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속의 그림 / 김옥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모습이 정겹다. 그네를 타고 있는 소년, 엄마 등에 업혀있는 아이, 종이배를 만들거나 꽃 이파리를 뜯고 있는 남자의 손, 그리고 여자의 손···.
화가 황주리가 안경알에 그린 그림들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안경.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끼던 것이기도 하다. 그 작은 안경알에 우리들의 젊은 날, 혹은 어린 시절 추억의 한 토막씩이 담겨져 있다.
우산, 편지봉투, 전화, 우산을 든 여인, 그리고 여인의 알몸 위에 째깍째깍 시계의 분침이 돌아가고 있다.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시계작품이다.
땅 따먹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땅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내리 깔고 있는 소년이 있다. 커튼 뒤에 부끄러이 서 있는 소녀도 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사내아이도 있다. 예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전부 추억과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황주리의 스페이스 월드 전시 작품들이다.
이민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민 와서 처음 얼마간은 언어와 습관 등 모든 것이 이제껏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이 산다. 그러다가 무언가 눈에 좀 익을 만하면 그때부터 향수병을 앓는다. 그리고 한 1~2년이 지나면 행색이 달라진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한국여자들의 화장과 옷에 대한 멋이 어느 날부터 흐트러지는 것이다. 이민생활에 바빠서 멋을 부릴 여유도 없지만, 미국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으로 한국엘 나가거나 한국서 온 아는 사람이 보면 미국서 많은 고생을 하며 사는 모양이라는 안쓰러운 마음을 갖게도 한다. 그러나 너도나도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것은 향수병.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두고 온 고국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의 향수병으로 가슴을 앓는다.
실제로 나는 미국에 이민 와서 이 모든 것을 겪었고, 향수병도 처음부터 걸렸었다. 어느 날 자다가 새벽에 깼는데, 이곳이 한국의 내 집이 아닌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서울에 살면서 대구나 부산으로 이사를 간 것도 아니고, 미국에 잠시 여행 온 것도 아닌 이민이었다. 남의 나라로 이민살이를 위해 온 것을 생각하니 한국을 떠나면서 공항에 전송 나온 친지들과 이별을 하면서 얼싸안았을 때보다 더한 서러움이 복받쳤다. 내가 왜 이곳까지 왔을까, 하는 후회까지 생겼다.
일이 고달프거나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아야 한다는, 남과 다른 운명이 나를 슬프게 했다. 정말로 이민이란, 남의 나라에 산다는 건 운명이다. 그 운명적인 이민생활을 하면서, 나는 그 동안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얼마나 많이 가슴을 앓았는지 모른다. 이민 온 대부분의 사람들 심정일 것이다.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향수. 그것 때문에 나는 바빠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신문사생활을 나는 더욱 정신 없이 뛰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다. 부모의 돌봄을 잘 받지 못하고 이민 1.5세가 되어 성장한 아이들은 이제 한국에서보다 이곳, 미국에서 산 날이 더 많아졌다. 나도 이제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미국사람이 되어가는데, 나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한국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몸만 미국 땅에 살고 있을 뿐이다.
향수병에 걸려 오랫동안 속울음을 울면서도 용케 참다 한국에 나간 건 이민 7년 만이었다. 그러나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나의 집 동네와 그동안 변한 친구들, 친지들을 보고 많이 실망했다.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리움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게 나의 향수병이 처음보다 조금씩 희석되어 가는 작은 요인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옛날이 더욱 그리워지기도 했다.
요즈음은 자주 한국에 나간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웠던 고국이 이제는 머물다 오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게 또 서럽다. 내 조국이, 내 고향이 머무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게.
추억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황주리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옛 추억을 더듬고 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 등에 업혀있었을 것이고, 엄마였던 나는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아이를 달래거나 잠을 재우곤 했다. 그리고 나는 부끄럼 없이 아이에게 젖을 먹였고, 나 역시 엄마의 젖을 그렇게 먹었으리라.
소녀였을 때 아름다운 꽃 이파리를 하나하나 따기도 했고, 종이배도 만들어 물에 띄우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하염없이 걸어도 보았고, 누군가에게 편지나 전화를 하기도, 기다리기도 했다. 또 있다. 꿈에 새가 되기도 했고, 그네를 타고 하늘높이 날기도 했다.
이제는 모두 추억이 되어버렸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추억. 아마 현재의 삶도 먼 훗날이 되면 또 추억이 될 것이고, 언젠가는 오늘처럼 그 추억 속을 거닐며 그리워할 것이다. 또는 기억 속에서 잊혀 그리움마저 상실된 그런 일도 있으리라.
연꽃 / 박학봉 (0) | 2011.11.18 |
---|---|
그리운 시절 / 김환태 (0) | 2011.11.16 |
해바라기 / 오창익 (0) | 2011.11.09 |
간이역 / 김재희 (0) | 2011.10.08 |
맹물을 위한 변 / 박양근 (0) | 201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