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또개 / 이 상 수
담벼락 아래 어린 감이 여럿 떨어져 있다. 감꽃과 함께 풀섶이며 길바닥에도 나뒹군다. 지난밤 세차게 불어대던 바람에 그만 버티지 못하고 낙과한 것이다. 생을 다 살아내지 못한 감또개를 보면 가슴 한쪽이 아릿해진다.
고샅길 돌아가면 큰 기와집 대문 앞에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감꽃이 팝콘처럼 매달려 눈이 부셨다. 여름이면 넓은 그늘에 동네 어른들이 자리를 깔고 더위를 피했다. 가을엔 주렁주렁 홍시가 달리고 새들이 몰려들어 나누어 먹었다. 그 곁을 지날 때마다 어린 나는 감나무를 가진 집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간밤에 바람이 불거나 비가 다녀간 이튿날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외양간 쇠죽 아궁이엔 일찍 일어난 아버지가 쇠죽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눈썹 밑에 붙어있는 잠을 비비며 동생과 함께 감나무를 향해 달렸다. 혹 누가 먼저 와서 주워가면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면 대개 우리가 제일 먼저였다.
운이 좋은 날은 양손 가득 감을 주워왔다. 전리품처럼 장독대 위나 담장 위 기왓장에 자랑스럽게 올려두었다. 야속하게도 감은 한꺼번에 익는 게 아니라서 겨우 한두 개로 동생들과 나누어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고 달콤한 순간은 짧았다. 아쉬워 입맛을 다시고 있을라치면 뒤란으로 돌아간 엄마가 항아리에서 소금에 삭힌 감을 꺼내주었다.
오월이 되면 마을이 흐붓했다. 대낮인데도 달빛이 비치는 것처럼 집집마다 환했다. 어쩌면 굴뚝마다 몽글몽글 연기가 피어올라 한꺼번에 감꽃을 피우게 하는지도 몰랐다. 초록 잎에 살짝 가린 흰 꽃들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작은 전구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자주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그 집 앞을 서성거렸다.
어느 날, 놀다가 집에 오니 붉은 고추와 숯을 엮은 새끼줄이 안방 앞에 처져 있었다. 방안에서는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막냇동생이 태어난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을 돌봐야 했다. 고무줄놀이할 때나 비석 치기를 할 때도 껌딱지처럼 등에 붙이고 놀았다. 마치 박수근의 ‘아기 업은 소녀’처럼.
막냇동생이 조금 자라자 함께 온 마을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앞산은 식량창고이자 놀이터였다. 진달래가 지천으로 필 때면 입이 보랏빛으로 변할 때까지 따먹었다. 산딸기나 개암을 만나면 최고의 행운이었다. 통통한 찔레를 꺾으러 들어갔다가 똬리 튼 뱀을 발견하곤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친 적도 있었다. 다시 뱀을 만날 것을 대비해 닥나무로 만든 새총을 가지고 산을 올랐지만 어쩌다 만나는 녀석은 우리보다 빠르게 도망갔다.
만약 내가 형이었다면 칼싸움을 하고 저수지에서 헤엄치는 법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누나를 둔 동생은 보들보들한 황토로 밥을 짓고 풀을 뜯어 반찬을 만드는 소꿉놀이에 초대되는 단골손님이었다. 그러다 싫증 나면 아직 잎이 벌어지지 않은 도라지꽃을 손으로 터트리고 호박꽃에 앉은 벌을 잡는 일에 열을 올렸다. 가만가만 나무 울타리에 앉은 잠자리를 잡았다간 쳐다보는 굵은 눈망울 때문에 살며시 놓아주기도 했다.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마을에서 반창회가 열렸다.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우리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먹구름과 파란 하늘이 반으로 섞인 그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호리호리한 몸에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 까까머리 열 살짜리 남자아이는 슬로모션으로 촬영되는 영화 속 등장인물 같았다. 차가 마당 앞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과의 이별처럼.
여름은 어김없이 태풍을 몰고 왔다. 어둠이 내리자 비바람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나무를 잡고 뿌리째 뽑을 것처럼 흔들어댔다. 마당에서 세숫대야가 날아가고 지붕에선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듯 세찬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댔다. 벽장 속에 숨은 아이를 찾아다니는 범인의 발소리를 듣는 것처럼 무섬증이 일어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며칠 동안 동생의 이마가 불같이 뜨거웠다. 지척에 병원이 없으니 물수건을 자주 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앞집 할아버지가 목신이 들었다며 향나무 우린 물을 억지로 마시게 하고는 왼쪽 팔뚝에 한자로 된 긴 주문을 적었다. 어린 내 눈에는 글자가 매우 엄숙해 보여서 금방이라도 열이 내리고 동생이 배시시 웃으며 일어날 것만 같았다. 평소에 엄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업어 주었지만 동생은 등에서 주르르 흘러내렸다. 뒤늦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동생의 옷가지며 사진이 마루에 수북하게 쌓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선명하게 알아들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때가 그랬다. 대문을 들어서는 부모님 등 뒤엔 캄캄한 허공이 업혀져 있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동생이 서 있던 마당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마을회관 근처에서 소독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입장은 서로 달라서 뇌염으로 세상 떠난 동생을 애도하기보다 어디엔가 남아 있을 빨간집모기를 박멸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걸 인지상정이라 한다면 세상인심이 너무나 야박했다. 모든 이별이 어찌 슬프지 않겠냐만 작별인사를 건넬 수 없는 것만큼 슬픈 것이 있으랴. 아무리 둘러봐도 첫눈 뜬 오리처럼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하필 그날 아침 아버지는 아픈 아들이 신발을 질질 끈다고 야단을 쳤을까. 요구르트를 먹고 싶다던 동생에게 나는 왜 건성으로 없다고 말했을까. 제 형은 말 안 듣는다고 주먹을 한 대 쥐어박기까지 했을까. 바쁜 농사 탓에 제때 병원에 데리고 가지 못했다고 엄마는 가슴을 치고 울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너무 일찍 죽음을 알아버린 나는 그때부터 삶에 대해 과묵해졌다.
감또개를 하나 주워본다. 다행히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다.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 반지르르 윤기가 난다. 자신의 생을 다하지 못한 것들에선 언제나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어쩌면 동생은 하늘나라에서 크고 튼실한 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부야! 왜 그렇게 서 있노? 빨리 감 주워야지?
하늘 저쪽에서 들려오는 초록빛 그리움을 가만히 가슴에 품는다.
도린자기 / 이상수
여울을 가로질러 외나무다리가 건너가고 있다. 참방참방 발목까지 차오를 듯한 물길은 잠시 바위 근처에서 걸음을 멈춘다. 수면 위엔 윤슬이 반짝이며 수를 놓는다. 청단풍나무 그늘이 만든 웅덩이에 뻐꾸기 소리가 나지막이 떠다닌다.
회룡포처럼 물이 돌아나가는 곳을 도린자기라 한다. 수회水回라고도 하는데 하회마을을 물돌이동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큰 강이 마을을 감싸며 휘어지는 모습이 웅장하다면, 계곡을 끼고 슬쩍 굽어지는 도린자기는 아기자기한 맛이 난다. 여울 양쪽으로 늘어선 나뭇가지들은 악수를 청하려는 듯 물가로 휘어져 있다. 한길 가량 되는 폭은 도움닫기로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심의 번잡함을 피해 고요히 사색에 잠길 수 있기에 홀로 산에 오르길 좋아한다. 늘푸른나무와 갈잎나무가 빽빽한 산길에 들어서면 쪼르르 청설모가 앞장서 길을 안내한다. 풀숲에선 장끼가 후드득 날아오르고 산비둘기 소리가 추임새를 넣으면서 산은 점점 더 깊어진다. 가파른 길이 두어 번 휘모리장단으로 몰아친 뒤엔 호흡이 가빠지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지친 다릴 이끌며 산모퉁이를 돌면 거기, 웅덩이가 등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시골 대부분이 그렇듯 집안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다. 하지만 우리 집은 그럭저럭 막내딸을 대학교에 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던 직장은 아니었지만 바로 일자리를 구해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신혼은 막 시원始原을 출발한 물처럼 설레었다. 곧이어 아이가 태어났고 맞벌이로 생활에는 큰 부족함이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볕 좋은 땅에 아늑한 집 한 채 세울 듯도 싶었다.
시련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막 둘째를 출산한 뒤 남편이 갑자기 직장을 잃었다. 백일 된 아이를 떼어놓고 호구지책으로 다시 일하러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할 때 빌린 전세금은 이자를 갚기도 힘들었다.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보험설계사를 하면서 방과 후에 아이들을 가르쳤다. 동료보다 더 많이 벌어야 했다. 곁을 내어줄 시간도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더러는 넘어지고 세상의 벽에 막히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흘러왔다.
물가로 내려가 쪼그리고 앉는다. 정상까진 올라 온 만큼 더 가야 한다. 물속에 손을 넣으니 살짝 한기가 돈다. 물은 바닥까지 맑아서 얼굴이 고스란히 비친다. 나르시스가 된 내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지금쯤 생의 어느 순간을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동그란 자갈 사이로 가재가 뒷걸음친다. 그 뒤로 피라미가 병정놀이하듯 따라간다. 납작한 돌멩이를 집어 물수제비를 뜬다. 통통통통. 물비늘을 밟으며 건너간 기슭에 말갛게 물봉선이 피어있다.
잠시 흐름을 멈추고 있는 물은 숱한 격랑의 시간을 지나 이곳에 당도했을 것이다. 험한 골짜기를 내려오면서 바위에 부딪히고 나뭇가지에 긁혀 상처를 입기도 하면서. 아득한 벼랑에서 떨어지기도, 급류를 만나 세차게 휘둘리기도 여러 번이었겠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야 했으리라. 그럴 때마다 주저앉아 흐르기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까.
직진의 삶을 나는 바랐다. 멈추어 있거나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물질적인 성공을 목표로 삼았다. 더 나아지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담금질 했다. 남들보다 앞세울 것이 필요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능력과 상관없이 타인의 이목에 맞춰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했고 언제나 그 지점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며 좌절의 늪에 빠졌다.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도린자기에서 발을 멈춘다. 손수건을 적셔 땀을 닦고 준비해온 음식을 꺼내 먹기도 한다.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더러는 이제까지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앞만 보고 걷다가 놓친 산 풍경을 그제야 눈에 담는다.
지상의 모든 길과 강은 적당히 휘어져 있다. 어느 시인은 굽은 나무에 함박눈이 쌓이고 새들도 더 많이 날아온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는 획의 굳셈을 중요시하다가 오십 대에 이르러 부드러워지며 능숙한 추사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굽어져야 온전하여지고 휘어져야 바르게 될 수 있다는 노자의 ‘곡즉전 왕즉직曲則全 枉則直’을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도린자기는 물의 모퉁이다. 직선으로 흐르던 각이 시간을 인내하며 만든 둥근 물굽이다. 직선이 목표 지향성을 가진다면 곡선은 과정 중심형이라고나 할까. 자신에게 치열했던 것들만이 굽이치며 반짝이는 모래톱을 형성하고 웅덩이를 만든다. 젊은 날의 열정과 부질없는 욕망을 가라앉히곤 비로소 고요해진다.
인생의 모퉁이를 여러 번 지나온 아버지는 가끔 이렇게 말했다. 일이 아무리 바빠도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도움을 주고 손해 보더라도 내어주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전력 질주했고 나만을 위해 살았기에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갖지도 못했는데 나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물은 흐르면서 몇 개의 굽이를 만든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욕망을 버린다. 이윽고 하류에 가까워지면서 몸은 사라지고 정신의 뼈만 남게 되리라. 그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깊이를 가지게 될 것이다. 지천명에 이를 때까지 과연 나는 세상의 욕심을 내려놨던가. 도린자기는 자기반성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긴장과 이완의 줄다리기라면 쉰에 이른 나는 변곡점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이제까지의 성취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알 것 같다. 물이 모퉁이에서 숨 가쁘게 달려오던 저를 멈추고 사색에 잠겨 있듯 이제 껴안으려고만 했던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물푸레나무 위로 곤줄박이 한 쌍 지저귀고 사람들의 미소가 햇귀처럼 반짝인다. 무거워질 때마다 자신을 비우며 바다에 이르는 물의 자세처럼 우리네 삶도 수많은 도린자기를 거쳐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리라.
피곤하던 다리도 어느새 회복되었다. 아까보다 훨씬 가벼워진 배낭을 짊어지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니 몸이 청정해진다. 문득 맑은 물소리 하나가 내 안의 모퉁이를 돌아간다.
초록의 완성 / 이상수
산수유 꽃눈이 초록 왕관을 쓰고 있다. 팥배나무 종아리에 물이 오르고 붓순나무가 엷은 기지개를 켠다. 겨우내 칩거를 끝낸 연둣빛 은자들이 눈을 뜨는 시간. 차가운 침묵으로 버티던 얼음은 수런대는 소리에 스스로 봉인을 풀고, 위세를 떨치던 동장군도 산골짜기로 흰 꼬리를 감춘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가만히 한 세계가 열린다.
삼월의 숲속을 거닐다 보면 초록은 피는 것이 아니라 번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화선지 같은 등성이마다 발묵하듯 천천히 제 존재를 넓혀나간다. 양지에서 음지로, 산 아래에서 등성이로 차곡차곡 봄을 채색하고 상심한 골짜기를 메운다. 보이지 않는 뿌리론 찰진 흙을 삼키며 아찔한 향기를 공중에 흩뿌리며.
비제 ‘아를르의 여인’을 들으면 플루트, 여섯 개의 구멍마다 투명한 새싹이 돋는다. 얕으면서 깊고, 좁은 듯 넓으며, 낮은 듯 높은음은 끊어질 듯 이어진다. 종달새 소리 같기도 하고 개울물 소리 같기도 한 미뉴에트는 모음곡 중 가장 청아하고 아름다운 곡이다. 그럴 때 플루트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프로방스 지방의 아름다운 봄날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초록은 공감각적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텀블링하듯 경쾌하게 튕겨낸다. 낮이면 햇살 목욕을 하고 밤엔 달빛으로 마사지를 한다. 손금 같은 잎맥도 이때쯤 그어져 여신 티케는 희고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 물고기 뼈 같은 빗살무늬엔 오롯이 한 생이 새겨진다. 가끔 굵고 가느다란 선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이 무늬를 남기기도 한다. 방랑과 정착, 격정과 고요 사이에서 잠시 갈등을 겪지만 이내 평상심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은 삶을 응시하는 그만의 특성 때문이다.
고흐가 노랑의 천재라면 세잔은 초록의 화가로 불린다. 그의 수욕도 연작에는 어김없이 나무들이 등장한다. 마치 수액으로 목욕을 하는 듯하다. 초록은 세잔에서 시작되고 세잔에서 완성된다. 피카소는 세잔의 수욕도를 본떠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한다. 신이 세상에 내려준 최초의 색은 초록이 아니었을까. 자연을 상징하는 원초적인 색, 이것은 인류의 먼 조상이기도 하다.
초록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다양하다. 칸딘스키는 ‘움직임이 없는 특성 때문에 휴식의 시간이 지나면 쉽게 싫증’날 수 있다 했고, 에바 헬러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는 뚱뚱한 소’라고 날 선 공격을 퍼부었다. 셰익스피어는 ‘질투는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다’며 심리학적 접근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변명이나 대꾸도 하지 않는다. 왜냐면 초록은 그냥 초록이기 때문이다.
풋풋한 새내기 시절, 캠퍼스에서 그를 만났다. 이제 막 이파리를 매단 마로니에 가로수길 사이로 운명처럼 한 남자가 걸어왔다. 좌절과 시대의 우울과 불확실한 미래를 안고. 잔디밭에서, 도서관에서, 막걸릿집에서, 때론 자취방 앞에서 우린 서로에게 몰입했다. 정치적인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길거리엔 최루탄이 난무했고 그는 서둘러 입대를 했다. 다시 캠퍼스에 나타났을 때 나는 사회의 거친 풍랑을 만나 표류하는 중이었다. 그는 무지개 저쪽 이상을 좇았고 나는 현실에 분주했다. 마로니에 이파리가 우거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초록은 동색이지만 개성 없이 복제된 청춘이 아니다. 파랑과 노랑의 비율에 따라 청록이나 황록, 암록으로 구분하듯 가장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다. 연못 위로 삼삼오오 떠다니는 개구리밥과 바위 위를 수놓는 애기솔이끼가 같을 수는 없다. 파랑과 노랑을 섞으면 발현되는 색이지만 어느 한쪽에 예속되지 않는다. 초록은 인공의 반대, 문명에 대한 거부를 나타낸다. 메마르고 딱딱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차가운 회색의 도시인들은 초록을 신처럼 경배한다.
초록은 양면성을 가진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한다. 한하운은 보리피리를 불며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떠올렸다. 보리밭에는 해맑은 그의 영혼과 황톳빛 밭둑이 어우러진다. 애니메이션 영화 에픽 <숲속의 전설>에서 초록은 숲의 정령으로 등장한다. 숲을 파괴하려는 거대한 세력과 용감하게 맞서 싸워 이를 지켜낸다. 그럴 때 초록은 단호하다. 화면은 시종일관 초록으로 가득 채워진다. 이처럼 초록은 깊은 영혼의 울림을 가지는 현자이면서 불의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되기도 한다.
갓 뜯어온 풋나물로 겉절이를 한다. 봄동이며, 유채, 풋마늘을 고춧가루와 식초, 참기름을 넣고 버무리면 알싸한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살짝 데친 두릅순이며 머위잎도 곁에 놓는다. 겨울 풍상을 이겨낸 봄동은 상큼하고 유채는 약간 아릿하다. 어린 두릅순의 첫맛은 달짝지근하고 머위 잎은 씁쓰름하지만 은은한 향기가 입안에 오래 남는다. 어떤 이파리는 태만한 삶을 깨우고 어떤 것은 살신성인 약이 되어준다. 초록을 싸서 한입 가득 넣는 친구의 입가에 봄이 묻어난다.
초록은 마중물이다. 계절의 밑바닥까지 저를 내려보내 마침내 신록을 길어 올린다. 겸양지덕의 자세는 언제나 타인지향적이다. 인내한 자의 영광을 스스럼없이 열매에게 양보한다. 저라고 왜 화려한 주연이 되고 싶은 적이 없었을까. 갈채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무대에 서고 싶은 적은 또 없었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계를 결코 넘어서는 법이 없다. 중심을 탐하거나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지지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말을 가장 잘 실천하는 종족이다.
봄의 막이 내리면 초록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무대를 떠난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빈틈없이 채운 후 단 하나의 박수갈채도 없이 퇴장한다. 늙어가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없다며 인기절정에 은퇴한 배우 그레타 가르보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는 시는 그를 위해 바쳐진 헌시다. 하지만 에메랄드 반짝이는 레이디 엘리엇 섬, 달빛 아래에서 바라보는 페리도트 보석, 청머리앵무새의 꼬리깃털에서 초록은 영원히 살아있다.
오월, 회화나무 그늘 속에서 소쩍새가 울 때 초록은 마침내 자신을 완성한다.
의자에 대한 자세 / 이상수
의자는 풍경의 낙관이다. 산들바람 부는 드넓은 풀밭이나 파도 소리 철썩이는 해변, 삶이 펄떡이는 시장 한쪽에서나 아이들 다 돌아간 운동장 귀퉁이에 놓인 의자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은유다.
의자는 앉음과 선 사이, 휴식과 대기의 틈, 어제와 내일의 중간에 있다. 사막 같은 인생 항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오아시스가 되어 준다. 두 다리의 불완전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심리적 환각제다. 지음知音이자 인생을 함께 나누는 반려이다. 다리는 세 개로 부족함이 없지만 개를 질투하여 네 개로 되었다는 장 그노소의 말은 너무 피상적인 접근법이라 불온하다.
초등학교 때 내 의자는 높아서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게다가 청소를 하느라 책상 위에 올릴 때는 무거워서 언제나 힘에 부쳤다. 또래보다 어린 나이에 입학해서 반 아이들보다 키는 물론, 생각도 작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빌려 입은 옷처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몸에 꼭 맞는 의자를 만나지 못한 건 순전히 소극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 의자는 내게 친근하지 못한 존재였지만.
덴마크사람들은 첫 월급을 타면 의자를 산다. 인생은 바꿔 말하면 시간이고, 그 시간을 보내는 곳은 공간이어서 안락한 의자는 생활의 질과 만족도를 높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몸에 지닐 물건을 사기보다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아름다운 공간을 꾸미는 의자를 준비해줄 수 있는 그들의 중심엔 언제나 사람이 살고 있다.
의자는 까다롭지 않다. 땅보다 높고 무릎보다 낮으면 무엇이나 의자다. 노인이 힘겹게 올라가는 계단이나 등산객이 쉬어가는 바위도 여차하면 의자가 되어준다. 베어버린 나무 밑둥치나 노점상 보따리도 의자가 된다. 때와 장소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지만, 그의 속성은 언제나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데 충실하다. 한때 의자가 욕망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의자는 가진 걸 남을 위해 쓸 줄 아는 선한 의지뿐이어서 신분에 따라 모양을 구분 짓는 저의는 애당초 없었다. 다만 인간의 욕심이 크기를 키우고 등받이의 높이를 올려 서열을 세우고 직함도 부여했을 뿐.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의자들’에는 사십여 개의 의자가 등장한다. 무대 위에는 보이지 않는 손님인 대령과 귀부인, 황제, 사진사와 미인이 앉은 의자가 있다. 실제 인물은 노인 부부와 변사뿐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사오보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자 의자에 메달과 증서를 수여하기도 했다. 의자에 인격을 부여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의자는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하다. 긴장보다는 해체를, 분열보다는 통섭을 부른다. 의자 위에서 사람들은 쉽게 느슨해지고 좀 더 솔직해진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나는 자주 베란다 의자에 앉는다. 낮의 소란과 자꾸만 겉돌기만 했던 친구와의 대화나 아침나절 괜히 투정을 부리고 출근한 남편의 일도 거기선 다 용서가 된다. 의자의 어떤 DNA가 이런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연구보고서를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다.
고흐는 평생 두 개의 의자를 그렸다. 하나는 자신의 의자로, 식탁에 앉아 빵 한 조각만으로 허기를 채우는 가난한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고갱의 의자로, 여유롭게 앉아 차를 마시는 귀족의 의자 같았다. 소로우는 집 안에 세 개의 의자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하여 다른 하나는 우정, 남은 하나는 사교를 위해서. 법정스님의 의자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지를 반성하는 사유의 의자였다.
친정에 가면 팔순이 가까운 엄마는 늘 의자에 앉아 있다. 허리가 아프다며 흔들의자에 앉아 나를 맞는다. 자꾸만 체격이 왜소해져서 의자에 묻힌 듯 보일 때가 많다. 어떨 땐 엄마가 의자 같고 의자가 엄마 같다.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가는 중이다. 단 하나의 수분도 남아있지 않을 때 엄마는 의자의 품에 안겨 먼 곳으로 떠날 것이다.
의자는 이타주의자다. 그의 촉수는 언제나 타인 지향적이다. 한 번도 제 자신을 위해 자리를 준비하지 않는다. 남들이 더 많이 사용하는 내 이름처럼 뼛속까지 살신성인의 유전자를 타고났다. 어디 사람뿐이겠는가. 새나 다람쥐는 물론 바람이나 구름까지 쉬어가게 한다. 만물을 제품에 아우르는 것을 보면 최고의 도는 의자일지도 모른다.
가끔 늦은 밤 버스를 타고 귀가를 한다. 막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어딘가 서로 닮아있다. 나이 든 노파거나, 옷차림이 후줄근한 중년의 남자이거나, 혹은 무거운 가방을 둘러맨 학생들이거나. 그럴 때 창가에 앉은 의자들은 그들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준다. 시간의 쓸쓸함이나 밥벌이의 고단함이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을 막차의 의자만큼 이해해주는 이가 또 있을까. 그러니 삶을 알려면 막차를 타보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언젠가 물 위에 뜬 의자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의자는 한 척의 배를 닮았다.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우린 모두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 건 아닐까. 의자에 앉아 빵을 먹고, 의자에 앉아 일을 하고, 의자에 앉아 연애를 하고, 의자에 앉아 죽어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생애를 정의할 때 그건 그 사람과 평생 함께한 그의 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옳은 판단이다. 그의 의자가 얼마나 정직했는가. 날카로운 모서리가 둥글어졌는가. 타인에게 자신의 이익을 양보한 적이 있는가. 어떤 의자들과 만나고 어떤 의자를 멀리했는가. 그리고 마침내 어느 해변에 닿았는가 같은.
헤르만 헤세의‘의자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화가가 되고 싶은 주인공은 다락방에서 발견한 등나무 의자를 그리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도 사물의 겉모습만을 묘사할 따름이었다. 사물의 깊이에 대해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림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화가가 되기를 포기했다. 홀로 남은 의자는 그에게 일러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쩌면 사물의 깊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함께 깊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하지 않았을까.
의자가 언제나 엎드린 채 견디는 것은 낙타의 숙명과 닮았다. 지도도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인생이나 사막이나 마찬가지다. 낙타는 사막을 완성하고 의자는 풍경을 완성한다.
차심 / 이상수
저걸 차茶의 마음이라 할까. 찻잔 안쪽에 무수한 금들이 그어져 있다. 촘촘하게 새겨진 무늬들이 물고기 비늘 같다. 찻물을 따르자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선들이 잔잔하게 일렁인다.
차심이란 미세하게 금이 간 찻잔에 찻물이 스며든 것을 말한다. 마름모꼴이거나 오각형 모양의 무늬들은 찻물이 담겨 있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통상 가마에서 갓 나온 도자기의 유약이 상온과 만날 때 생긴 빙렬氷裂에서 비롯되는데 얼음이 갈라지는 모양과 흡사하다. 차심은 빙렬을 타고 차가 오랫동안 스며들어 생긴 시간의 흔적들이다.
오랜만에 들른 친정집은 한 해 농사를 마감하고 고즈넉해져 있었다. 늦은 점심을 물리고 부녀가 마주 앉았다. 준비해 간 차를 마시며 저물어가는 들녘을 바라본다. 아버지의 얼굴은 몇 달 전보다 조금 더 수척해진 모습이다. 여든의 세월을 건너온 얼굴엔 주름이 빼곡하다. 이마며, 눈가, 입가에 고랑처럼 패여 있는 이력들은 어떤 것은 깊고 어떤 것은 소용돌이를 이루기도 한다. 주름 하나하나마다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해진다.
우리 삼 남매가 한창 공부할 시기에 낙농 파동이 일어났다. 공급과잉으로 우유가 남아돌자 회사에서는 납품할 양을 크게 줄여버렸다. 추위와 새벽잠을 쫓으며 짜낸 우유는 고스란히 버릴 수밖에 없었다. 도랑을 타고 흐르던 허연 우유는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 같았다. 게다가 사료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송아지 가격이 폭락했다. 하지만 남들이 서둘러 소를 내다 팔 때도 아버지는 가족 같은 젖소는 결코 팔 수 없다며 어려운 시기를 견뎌냈다.
어느 해는 애써 장만한 여러 마지기 논마저 태풍으로 휩쓸려 가버렸다. 벼와 자갈이 뒤엉킨 논바닥에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던 굽은 등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런 고비를 넘을 때마다 당신의 얼굴엔 하나둘 차심 같은 주름이 새겨졌으리라.
언젠가 가본 부석사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는 주름이 무수하게 나 있었다. 처마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도 있고 주춧돌에서 위로 올라간 것도 있었지만 서로 비껴가며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자연스러웠다. 나뭇결을 따라 굵고 가느다란 선이 촘촘하게 메우고 있어 마치 주름이 기둥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짧고 길게 그어진 선 하나하나엔 천삼백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눈, 비, 햇살과 함께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가 차곡차곡 쟁여졌을, 시간의 신전에 기대 몸속 깊숙이 전해져오는 어떤 장구함을 느꼈다.
그해 여름, 열 살 된 막내가 떠나던 때는 연일 날씨가 가마솥처럼 절절 끓어올랐다. 바쁜 농사일로 식구들 얼굴 보기도 쉽지 않았지만 아파 누워있는 막내를 들여다보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여름방학을 맞은 우리도 제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였다. 정확한 병명도 모르는 채 며칠을 앓다가 뒤늦게 병원으로 갔더니 뇌염이라 했다. 미처 이별을 준비할 새도 없이 동생을 떠나보내고 말았다. 미리 손을 썼다면 살릴 수 있었을까. 당신 가슴엔 평생 지워질 리 없는 가장 큰 주름 하나가 새겨졌다.
언니의 재생불량성빈혈도 아버지에게 골 깊은 주름 하나를 보태고 말았다. 병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니의 몸을 괴롭히고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 팠다.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차라리 그대로 죽고 싶다는 언니를 달래가며 희망을 걸고 말馬의 혈청을 맞혔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한창 청춘을 즐길 나이에 시들어가는 딸을 보는 것은 통증 없이 바라보기 어려웠으리라.
찻잔을 쥔 아버지 손등에 크고 작은 주름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씨 뿌리고 추수하며 지게 지던, 손바닥은 굳은살로 투박하다. 어디 손뿐이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안쪽에도 수많은 굴곡이 골짜기를 이루고 있으리라. 자식이며 농사 걱정은 일일이 다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당신을 어렵게 했을 것이다.
주름찻잔버섯은 내면에 주름을 가득 만들어 포자가 성숙할 때까지 보호한다. 갓 태어난 버섯은 흰 막으로 덮여 있다가 포자를 날려 보낼 때쯤 열린다. 나비 날개에 퍼져 있는 주름은 햇빛을 흡수하고 체온을 조절한다. 식물과 곤충이 종족 보존을 위해 주름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의 주름은 어떤 의미일까.
아버지에겐 슬픈 주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해, 수십 년 살았던 초가를 허물고 근사한 집을 짓게 되었다. 솜씨 있는 목수에게 부탁해 대들보를 올리고 기와를 얹었다. 바쁜 농사로 해가 짧아도 당신은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꼼꼼하게 살폈다. 초가는 이 년 주기로 지붕을 새로 올려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도 든든한 처마 아래서 가족이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땐 행복한 주름 하나도 가만히 새겨졌으리라.
골수이식은 언니에게 건강한 삶을 선물해 주었다. 새 식구가 태어나고 아픔은 서서히 옅어져 갔다. 가끔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을 때 아버지의 얼굴도 활짝 펴지곤 했다. 차심이 찻잔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것처럼 아버지의 삶도 기쁨과 슬픔으로 직조되어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내려놓은 찻잔 속에 늦가을 햇살이 담긴다. 고요하던 수면이 잠시 출렁거리다 이내 잔잔해진다. 아버지가 찻잔을 그러쥔다. 주름진 손등 위로 당신의 일대기가 고요하게 흘러간다. 모든 희로애락을 거쳐 산수의 나이에 이른 모습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다.
아버지의 손을 가만히 잡아본다. 거칠고 차갑지만 따뜻한 당신의 마음이 내 안으로 건너온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알싸해진다. 그윽이 바라보는 당신의 눈가로 쇠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다시 찻물을 따른다. 찻잔 속의 주름들이 더 선명해진다. 고요해진 그 안엔 아버지를 향한, 작고 여리지만 따뜻한 내 마음도 몇 개 새겨졌으면 좋겠다. 문득 보이지 않는 손 하나가 토닥토닥 내 어깨를 두드린다. 연둣빛 둥근 향이 방 안에 가득 퍼져나간다.
목탄화 속으로 / 이상수
가로등이 하나둘 목련처럼 피어난다. 어스름이 발묵하는 시간, 먼 산이 먹빛에 잠기고 들녘은 천천히 지워진다. 사각의 창문마다 둥근 불빛이 내걸리면 저녁의 품속으로 사람들이 귀가한다.
해가 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밀려온다.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계피처럼 아릿하여 멀미하듯 거리를 표류한다. 낯익은 상점이며 형형색색의 간판들과 무심히 지나가는 타인 틈에 섞이면 마술처럼 슬몃 내가 사라짐을 느낀다. 그 가만한 스러짐이 좋아 어둠의 발치에 혼자 서 있을 때가 많다.
프랑스에서는 해 질 녘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한다. 사물의 윤곽이 희미해져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란 뜻이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모호함, 동료인지 적인지 모르는 일말의 불안, 그런 경계의 허물어짐을 아우르는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는 박모薄暮 또는 땅거미라 부르는 이때, 빛이 사라진 자리에 푸르스름한 이내가 번지면 근원을 알 수 없는 아득함에 젖는다.
낮이 생산의 시간이라면 저녁은 휴식의 시간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경쟁과 속도와 다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누군가에게 창을 겨누어야 하고 앞만 보고 질주해야 한다.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속도는 느려지고 창은 무뎌진다. 그러면서 슬쩍 서로의 지친 어깨를 연민으로 바라본다.
가끔 고흐의‘밤의 카페테라스’에 앉는다. 노란 불빛은 처마 끝에서 명멸하고 목화솜 같은 별은 송이송이 시린 무릎 위로 흩어진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쓸쓸함을 눈처럼 털어내며 나도 그 나른함 속에 섞인다. 어디선가 쇼팽의 야상곡이 흘러나오고 마음을 파고드는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에 하루의 무게를 벗어던지게 된다. 맞은편엔 으레 세계에 대한 우울로 제 귀를 잘라버린 한 사내가 시가를 문 채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저녁이 유난히 기다려지는 것은 내가 보낸 낮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그래프가 그려지고 숫자로 평가받는 일은 긴장의 연속이다. 동료의 실적은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주기 어렵다.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 주눅들 때도 많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는 얼마나 나를 채찍질했던가? 그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낮 동안 대립각이 컸거나 다른 사람보다 목소리를 높였을 때 더 허전해짐을 느낀다.
아버지는 언제나 땅거미를 지게에 얹고 돌아왔다. 종일 일한 몸에선 아련하게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고요하던 집안이 분주해지는 순간도 그때부터였다. 외양간에 여물이 넣어지고 부엌에선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물물로 목물하는 아버지 곁에서 엄마는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다.
백야는 고위도 지방에서 한여름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북극에서는 하지 무렵, 남극에서는 동지 무렵 일어나는데 가장 긴 곳은 육 개월 이상 지속된다. 저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편두통을 앓거나 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 아마도 제대로 된 휴식의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꾼다. 저녁이 없었다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와 모차르트의 세레나데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뭉크는 또 어떻게 푸른 밤을 그릴 수 있었겠는가. 석모도가 그토록 아름다운 노을을 품을 수 있는 것도 저녁 덕분이다. 하루 어느 때고 의미 없는 시간은 없겠지만 내게 있어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한 이유는 욕망을 향해 달리던 낮의 긴장을 멈추어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고요한 침잠, 만약 낮이 계속된다면 언제까지나 헛됨만 뒤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녁은 뫼비우스의 띠다. 소멸인 듯 생성하고, 끝일 듯 시작하며, 어둠인 듯 밝음이다. 저마다의 존재들이 스스로 울타리를 지워버리는 자기반성의 시간이다. 한 경계가 다른 경계 속으로 스며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달맞이꽃은 덤불 속으로, 해오라기는 강기슭에, 나무는 숲으로 스며든다. 기쁨은 슬픔을, 따뜻함은 외로움을, 내일은 오늘을 품는다. 멀리 보이는 다리와 가로등과 자동차 불빛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녹아들어 하나가 된다.
대문간에 기대어 남편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해는 어슴어슴 넘어가고 등에 업은 아이는 자꾸 보채기만 했다. 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느닷없이 실직하고 평생 해보지 않던 일용직을 전전하던 때였다. 어떤 날은 일감이 있었고 어떤 날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언덕 아래서 길게 그림자를 끌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면 괜스레 눈가가 촉촉해져 왔다. 그때의 저녁은 벼랑처럼 아득하고 절망적이었다.
강가에 앉아 천천히 저물어가는 하루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풍경 속으로 번지는 어스름은 모든 것을 다 껴안는다. 사랑과 이별, 행복과 불행, 웃음과 눈물까지. 품어서 혼연일체가 된다. 모든 사물이 원래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듯. 아득하던 시간도 지나고 보니 다 옛일이 되어버렸다.
어스름은 스스로 깊어지는 법을 안다. 높이와 넓이만을 추구했던 욕망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순간, 먼 것들은 조금씩 곁을 내어준다. 움켜쥐려 했던 손은 늘 비어있고 밖을 향했던 걸음은 어느새 내 안으로 돌아와 있다.‘나는 나를 떠나서 너무 먼 곳을 배회했구나.’하루의 고단함을 발아래 내려놓자 그제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어두워져 가는 강가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강물에 비친 얼굴 하나가 천천히 지워진다. 산 그림자가 스러지고, 조약돌이 사라지고, 가로등 불빛마저도 흐릿해진다. 자신의 경계를 미련 없이 버리는 저 모습이야말로 아름다운 망언사忘言師가 아닐까.
누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돌아보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기르는 개일 수도 있고 야성의 늑대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농담濃淡을 받아들이리라. 익숙한 것들은 익숙한 대로, 낯선 것들은 또 낯선 대로. 지금은 그런 이분법들까지 다 허용하는 시간이니.
멀리, 수묵화 걸린 풍경 너머로 저녁이 소실점으로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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