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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解産)의 증언 / 강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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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명화 2011. 12. 8.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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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산(解産)의 증언 / 강석호(姜錫浩)

 

 달리는 열차간이나 택시 안에서 어린애를 분만했다는 얘기를 간혹 듣는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사람이 얼마나 준비성이나 예측성이 없고 급했기에 그런 중대사를 아무 데서나 저질렀는가고 핀잔을 주고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탄 열차에서 그 일을 당하고 말았다.

 지난 가을, 지리산 등산을 마치고 숭주군 송광사와 여수 오동도까지 갔던 우리 일행은 여수발 서울행 마지막 특급열차를 탔었다. 여수 순천간은 완행이나 다름없이 슬슬 가더니 순천서부터는 진주서 오는 서울행열차에 매달려 열 량(輛)이 넘는 대형열차로 고속을 가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미리부터 밤열차를 감안하여 술을 잔뜩 마시고 열차를 타기가 바쁘게 코를 고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밤샘이나 하려는 듯이 화투놀이를 벌이거나 옆의 사람과 얘기를 나누거나 아니면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앉아 마지막 야간열차의 착잡하고 싸늘한 기분을 달래고들 있었다.

 그러나 새로 1시를 넘어서자 기고만장하던 화투놀이패도 풀이 죽고 장사꾼의 내왕도 뜸해지면서 대부분 잠이 들고 오직 요란한 바큇소리와 간혹 가다 기적이 어둠을 찢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3시를 막 넘어섰을 때였다. 차내 방송의 스피커를 통해 여객 전무의 다급한 음성이 승객들의 잠을 깨웠다.

 “승객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 해산일을 잘못 알고 여행을 하던 임부가 지금 임박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산부인과 의사나 조산원 혹은 해산구완에 경험이 많은 분이 계시면 특실 1호차로 오셔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용하던 차간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어쩌다가 해산일도 모르고 여행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등 걱정과 해산에 대한 얘기로 입을 모으면서 누가 의사나 조산원으로서 일어서 나가나 하고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특실 쪽으로 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여객 전무의 다급한 음성이 다시 도움을 청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의사나 조산원이 없거나 아니면 선뜻 나타나지 않음을 알고, 조산원이 아니라도 경험이 많은 아주머니는 가보라고 권하기도 하여 우리 칸에서 두 사람이 일어섰다.

 집에서도 출산을 지켜본 경험도 없고 간혹 기차간이나 택시에서 핵산을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참 희한한 일도 있구나 의아해 하던 나로서도 여간 신경과 관심이 쓰이질 않았다.

 그 임부는 어떤 사람일까, 스팀이 잘 들어와 춥지는 않지만 시끄럽고 딱딱하고 흔들리는 차간에서 무사히 해산을 할 수 있을까, 누가 잘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텐데……, 온갖 걱정과 조바심에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본 일행들은 뭘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 여기 사람이 몇인데 설마 잘못 될 리야 있겠느냐고 낙관을 하면서도 역시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지 나를 한번 가보고 오라고 했다.

 남의 부인이 출산하는 현장을 내가 지켜본다는 것은 용납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해 줘야 하는 것이 예의일 텐데 일부러 그것을 보기 위해 간다는 것은 약간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가까이 가서 얘기라도 듣고 와야겠다 싶어 나는 용기를 내어 임부가 있는 특실 1호 쪽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혹시 내가 의사인데 이제사 가는 줄 알고 눈여겨보고들 있어 미안하기도 하고 이럴 때 내가 의사였더라면 많은 사람들 앞에 좀 뽐낼 수 있을 텐데, 의사가 아닌 것이 퍽 억울하기도 했다.

 특실 1호를 들어서니 저편 한쪽 구석에 부인들이 몇 사람 모여 있을 뿐 다른 차간과는 달리 사람들이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앉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중간쯤 가다 더 가까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남자로서는 제일 가까이 지키고섰는 여객 전무에게 대강을 물어봤다.

임부는 서울 한남동에 사는 23세의 어린 산모로서 고향인 광양(光陽)에 갔다 오는 길이며 차를 타자 곧 진통이 시작되어 부랴부랴 특실로 옮겼으며 곧 출산을 할 것 같은데 초산이라 무난 할른지 모르겠다고 걱정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메신저라도 된 것처럼 빨리 자리로 돌아와 대강 알아본 바를 전하고 승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경험이 많은 조산원이 있어 무난할 것 같다는 말을 지어서 덧붙이기도 했다.

 그랬더니 모두들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으며 일행 중 한 친구는 아들이냐 딸이냐 내기를 하자고 달려들기도 하고, 어떤 노인은 아기의 이름은 ‘列’자나 ‘汽’자 혹은 ‘特’자가 들어가야 한다면서 아들이면 ‘汽列’이나 ‘汽鐵’이, 여자면 ‘特順’이나 ‘汽順’이라고 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차간에서 해산을 하면 철도청으로서는 큰 행운이니 그 아이에겐 평생 동한의 무임승차권을 주어야 한다는 등 제마다 한 마디씩 하며 웃었다.

 그러나 곧 출산이 되겠다던 것이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감감소식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어떤 할머니는 진통 시간이 너무 길면 고생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결과가 좋지 않다고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다시 특실 쪽으로 갔다.

 내가 특실 문을 열고 중간쯤 갔을 때였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이쪽으로 돌아서고 ‘응애 응애’ 갓난아기의 고고성이 가냘프게 들려왔다. 드디어 한 생명이 탄생한 것이었다. ‘아, 정말 다행이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내가 희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뛰어와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그 희소식은 벌써 스피커를 통해 온 열차간에 전해지고 있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해 주신 덕분으로 방금 공주를 순산했습니다. 산모의 건강도 양호합니다.”

 사람들은 공주란 말에 약간 아쉬움을 나타냈으나 무엇보다도 순산을 했으니 천만다행이라고들 했다. 나는 조금 전의 초조함은 어디로 싹 가시고 오히려 마음이 허전해지며 인간의 탄생이 이렇게 무분별하고 허술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해 수백명의 승객들이 관심을 모았고,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해산을 할 장소가 아닌데도 무사히 해산을 하는 것을 보면 생명의 탄생 그것은 분명 엄숙하고 위대한 것이었다.

 “애기 엄마는 참 복도 많다. 나는 버스간이라도 좋으니 사람들이 이렇게 관심을 써 주는 데서 해산을 한번 해 봤으면 원이 없겠다.”

 어떤 아주머니는 오히려 그 여인의 변이출산(變異出産)을 부러워했다.

 예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 인류의 구세주가 되었다.

 생명의 탄생은 그 장소와 처지에 분별이 없는 데서 그 위대성과 신비성이 증명되는 것인가 보다.

 버스간에서 심지어 항해 중의 선박 속에서, 일터에서 해산을 했으나 실패를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참 신기한 일이다.

누가 발의를 했는지 저편에서 산모와 아기를 위한 모금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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