈대처럼 유연하라. 삼목처럼 키가 커서도 안 된다. 갈대는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바람에 따라 휘었다가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갈 수가 있다. 또 바람이 없어도 자기 위치에 서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삼목은 어떤가, 만약 강한바람이 불어오면 쓰러져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바람이 멎어도 나무는 원위치로 서지 못하고 집짓는 재료나 장작으로 되어버리지만 갈대는 유연한 생활을 해온 것에 대해 좋은 여생이 약속된다]라고 씌어 있다.
이 현령耳縣令 비 현령費縣令이라 했던가. 한 낱 풀 한 포기 보고도 생활권이나 각자의 개성에 따라 느끼는 감성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차에서 내려 갈대가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갔다. 어제 밤 때아닌 폭우 때문일까 마른 갈꽃에 물기가 듬뿍 묻어 힘겨워 보였다. 가느다란 줄기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다. 생을 다한 갈대. 그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어린 새순을 보호하고 잉태하기 위함이라 한다. 새싹이 어느 정도 자라면 비바람에 쓰러져 어린 순에 자양분이 되어 주는 갈대. 식물도 이러할진대 지천명을 훨씬 넘긴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가. 당연히 내 자신의 일인줄 알면서도 무겁다고 힘들다고 현실을 회피하며 살아 왔는지 모른다.
갈대도 비바람에 꺽인다. 그러나 결코 뿌리는 꺽이지 않는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자연에 순응이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이라 한다. 사람 역시도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살고 있다. 어느 누군들 바람에 흔들리고 싶겠는가. 더불어 사는 세상 함께 살아가기 위함이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의젓해 보이는 숫한 나무들도 모두가 바람에 흔들린다. 그들의 큰 덩치로 인하여 흔들림이 덜하게 보일 뿐이다.
흔들림이 없는 삶은 구속이다. 나뭇가지에 흔들림을 막기 위해 지지대를 몇 달만 세워보자 얼마 되지 않아 명命을 다하고 만다. 흔들림은 살아 있음의 상징이요, 자연스러움이다. 비록 바람에 몸은 흔들려도뿌리까지 흔들리며 지조 없이 살아 가지는 않는다.
갈대의 줄기를 살며시 어루만져 보았다.
지난해에 싱싱하고 파란 줄기로 서슬이 퍼런 생을 살았을 텐데 한 해 밖에 살지 못하고 바짝 말라 가벼운 줄기가 되어 어린 싹의 보초병으로 서 있다.
사람에게 참으로 쓰임새가 많은 갈대, 보리 순처럼 파랗게 순이 올라 올 땐 가축에 사료가 되고, 단단하게 자란 줄기는 발을 엮어 여름날 방문 앞을 장식하고, 잘 익은 갈꽃으로는 방비를 만들며 뿌리는 캐어 약재로 쓰인다니 인간에겐 얼마나 유용한 식물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갈대의 꽃과 잎만 볼 줄 알았다. 그러나 한 포기의 풀도 한 그루의 나무도 자신의 생에 대해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인간과 다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사 작은 흔들림에도 바로 서는 시일이 꽤 오래 걸렸다. 남의 탓을 하면서, 주위에 사람은 많아도 진정한 친구가 없다며 방황도 했다. 그뿐이랴 스스로 잎이 다 떨어진 겨울나무라 생각하며 외로움에 자괴심도 가졌다. 슬플 때 함께 슬퍼해 주는 친구도 진정으로 고맙다. 그러나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은 더 고마운 친구다. 가깝다고 믿었던 친구를 혼자만의 생각으로 저만큼 비켜서서 바라보고 망서리기만 했다. 내 스스로 바람 되어 흔들어 놓고는, 그것은 나의 견해 차이였을 뿐 먼 훗날 그리워 다가가기 위한 몸 짓인 것을. 갈대의 뿌리가 상상 외로 땅속 깊이 뻗혀 있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듯이 친구의 우정을 모르고 살았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좁혀짐이 힘들었을까. 가장 많이 속내를 보이고 싶었던 죽마고우.
엷은 자주빛 갈꽃이 휘날리듯 수놓았을 지난 가을 갈대밭을 상상했다. 부富를 가진 사람 갖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사랑의 향기 넉넉한 인심으로 주었을 갈꽃의 마음으로 돌아가자. 손님 중에 가장 반가운 사람이 친구라 했다. 올 가을엔 친구와 함께 이곳으로 찾아와 갈꽃을 한아름 안겨 주어야겠다. 멀리서 보았고 바라 볼 수 있는 우정이 있었기에 세상은 살만하지 않던가,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태어나 덧없이 사라온 지난날의 내 삶.
넓은 들판엔 갈대와 억새가 정겨운 모습으로 바람에 또 다시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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