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봉숭아 꽃물은 / 정 태 원
뽀야는 몇 해 전에 죽은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다. 온몸의 털이 눈처럼 하얗고 두 귀와 한쪽 눈에 까만 점이 박힌 작고 귀여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생후 8개월이 된 어느 날, 닭고기를 먹고 난 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혹시 닭 뼈가 목에 걸린 것은 아닐까 겁이 덜컥 나서 뽀야를 데리고 동물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하루쯤 옆에 두고 경과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뽀야가 병원에 입원을 했어. 가엾게도 많이 아픈가봐. 내일은 토요일 이니까 우리 뽀야 병문안 가자."
"꽃도 사고 뽀야가 좋아하는 비스킷도 사자."
연년생 어린 남매는 눈물을 글썽이며 저히들끼리 소곤거렸다.
이튼날 수술을 해서라도 꼭 살려 달라고 매달렸지만, 의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렵겠다는 것이다. 닭 뼈가 어딘가에 걸린 것 같다고도 한다.
탈진되어 축 늘어진 뽀야를 안고 돌아오면서 너무나 무력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애소하듯 쳐다보던 뽀야의 슬픈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은 잠시도 뽀야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뽀야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다가도 아이들 소리가 나면 힘없이 눈을 뜨고 반가운 빛을 지으려 애썼다.
"뽀야야, 얼른 기운차려야지……"
아이들은 울먹이면서 뽀야의 등을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뽀야는 현관 앞 자기 집에서 후원 목련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기고 누워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 흙냄새가 그토록 그리웠던 걸까. 삶의 마지막 순간 혼신의 힘을 쏟으며 목련나무 밑으로 기어 왔을 뽀야의 처절한 몸짓이 떠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새벽이슬로 정갈하게 씻긴 눈부신 흰 털의 뽀야는 죽음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평화롭게 잠든 모습이었다.
"뽀야야, 얼른 일어나라니까. 아침이야 인마!"
막내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뽀야를 마구 흔들었다. 마치 깊이 잠든 뽀야를 깨울 때처럼……
"엄마, 뽀야를 뒷동산에 묻어 주세요."
그때 열네 살이던 큰딸 아이가 울면서 말했다.
"먼 산에 묻히면 어린것이 얼마나 무섭겠어요."
둘째도 셋째도 마구 흐느꼈다.
목련과 장미, 철죽과 라일락이 지금 막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우리 집 후원 뒷동산에 뽀야는 그렇게 잠들었다.
학교에 갈 때도 집에 돌아와서도 꼬리를 치며 반기던 귀여운 모습이 눈에 밟히는지 아이들은 말을 잃은 채 방문을 꼭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진 우리 뽀야……"
사춘기 소녀였던 큰아이가 '뽀야를 그리워하며' 쓴 산문의 한 구절이다. 길에서 강아지 인형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면서 열심히 강아지 모양의 마스코트를 모으고 있었다.
밤마다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고 울다가 잠이 들던 아홉 살짜리 둘째의 일기장에서는 '하늘에 있는 뽀야에게' 라고 쓴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네가 보고싶어서 자꾸만 눈물이 난단다. 하늘나라에서는 잘 지내니? 친구도 사귀었니? 꿈속에서라도 좋아. 뽀야야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응!"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똘망똘망 귀엽던 눈,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반기던 기특한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후원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린 날이면 아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던져왔다.
"죽음으란 끝이 아니란다. 이별일 뿐이야. 뽀야는 비록 죽었지만 우리 집 뒷동산에 묻혀 있고, 그 피와 살과 넋은 저 목련과 장미와 라일락 속에서 다시 살아나 예쁜 꽃으로 피어날 거야……
아이들 못지 않게 슬픔에 젖어 있던 나는 그때 불교 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둘째가 뒷마당에서 큰 소리로 엄마를 불럿다. 밝고 기쁨에 찬 목소리였다.
"엄마, 목련꽃이 활짝 피었어요. 꼭 뽀야 얼굴 같아요!"
활짝 핀 목련꽃을 우러러보고 선 아이의 두 눈이 신비로움과 감격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그늘이 걷히고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뽀야는 살았을 때처럼 귀엽고 예쁜 모습으로 항상 우리 곁에 있었으니까. 라일락 꽃으로, 철쭉의 웃음으로, 장미의 어여쁨으로……
그해 여름 우리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 꽃물은 그 어느 해보다 붉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입니다)
부끄러움 / 윤오영 (0) | 2011.05.13 |
---|---|
팔순 어머니와 화장품 / 정목일 (0) | 2011.05.13 |
은파 / 도 종 환 (0) | 2011.05.07 |
과일을 잘 고르는 엄마 / 법정 스님 (0) | 2011.05.05 |
넋대 / 정정자 (0) | 2011.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