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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 이불 외2편 / 이 혜 연

장대명화 2025. 8. 30. 03:57

                             금붕어 이불 / 이 혜 연

 

벼르던 이불 정리를 했다. 아들의 도움을 받아 100L짜리 쓰레기봉투 다섯 장에 묵은내 나는 솜이불이며 요, 베개들을 구겨 넣었다. 마지막으로 붉은색 이불 하나가 남았다. 마저 들어내려는 아들을 말렸다.

 

“그건 둬라.”

 

이왕 버리기로 마음먹었으면 모두 버리라는 아들에게, 사촌 언니가 옛날 목화솜 이불 하나 달라 해서 그런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핑계일 뿐이다. 언니가 그런 말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언제 가지러 올는지, 오기나 할는지 알 수 없다. 설령 가져간다 한들 솜을 새로 타기 전에는 묵은내가 없어지지 않을 터이니 쓰지도 못할 게 뻔하다.

 

아들이 제집으로 돌아간 후 이불을 내려 방바닥에 펼쳐보았다. 붉은 비단 위에서 통통히 살이 오른 여러 모양의 금붕어들이 짝을 지어 유유자적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묵은내는 풍기지만 질 좋은 솜이어서 그런지 아직 폭신했다.

 

이 금붕어 이불은 혼수 이불 중 하나였다. 사십여 년 전, 어머니는 원앙 대신 금붕어가 수 놓인 이 이불을 펼쳐 보이며 솜도 특별히 좋은 것으로 했으니 금붕어처럼 화려하고 여유롭고 금슬 좋게 살라고 덕담을 하였다.

 

어머니는 금붕어를 무척 좋아했다. 살림이 풍족했던 한때에는 마당에 연못을 파서 금붕어를 키우기도 하였다. 기껏해야 단지만 한 둥근 어항 정도였지 큰 수족관은 구경조차 못 해본 시절이었음에도, 어머니는 큰 유리관에 금붕어를 넣어놓고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화려한 빛깔의 금붕어가 풍성한 꼬리를 하늘하늘 흔들며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시름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금붕어 편에서 보자면 제아무리 큰 유리관이라 한들 답답하고 무료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이지만, 어머니 눈에는 시름없이 노니는 여유롭고 자유로운 삶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머리가 명석하여 공부에 욕심을 냈지만, 외할머니의 삯바느질로 입에 풀칠하는 형편인 데다, 그 시대만 해도 어려운 형편을 무릅쓰고 여자에게 고등 공부를 시킬 만큼 열린 생각을 가진 부모가 드물어서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무심했다. 어머니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도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를 흠모하여 그분의 가방이라도 들고 따라다니고 싶어 했을 만큼 배움에 목말라했다. 그런 중에 목포상고를 나온 내 친아버지와 연애를 하여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였다.

 

쇠락하긴 했어도 양반가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고 있던 시댁에서 과부 딸에 빈한한 집안의 어머니가 달가웠을 리 없다. 아버지의 고집으로 어찌어찌 결혼은 하였으나 시댁의 구박이 자심하였다. 당시만 해도 목포상고는 유수의 학교였는 데다 용모까지 준수하여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워줄 기대를 갖게 한 아들이었을 터인데 오죽하였을까. 그런 아들이 한술 더 떠 장모까지 모시고 사는가 하면 난소에 문제가 있어 아이도 낳지 못하는 마누라를 끔찍이 아끼니 시부모의 심사가 어떠했으며 어머니의 눈치 보기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불안감에서였을까, 목마름이었을까. 어머니는 다른 여자의 몸에서 얻은 자식인 나를 당신 배 앓아 낳은 자식인 양 애지중지 키우셨다. 집착이다 싶을 만큼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실제로 어머니는 나의 생모가 나를 잉태했을 때, 당신의 아이가 다른 여자의 뱃속에 유배를 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종의 자기최면이었지 싶다.

 

고난은 계속되었다. 아버지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서른아홉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금슬 좋은 부부가 사별을 하면 외려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일찍 새 짝을 찾는다더니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얼마 되지 않아 재가를 했다. 어머니가 지금의 아버지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른다. 아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에 대한 무성한 소문들을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것 같다. 부조리 투성이인 삶. 누구라서 남의 인생을 비난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설령 당시 그 사연을 알았다 한들, 어린 내가 어찌해볼 도리도 없었을 것이다.

 

친아버지와 달리 새아버지는 무명의 화가로 생활력도 없으면서 무시로 바람을 피웠다. 어머니에게는 정신적 고통에 생활고까지 겹친 최악의 새 삶이었다. 애처가였던 친아버지나 그렇지 못한 새아버지나 배신을 안겨준 건 마찬가지였다. 고운 모습을 하고 짝과 어울려, 주는 먹이 받아먹으면서 노닐기만 하면 되는 금붕어의 삶이 부러웠을 이유다.

 

내 기억으론 금붕어는 건사하기 무척 힘이 들었다. 요즘처럼 산소 공급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걸핏하면 죽어 배를 드러내고 물 위로 떠올랐다. 비린내 풍기는 사체를 들어낼 때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았다. 슬어놓은 알을 관리하기도 까다로웠고, 수시로 물갈이와 청소를 해주어야 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어쩌면 내 친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떴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무척 몸이 약했고 신경쇠약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특히 친아버지에게 자주 까탈을 부리고 짜증을 내었다. 한약 달이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고, 우물가에서는 지네닭을 만드느라 수시로 닭을 잡았다.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기도 수차례였다.

 

그랬던 어머니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달라졌다. 거친 바닷속 물고기처럼 강인해졌다. 무능력하고 무심한 가장을 대신하여 씩씩하게 세파를 헤쳐나갔다. 공부를 탐했던 명석한 머리는 궁색한 가계를 꾸려나가는 데 쓰였다. 언제부턴가 어항은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 금붕어 이불을 나는 한 번도 덮어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지 한 해 만에 홀로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생을 걸다시피 했던 딸이었으니만큼 당신이 꿈꾸던 삶을 살기 바랐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행복이나마 누리고 싶었을 터. 아마도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나 몰래 장롱 속에 틀어박혀 있는 그 이불을 쓸어보며 박복한 당신의 삶을 한탄하며 눈물 바람을 했을 것이다.

 

5년 전 화창한 봄날, 어머니는 95세로 길고 고단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회귀를 가볍게 하려 함이었을까, 마지막 2년여는 인연의 끈도 놓고 사랑과 미움의 경계마저 지워버린, 진공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긴 생애를 돌아보면 어항 속 금붕어 비슷한 호사를 누려본 시간은 순간처럼 짧았다. 시댁의 날선 눈총에도 남편의 사랑을 방패 삼아 나를 키우던 7년여이다.

 

어항이 사라졌다고 어머니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닐 터. 왜 나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금붕어 담은 작은 어항 하나 선물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걸까. 어쩌자고 나에 대한 곡진한 사랑을 집착이고 대리만족이라며 어머니 가슴에 비수를 꽂았을까.

 

이불을 곱게 개켜 다시 장롱 안에 넣는다. 어머니에게 드리는 뒤늦은 선물이라도 되는 양.

 

 

                                                 뒷모습 / 이 혜 연

 

버리지 못한 사진 몇 장이 있다. 서른아홉,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찍은 흑백 사진들이다.

 

늘그막에 집수리를 계획하면서 많은 것을 버렸다. 앨범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이 사진들만큼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짧았던 인연, 흐릿한 기억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그중에도 유독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중절모에 롱코트를 입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 나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우리 양옆으로 서너 명의 남자 어른이 함께 걸어가고 있는데, 역광 때문에 사람들 앞에는 제각각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내장산 백양사 가는 길이라 했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 야유회에 아버지가 나를 대동한 것이다.

 

사진은 시간과 공간의 죽음이요 무덤이다. 사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히 정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진 역시 그렇다. 걸음을 옮기려 한 발을 들어 올리거나 한 걸음 내딛는 순간에서 피사체는 멈춰 있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소녀 시절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부터 ‘더 이상 없음’이라는 부재와 죽음을 인식한다. 이후 그는 사진에 대한 철학적 테제 하나를 끌어내는데, 그것은 ‘사진에 촬영된 대상은 과거에 반드시 카메라 앞에 있었지만, 동시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이다. 설령 그 대상이 지금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촬영된 순간의 ‘그’와, ‘그’라는 존재와 함께했던 순간의 장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진에 관한 노트《밝은 방》에서 그는 사진을 보는 자의 정서의 흐름을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으로 구분한다. 찍은 자의 의도와 기호를 따라가는 감정을 스투디움, 의도나 기호를 벗어난, 보는 자만의 확장된 느낌을 푼크툼이라 한다. 이 두 가지 감정은 주로 인물 사진의 경우에서 일어나는데, 푼크툼은 재현된 인물과 사진을 보는 사람이 사랑 혹은 연민의 관계에 있을 때 더 강력해진다고 한다.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내가 아버지와 나의 뒷모습이 담긴 이 사진에서 마주친 감정은 ‘푼크툼’이다. 이 사진을 촬영했던 사람의 의도는 어쩌면 앞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평화롭고 다정한 모습을 담으려 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사진 속 정지된 피사체에서 읽어낸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시간의 지속성 내지는 영속성이다. 뒷모습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대지에서 떨어진 한 발은 아버지와 내가 나란히 미래의 시간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진 속 아버지와 내가 앞을 향해 계속 걸어가다 보면 지금의 ‘나’가 젊은 아버지와 어린 나를 마중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기억이 실재가 되고 과거가 현재로 변환되는 시점時點이며 시점視點이다. 이런 상상적 느낌, 푼크툼이 가능한 것은 롤랑 바르트의 말대로 보는 자인 나와 아버지가 지극한 사랑, 연민 관계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롤랑 바르트는 이와 같은 시간의 겹침을 ‘과거 속 미래’라 한다.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의 앞에 펼쳐질 미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에두와르 부바Edouard Boubatd의 사진 해설집《뒷모습 Vues de dos》에서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뒤쪽이 진실이다”라고 했다. 앞모습은 겉치레일 뿐. 해서 그가 탐사하고자 하는 것은 등 뒤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사진 속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찾아낸 진실은 별리別離의 슬픔이다. 등을 보인다는 것은 보는 자로부터 멀어지려 함을 의미한다. 배웅 역시 상대의 등을 보는 것. 이 뒷모습 사진은 매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젊은 아버지와 어린 나를 소환시키고 배웅하기를 되풀이하게 한다. 재현再現의 기쁨과 슬픔의 영속, 이것이 내가 이 사진에서 찾아낸 등 뒤의 진실이다.

 

7년여의 짧은 인연. 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은 이 사진 속 아버지의 알 수 없는 앞모습을 닮았다.

 

 

                                 여유당(與猶堂)의 가을 / 이 혜 연

 

다시 가을입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창을 열어보니, 뜰 안의 초목들이 이별을 준비하느라 부산합니다. 밤새 뒤척여 핼쑥해진 모습으로 잎은 줄기와, 줄기는 뿌리와 그렇게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별의 순간만은 참으로 담담들 합니다. 초조해지는 건 오히려 저입니다.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서 봅니다. 마치 가는 세월을 붙잡아 보기라도 할 듯이….

 

팔당대교를 건너자 양평으로 이어지는 새 길이 시원스럽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낯섦에 잠시 쭈뼛거리다가 이내 후미진 옛길을 찾아 들어섭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차들이 이어 달리던 길은 이제는 잊혀진 여인처럼 쓸쓸하기만 합니다. 강을 따라 구불거리는 길을 그러나 제 차는 정인(情人)을 찾아가는 김유신의 말처럼 익숙하게 달려갑니다.

 

중앙선 철로가 지나는 굴다리 밑을 빠져나오자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습니다. 더욱 한적해진 길은 휘돌아 오르는 고갯길입니다. 마현(馬峴)이라 불리던 곳이지요. 그 재를 넘어 느슨하게 풀어진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산 75-1번지, 옛 이름으로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바로 열수(洌水) 선생, 당신의 고택이 있는 곳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섞는, 두물머리 변이지요. 그 때문이었을까요, 선생은 이곳을 갈대와 물을 연상시키는 초천(苕川), 혹은 열상(洌上)이라 즐겨 부르곤 하셨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선생을 다산(茶山)이 아닌, 열수 선생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선생의 학문이 무르익었고, 수많은 저서의 산실이 되기도 했던 아랫녘 초당의 이름은 그러나 지아비요 아버지이기도 했던 한 남정네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던, 인고의 세월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보다는 선생의 향리이자 젊은 시절의 추억이 오롯이 남아있는 이곳을 연상하게 해주는 열수라는 별호가 한층 정감이 갑니다.

 

기념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선생의 생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야트막한 담장 곁으로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충직한 머슴처럼 묵묵히 고택을 지키고 있군요.

 

집 안으로 들어서기 전, 먼저 ‘여유당’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는 행랑채 툇마루에 앉아 봅니다. 선생께서 사랑채로 쓰시던 곳이라지요. 수굿이 비껴드는 햇살에 빛바랜 마룻장의 나뭇결무늬가 말갛게 드러납니다. 그 결의 흐름을 따라 모든 것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요즘 들어 이곳으로 자주 발길이 향하는 것은 이런 낮고 느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의 필적이 담긴 현판을 올려다봅니다. 여유당(與猶堂)! 문득 어지러운 요즘 정치판이 생각나는군요. 18년이라는 긴 형극의 시간을 선생께 내릴 만큼 선생의 시대 역시 당쟁이 치열했지요. 그래서 벼슬살이를 끝내고 이곳 소내(苕川)로 돌아오던 해에 선생은 ‘겨울의 내(川)를 건너는 듯하고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라’는 뜻을 담은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상인방(上引枋)에 걸었던 것 아닙니까. 하지만 물밑 당쟁의 치열함 속에서도 선생과 같은 선비들이 있을 수 있었던 그 시대가 오히려 그리워지는 요즈음입니다. 선생은 공약(空約)이 아닌 신실한 애민의식,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철저한 실험, 실용정신으로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 같은 기계를 제작해, 민초들을 부역(賦役)에서 해방시키는 한편 국세를 절감하게 했습니다. 배다리를 만들어 임금의 행차에 번거로움을 덜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지요. 뿐만 아닙니다. 궁벽한 살림 때문에 홍역을 앓으면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민초들을 위해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약서를 엮었으며, 자칫 억울한 송사로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앗을까 저어해, 옥사(獄事)를 다루는 목민관의 자세와 사례(事例)들을 흠흠신서(欽欽新書)에 담았습니다. 목민심서도 같은 맥락이었지요. 경기 암행어사와 금정찰방, 곡산부사를 지내면서 목도한 관리들의 횡포와 민초들의 고초에 마음이 아팠던 선생은 시를 짓는 선비의 마음가짐에 대해서조차 이렇게 일렀습니다.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자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진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두 아들 학연, 학유에게 보냈던 글입니다. 선생의 시가 두보의 시를 많이 닮고 있음은 바로 이런 까닭인 듯합니다. 명문(名文) <파리를 조문하는 글>이 탄생하게 된 것도 굶어 죽는 백성들을 애통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니었습니까.

 

대문이 있는 동쪽으로 천천히 돌아섭니다. 순간 저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두 그루의 나무와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와 향나무입니다. 흔하디흔한 나무들이지요. 하지만 제 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은 그 두 나무의 자태였습니다. 어느 수필가의 표현처럼 신라 금관과도 같은 형태를 한 은행나무가 향나무를 지긋이 품에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은행나무의 노란빛 때문에 향나무는 더욱 푸르게 보였고, 향나무의 푸른빛으로 해서 은행나무의 노란빛은 더욱 순수해 보였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목이 메어 옵니다. 그 두 나무의 형상이 마치 정조대왕과 선생의 모습인 것만 같아서입니다. 임금과 신하라기보다는 지기(知己)와 같았던 두 분, 아니 아우를 아끼는 형의 마음처럼 선생을 향해 날아오는 질시와 음해의 화살들을 몸소 막으며 다독여 주셨던 정조대왕의 사랑은 바로 저 은행나무의 자태였습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선생의 학문은 든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경세제민 의식은 제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지음(知音) 종자기(鍾子期)의 죽음에 거문고 줄을 끊고 돌아섰던 백아(伯牙)처럼, 임금이 붕어하자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손수 쓰신 묘지명에서 두 분 영결의 순간을 엿봅니다.

 

“여름 유월 열이튿날, 마침 달밤이어서 한가하게 앉아 있었더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내각의 서리였다. 한서선(漢書選) 열 질을 임금께서 하사하시며 유시하시기를 ‘오래도록 보지 못했다.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서 주자소에 벽을 새로 발랐으니 그믐께쯤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다섯 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다섯 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셨다 한다. 서리가 말하기를 유시를 내리실 때 얼굴빛이 못 견디게 그리워하는 듯하셨고 말씀도 온화하고 부드러우셔서 다른 때와는 달랐다고 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임금의 건강에 탈이 났고 스무여드렛날에 이르러 하늘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날 밤에 책을 하사해 주시고 안부를 물어주신 것이 끝내는 영결의 말씀이셨고, 임금과 신하의 정의(情誼)는 그날 밤으로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이 일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짐을 참지 못하곤 한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얼른 문안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행랑채를 발밑에 두고 ㄱ자로 앉은 집은 방 둘에 대청뿐으로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관람자를 위한 배려인 듯 두어 칸쯤 도려 놓은 창호지 사이로 대청 안을 엿봅니다. 유품들을 한데 몰아 놓은 듯 먼지를 뒤집어쓴 집기들이 엉거주춤 놓여 있습니다. 아니 뒹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싶군요. 휑뎅그렁하기는 건넌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으로 접힌 야외용 돗자리가 미아처럼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뿐 텅 빈 채입니다. 해배기를 보내던 말년의 선생의 마음이 저러했을까요.

 

쓸쓸하여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돌아서는데 처마를 따라 가지런히 난 낙숫물 자국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을 찾는 발길이 잦아질수록 선생을 향한 그리움이 저 낙숫물 자국처럼 깊어 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 대한 아픔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뉘 있어 진실로 민초들의 고단함을 아파해 주겠는지요. 북학파의 몇몇 이름들이 스쳐 갑니다. 그러나 이용후생과 실사구시를 위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준절히 나무라셨던 선생님. 초고속시대로 세계가 지구촌이 되어버린 지금, 선생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셨던 우리의 것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잘 지켜내고 있는 것일까요.

 

뒤란을 돌아 후문을 나섭니다. 한 줄기 바람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문득 스미는 한기에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벤치에 앉습니다. 굳이 낙엽이 아니라도 손안에 느껴지는 차의 온기만으로도 가을이 이미 깊었음을 알겠습니다.

 

유택이 있는 뒷동산을 오르는 길은 두 개입니다. 생가를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이지요. 오늘은 후문 쪽인 왼편 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계단과 돌이 번갈아 놓인 길은 떨어져 누운 솔잎들로 향긋하고 푹신합니다. 상석 앞에서 공수(拱手)로 재배를 대신합니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그리움에 비석의 뒷면과 옆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선생의 행장을 읽고 또 읽어봅니다. 그리고 충주에 있는 선산을 마다하고 굳이 이곳에 묻히고자 했던 선생의 유지(遺旨)를 헤아려 봅니다. 수종사로 용문사로, 북한강과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호연지기를 키우던 시절을 잊지 못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임금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있는 한양성을 차마 떨치고 갈 수 없었음일까요.

 

추측은 그저 추측에 그칠 뿐, 선생의 마음을 헤아릴 길 없어 선생이 바라보고 계실 곳을 향해 몸을 돌려봅니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 때문인지 두물머리가 보이지 않는군요. 지금은 양수리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두 개의 물줄기가 하나 되어 거대한 흐름을 만들 듯이,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켜 보다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선생님. 그러나 물은 기꺼이 하나로 몸을 섞건만, 세류(世流)는 그렇지 못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나 봅니다. 이합집산과 음해성 폭로를 일삼는 선량들, 부정부패에 길들은 목민관들….

 

오늘, 오백여 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긴 학자로서도, 시서화에 능했던 문장가로서도 아닌, 목민관으로서의 선생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이유를 선생은 아실는지요.

 

가을바람 불어와 흰 구름 몰아내니/푸른 하늘에 그림자 하나 없어라/

 

갑자기 이 내 몸이 가벼워져서/바람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파라

 

-흰 구름-

 

열수 선생, 당신은 정녕 한줄기 가을바람이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