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노래’ / 안 윤 자
혼자 떠난 여행, 작은 캐리어 하나만을 끌고 나선 길이었다.
가방 속에는 갈아입을 간편한 옷과 두 권의 책, 노트를 넣었다. 그리고 햇반 열 개, 라면 다섯 개, 장조림이 조금 들어 있었다.
나의 작가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을 대하소설을 출간하고 몹시도 지쳐 있던 삼 년 전의 가을날, 이른바 한달살이 여정으로 맘먹고 집을 나섰다. 그때 나는 서귀포 외곽의 외따른 펜션에서 묵고 있었다. 식당도 민가도 먼, 어느 화가의 집, 삼층방이었다.
거의 탈진 상태의 심신은 휴식이 필요했다. “보약이라도 지어 먹지. 비타민 칵테일 링거를 맞으면 몸이 반짝하던데.” 걱정들을 해준 주변이 있었지만 그게 비록 피가 되는 보약일지라도 약 먹고 주사 맞고, 그런 절차들이 번거롭기 짝없어 나 스스로가 내린 처방은 조금 달랐다.
일단은 길 위의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눕고 싶으면 종일이라도 드러누워 게으름이 늘어난 타성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야만 했다. 원기를 회복시킬 처방전이 실은 보약이 아닌 내적 정화에 있다는 걸 저리도록 느끼고 있었다.
바다! 출렁대는 바다가 나를 손짓했다. 언제나 그리운 내 영혼의 피안. 그 바다가 자꾸만 나를 부르고 있었다. 굳이 고적한 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면 내 집만 한 곳이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우리 집은 소란이 없으니. 그러나 집은 익숙하고 안락한 장소일 뿐, 토굴은 아니다. 치유를 위해서는 집이라는 정형화된 공간을 떠날 필요가 있었다.
우주의 민낯이 보고 싶고 우주의 숨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럴 땐 필히 혼자여야 한다. 고독을 훼방하는 그 무슨 위안도 나태의 실마리가 돼줄 따름이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 가지 원칙은 배부른 포만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일. 위장은 신을 갈구하는 사막의 은수자처럼 날마다 비어 있어야 한다. 허기가 질 때 눈빛은 총기가 어리었으니.
눈앞의 풍경이라곤 끝없이 펼쳐진 바다. 바닷물만이 출렁이는 곳. 때맞춰 몰아친 태풍 ‘찬투’(Chanthu)로 하여 짙은 해무에 덮인 바다는 날마다 무섭도록 요동치며 원시의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 모양이 바다가 흐느껴 우는 소리로 들렸다. 해안의 야자수 잎들도 몸통을 뒤틀어가며 긴 머리채를 산발한 채로 세차게 울부짖었다.
통창 안에서 온종일 바다만을 응시한 지 십여 일이 흘러갔다. 어느 사이 나는 백이십여 편의 시를 쓰고 있었다. 시를 쓸 요량으로 거기에 간 게 아니었는데. 아니, 기력을 회복해 후속 장편을 구상하러 떠난 길이었건만. 계획했던 소설은 물 건너가고 대학노트 한 권이 시의 문장으로 빽빽이 채워져 갔다.
정말 예상한 일이 아니었는데. 종일 줄줄 쏟아져 내리는 시의 파편을 나는 줍고 있었다. 시의 언어가 내게로 와 손을 잡아주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십여 년간 나는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시간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갖다 대도 구차한 변명이 될 뿐. 많이 자책했고 침울했으며 방황했다.
차마 허송세월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그건 칼날로 손끝을 베인 쓰라림이니까. 생의 음험한 터널 속에 갇혀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데 음울한 시간만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어서 오라, 나를 재촉하고 있었지만 나는 거기로 건너가지 못했다. 이 모든 곡절은 절필했던, 실로 오랜 날들의 슬픔에 대한 푸른 비망록일 것이다.
길고도 서글픈 권태의 늪을 헤집고 나올 즈음, 내 심장은 불꽃이 되어 엷게 타오르고 있었다. 흡사 문신(文神)이 걸린 사람처럼 열에 들떴다. 글을 대면하고 골방에 나를 가둔 지 육 개월여 만에 원고지 2400매의 장편을 방아쇠 당기며 써 내려갔다. 한풀이 굿판처럼 소설이라는 연인에게로 빨려들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낮이 따로 없었다. 다만 연명할 만큼의 먹이만을 삼키며 글과 씨름했던 것 같다. 문장에 미쳐 있던 그날, 내 두 눈은 희부옇게 곪아갔는데 눈동자는 광인처럼 빛났다는 것, 그걸 나 자신이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날들의 기행은 사실상 작가로 입문하는 좁은 문이었다. 등단 삼십 년 만에 기적처럼 타오른 불꽃이었던.
혼이 다 빠지게 써 내려간 소설 원고는 ‘구름재의 집’으로 출간되었다.
새벽부터 무심히 바다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배가 고팠다. 햇반 하나를 데워 반을 먹고 반은 남겨 두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거울을 보았는데 내 눈에 파랗게 바닷물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거울을 놓칠뻔했다. 새파랗게 물이 들어 있는 내 눈동자!
아, 시의 여신이 폭풍우 몰아치는 바닷길을 지나가다 내 심장에 돋은 붉은 열꽃을 세어 보고는 놀랐나 보다. 모른 척 놔두고 그냥 지나가면 열꽃으로 온몸이 타버려 재가 될까 보아, 그게 걱정이 되어 그녀가 불꽃마다 아롱아롱 시의 꽃을 매달아 주고 갔나 보다.
내가 열꽃에 타서 죽을까 봐. 시의 여신이….
<안윤자 작가>
충남 공주 출생
1991년 ‘월간문학’ 등단
수필집 ‘벨라뎃다의 노래’· ‘사대문 밖 마을’, 시집 ‘무명 시인에게’, 역사 장편소설 ‘구름재의 집’
가톨릭평화방송 평화신문공모 대상(2020)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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