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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약국 / 유 점 남

장대명화 2025. 9. 24. 01:40

                                        정 약국 / 유 점 남

 

동네 ‘정 약국’에 새 간판이 걸렸다. 처방전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니 처음 본 젊은 여자 약사가 반겼다. 가운을 벗은 약사 아저씨는 약국에 온 손님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며 새로 온 약사를 잘 도와주라는 당부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아저씨는 나이가 80이 가까웠다며 이젠 그동안 소홀했던 식구들과 여행도 하면서 좀 쉬고 싶다고 했다. 인계 절차는 이미 끝나 보였고 아쉬운 표정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아저씨를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없는 약국을 생각하니 갑자기 의지할 곳이 사라지는 것처럼 허전했다.

 

어쩌다 들르면 약국은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약사 아저씨는 약을 지어 줄 때는 눈을 맞추고 펜으로 일일이 표시해 가면서 먹는 방법이나 주의 사항을 꼼꼼히 일러 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그 약을 먹으면 금방이라도 나을 것만 같아서 먼 병원을 다녀온 날도 일부러 정 약국에서 약을 받았다. 말씀을 듣고 보니 가족들의 오랜 병치레로 자주 약국을 들락거렸던 나는 아저씨를 너무 부려 먹은 것 같아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자그마한 키에 꼿꼿한 허리를 하고 눈빛이 맑아 나이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서운하지만 이젠 아저씨를 더 붙잡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건강하게 지내시라고 인사를 드리며 소원대로 아저씨의 남은 생이 행복하기를 빌었다.

 

아저씨는 잊었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기억 하나가 있다. 그 몇 해 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몹시 모욕적인 말을 듣고 마음이 많이 상해 있을 때였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바보 같고 그렇다고 말로 되갚아 줄 용기도 없어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운 뒤 병원 처방전을 들고 약국을 찾았다.

 

약을 짓고 난 아저씨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머니는 평생 이런 약을 드실 분 같지 않는데요.” 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약봉지를 건네주었다. 아저씨의 말을 듣고 집으로 오는데 무겁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상담을 받았던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말을 그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 그날 밤 약을 먹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낮에 들었던 아저씨 말이 생각나며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리고 깨어나니 아침이었다. 두어 번 약을 먹었을 뿐인데 잠을 잘 수 있었다. 편하게 마음먹으라는 충고가 아닌 그 한마디가 위안이 되었던지 바닥으로 떨어졌던 자존감과 들끓던 마음이 차츰 제자리를 찾았다.

 

어쩌다 아픔을 내비치기라도 할라치면 사람들은 들을 때뿐, 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어설픈 위로는 되레 상처가 되고 돌아서면 공허했다. 그 후로 무슨 일이 생기면 웬만하면 혼자 참고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다 뜻밖에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준 아저씨의 한마디는 눈이 뜨이게 했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가 생각한 만큼 성숙한 도량을 지닌 사람은 못되었다. 이후로도 자주 넘어지고 상처가 났다. 그때마다 아저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전히 나는 사는 일이 서툴다. 오늘도 여기저기서 부딪힌 상처를 안고서 집으로 가고 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정 약국이 보인다. 이제 약사 아저씨는 없지만, 내 안에는 떠올리기만 하면 마음을 낫게 하는 ‘정(情)’이라는 약국 하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