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문학성 그리고 변명 / 김진식
수필의 문학성이 가끔 도마 위에 오른다. 수필의 사실관계는 상상력의 소산으로 볼 수 없고, 무형식의 형식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므로 장르로서의 독립성을 인정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문학의 관冠을 씌우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얼른 듣기엔 그럴듯하게 들리고 이런 구실로 문학상의 선정이나 문예지원 시스탬 등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것이 요즘의 실정이다. 정선되지 않은 수필계의 어지러운 모습이 또한 이런 부정적인 시각을 방어하는 데 허약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주변의 저변에는 기득권에 대한 우월감이 은연중 작용하고 있다. 문학성은 단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창조성이라는 것도 체험적 조건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적 상상력은 얼마든지 확대해 나갈 수 있고, 비유를 위한 관념의 세계는 무한대로 열려 있다.
장자莊子는 수필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이전에 무한대로 확장하는 상상력으로 오늘날의 수필의 모습을 보였고, 니체는 초인을 등장시켜 자신의 세계를 서정의 물기로 축이며 창조하였다. 수필이 자연과의 교감과 인생의 해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면 자연과 초인의 존재는 수필의 상상력으로 창조할 수 있는 본보기가 된다.
물론 장자와 니체는 수필가라는 관을 썼던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담아내기 위하여 관념의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되면서 지혜와 면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했다. 바로 상상의 세계가 그것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통하여 접근하고 있으나 상상을 통하여 가상의 존재를 창조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인생을 비춰보고 근원에 도달하려 했다. 이런 상상의 세계는 소설의 허구와는 다른 화자話者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수필의 창조성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이 남긴 글을 살펴보면 그렇다. 사상가나 철학자의 이름으로 창조적인 수필을 쓰지 않았는가.
무형식의 형식은 장르가 될 수 없다는 시각도 그렇다. 무형식이란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지, 글의 형식을 부정하는 말로 해석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짧은 수필 한 편에도 나름대로 형식이 있다. 서정수필이거나 기행문이거나 편지글이거나 그 특색과 흐름이 있게 마련이고, 그 흐름이 형식을 요청하게 된다. 단지 허구가 아닌 화자의 삶을 문채文彩로 그려간다. 그러므로 무형식은 열려 있고 다양성을 취하고 있지만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성이란 무형식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갖는 개성과 문채와 독자와의 교감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며, 그 다양성을 아마추어의 광장으로 폄하하는 것은 기득권의 편견이거나 교만이다. 수필의 다양성은 장르로써의 부적격한 조건이 아니라 열려 있는 광장이며, 재능에 따라 꽃도 열매도 달 수 있다. 단지 수준 미달을 지적하거나, 양적 확장을 빗댄 것이라면 괴리가 있더라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실 수필계를 살펴보면 혼란스러운 데가 있다. 옥석이 구분되지 않고 있다. 좋은 수필은 묻히거나 가려 있는 것이 많은데 그렇지 못한 것이 오히려 기氣가 살아 있다고 할까. 수필의 풍토가 이를 조장하고 있고, 평론이 역활을 하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좋은 평론은 좋은 수필을 찾아내는데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환경의 열악함을 숨길 수 없다. 수필을 읽지 않고 과거의 명성을 되내기가 일쑤다. 그러므로 좋은 수필은 과거의 이름에 가려지게 된다. 그래서 검정된 전문지의 수필을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커지고 있는 수필의 몸통만 보지 말고 잘 익은 열매도 맛보란 것이다. 그러나 얻을 것도 빛날 것도 없는 일에 매달리기는 어렵다.
이런 풍토를 개선하는 것이 과제다. 스스로 엄격하지 않고는 흐린 물을 거를 수 없다. 수필의 다양성이 멋대로 자라 잡초들의 뜰이 된다면 기득권도 편견도 쾌재를 부르게 된다. 가꾸지 않고 꽃이나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수필계의 힘은 구성원의 숫자가 아니라 문학성을 담보하는 꽃과 열매의 질에 달려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사실 문학성의 문제는 수필만의 것이 아니라 문학 전반의 문제다. 단지 수필에게만 까닭이 많은 것은 후발 주자에게 씌워진 용수라고 할 수 있다. 문학성의 본질문제도 그렇지만 형식문제도 그렇다. 시인이 쓰는 산문은 '산문시'가 되고, 소설가가 쓴 수필집은 '산문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산문시에 대한 형식논쟁이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고, 수필의 시상 잔치에 '산문집'이 주인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허물이 아니다. 이런 경우를 굳이 따지고 싶지 않지만 그 도착성到錯性의 저의를 살펴보며, 수필에 들이대는 칼날과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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