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독 ㅡ 탐욕(1)
탐욕은 우리가 진정한 행복, 만족, 웰빙의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세 가지(三毒) 독성(탐욕, 분노, 어리석음) 가운데 하나다. 또 모든 악, 고통의 근본이 되고 깨달음을 얻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과정은 바로 이 세 가지 독성이 정화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무수한 수행들은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이 삼독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행복과 웰빙을 장애하는 삼독에 대한 가르침들을 우리는 불교의 아주 기초적인 교리로 취급하고 그냥 쉽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우리는 은연중에 탐욕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불교교리에 비해서 쉽고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들 대부분은 탐욕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고, 연구하고, 명상하면서 실제 삶속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방법들을 배우는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어떤 스승들은 제자가 탐욕이 왜 발생하며, 어떻게 해롭고 나쁘냐고 물으면 당연한 것을 왜 질문하느냐는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더 무지한 스승은 그냥 그런줄 알면 되지, 왜 따지느냐고, 마음속으로 짜증이 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정작 질문해야 할 것들을 질문하지 못하고 그냥 대충 탐욕은 해로운 것이고 우리의 행복과 웰빙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하게 된다. 그 결과 탐욕하는 인생이 실제로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삶인지를 감각과 느낌, 체험으로 아는 대신 관념과 말로써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사회적 학습, 모델 학습으로 탐욕에 익숙해진 우리들의 습관적 패턴은 은연중에 탐욕이 행복과 웰빙으로가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탐욕으로 일관된 일상을 살게 된다.
자아초월심리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스테니스라브 그로프는 자아초월적 관점에서 중독에 관해 논의하면서 "당신이 정말 필요하지 않는 것을 충분하게얻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행복, 웰빙에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원한다면 아무리 원하고 얻어도 그것으로 만족하거나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은 진실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물을 마시는 순간 만족하고 충족된다. 그러나 목마르지 않는 자, 당장 물이 필요하지 않는 이가 물을 마신다면 거기에 만족이나 충족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은 필요이상으로 구하는 것, 과거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원하고 구하는 것, 또 지금 필요하지 않은데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원하고 구하는 것 등과 관련된 욕구와 행위다. 그렇다면 왜 필요이상으로 구하거나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을 원하고 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건 지금 ㅡ 여기, 이 순간의 머무름, 체험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경험들을 충분히 즐기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고 과거와 미래에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탐욕이 지금 ㅡ 여기, 현재 순간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는가? 그건 마음이 탐욕의 대상인 물질, 사람, 돈, 명예, 사람, 인정, 관념 등에 집착하는 순간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몸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몸에 의지하고 몸에 머물지 못하는 마음은 집착의 대상들을 쫒아 배회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긴장하고 만족을 모르게 된다. 몸을 떠난 마음은 오직 원하기만 할 뿐 얻어진 것을 즐기고 감사하고 풍족해 할 줄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진실로 즐기고 감사하고 만족하는 일은 오직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가능해 진다. 그리고 진실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탐욕으로부터 자유롭다. 진정한 즐김과 탐욕은 빛과 어둠처럼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삼독 ㅡ 탐욕(2)
탐욕은 필요이상으로 구하는 것, 과거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원하고 구하는 것. 또 지금 필요하지 않은데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로 원하고 구하는 것 등과 관련된 욕구와 행위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필요이상으로 지나치게 구해도 탐욕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원력이라고 부른다. 탐욕은 탐하는 욕심이지만 원력은 원하는 힘이다. 탐욕은 자아중심적인 자아의식의 작용이고, 원력은 타자중심적인 자아초월적 작용이다. 탐욕은 자아만을 향해 있기 때문에 일방향적이다. 원력은 타자와 자아를 동일시 하기 때문에 양방향적이다. 그래서 탐욕은 소외, 우월, 좌절, 분노, 질투, 무지 등 부정적 에너지를 동반하고 원력은 자비, 지혜, 사랑, 용서, 평화, 감사, 기쁨 등 긍정적 에너지를 동반한다. 탐욕은 화와 다툼을 부르고, 원력은 자비와 평화를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도 항상 탐욕하거나, 항상 원력만으로 행동하고 존재하지는 않는다. 탐욕과 원력사이를 오가며 갈등한다. 우리는 때때로 자아중심적 상태에서 불쾌, 불안, 긴장, 짜증, 좌절, 소외를 경험하기도 하고, 자아초월적 상태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고, 또 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보면 대개는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에 집중되어 있고, 드믈게는 사랑을 주고 싶은 욕구에 집중되어 있는 이들을 볼 수가 있다. 전자는 탐욕으로 향해 있고, 후자는 원력으로 향해 있지만, 그러한 에너지가 얼마나 극단적인지 또 원하는 것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 자각이나 통찰이 얼만큼 개입하는지에 따라서 탐욕과 원력은 변화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탐욕과 원력이 뒤섞인 마음의 상태를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탐욕하는 마음이 걸림돌을 만나면 탐욕은 분노와 공격성으로 변질된다. 그렇게 일어난 분노와 공격성의 강도는 탐욕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탐욕의 극단에 자살과 타살이 도사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편 원력이 걸림돌을 만나면 그 걸림돌은 디딤돌로 작용한다. 이는 마치 어리석은 자가 올바른 기법을 쓰면 올바른 기법이 도리어 그릇된 기법으로 바뀌고, 지혜로운 자가 그릇된 기법을 쓰면 그릇된 기법이 도리어 올바른 기법으로 바뀌는 이치와도 같다.
세상에는 우리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들이 무수히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랑을 주고 받는 길에는 무수한 장애와 걸림돌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른 다양한 형태의 아동기 성장경험, 인간관계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각각은 지금ㅡ여기, 현재 우리들의 사랑, 삶의 경험 가운데서 원력의 에너지로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탐욕의 에너지로 끊임없이 우리들의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주 자주 원력과 탐욕, 성장과 파괴의 길목에서 서성이고 갈등한다. 우리의 내면은 이 둘의 끊임없는 투쟁과 싸움의 연속이다. 이에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와 손녀 햇님이 사이에서 오간 대화이다.
할머니 : 햇님아, 세상의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착한 여우와 못된 여우 두 마리가 살고 있단다. 착한 여우는 자비, 사랑, 고요함, 친절, 따뜻함, 지혜, 자각, 통찰 등으로 불리고, 못된 여우는 탐욕, 화, 분노, 미움, 질투, 어리석음 등으로 불린단다. 이 둘은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 날마다 싸우고 다툰단다.
진지하게 듣던 손녀가 묻는다.
햇님이 : 그런데 할머니, 그 두 마리 여우 중에 누가 이겨요?
할머니 : 그야 당연히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탐욕을 직접적으로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보다는 올바른 것에 먹이를 주는 일, 즉 원력으로 자비, 사랑, 친절 등을 행하는 것이 바로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름길이다.
ㅡ 서광 스님 동국대겸임교수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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