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쓰기의 대화 / 김 홍 은
글을 쓰는 일은 누구나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문학 장르 중에서도 수필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다른 분야도 쓰고 싶은 대로 쓰면 어쨌거나 글이 된다. 비단 수필만이 꼭 아무나 쓰는 그런 글은 아니다. 수필문학의 범위는 폭을 넓혀 다양한 문장화한 모든 글에 이르는 작품을 수필의 범주에 편입시키고 있다. 이런 생각에서 수필은 쉽게 쓰는 무형식의 글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수필을 쓰는 작가들조차 주변에서 일어나는 잡사한 이야기를 쓰면 글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듯싶다. 수필은 글쓰기가 쉬운 만큼 좋은 글을 쓰기는 더욱 어렵다. 작가라면 누구든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런 글은 어떤 글일까? 다시 한 번 좋은 글쓰기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싶다.
정목일 수필가는 ‘좋은 글’이란,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한 번이라도 더 읽고 싶은 글, 마음에 느낌과 인상이 남아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 할 것이다. 이런 글은 감동, 새로움, 흥미, 지식, 정서, 교훈, 평화, 용기, 지혜를 주며 독자들의 인생에 가치와 의미와 깨달음을 준다며, 독자가 생각하고 느끼지 못한 것, 상상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얻은 글에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고 유머와 해학으로 독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글에는 즐거움과 통쾌함이 있다고 하였다.
최원현 수필평론가는 좋은 수필쓰기에서 이렇게 들려준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해박하고 광범한 지식, 심오한 사상, 예술적 감각, 작가로서의 눈, 예리한 직관력과 탁월한 관찰력, 풍부하고 뛰어난 상상력 등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건들만 충족된다 해서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진솔함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고, 두번째는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문장력이 받침되어 주어야 한다. 라고 한다.
김태길 교수는 ‘좋은 수필’ 작품을 구성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타당한 조언(助言)이 하나 있다며 ‘한 작품의 소재(素材)에 관해서 자기가 아는 바를 모두 기록하려고 들지 말고, 중요한 부분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조언이다. 가지(枝)와 잎(葉)을 모두 그리려고 하면 말이 많아지고 독자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글이 나오기 쉽다. 수필로서의 글은 함축성이 많은 것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독자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라 하고 있다.
이철호 수필가는 ‘좋은 수필’은 첫째 읽기 쉬워야 하고, 둘째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짧아야하고
셋째 강한 인상을 주어야하고, 넷째 즐거움을 주는 글, 다섯째 품격이 넘치는 글, 여섯째 진솔한 글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문장을 읽어 가는 가운데 리듬이 있고, 깊은 뜻이 있고, 군더더기 없이 산뜻하게 이어져야 한다. 간결하면서도 짧은 문장이야 말로 수필에 있어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자기만의 독특한 소재나 단어를 발굴하여 생기가 넘치게 써야 한다. 그래야만 강한 인상을 주는 살아 있는 글이 될 수 있다.
수필이 재미있게 되려면 시(詩)적인 정서가 감돌고, 소설처럼 이야기가 구수하게 잘 짜여져야 한다. 웃음 속에 날카롭게 번득이는 재치도 보여야 하고, 가슴을 울려주는 진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진실성, 예술성이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 새롭게 탄생된 글로 지나간 추억 속에서는 절실한 그리움이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글의 품격, 즉 문격(文格)이 담겨있어야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한상렬수필평론가는 이렇게 들려준다. 수필문학에서의 문학적 ‘낯설게 하기’의 구체적인 구현 방법을 탐색하기 전에, 먼저 문학적 낯설게 하기가 수필의 미학과 어떤 상관 관련이 있는가.
슈클로프스키의 지적과 같이 낯설게 하기는 낯익은 대상을 낯설게 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지각과 인식의 시간을 연장할 수 있게 한다. 낯설게 하기의 창작 기법으로 소재 선택, 기법, 구조, 의미화의 차원 등으로 미적 효과를 검토한 일이 있다며, 수필문학은 관념의 형상화를 통해 작가와 독자 사이의 정서적이며 지적인 상호소통을 이루어내는 장르로 주제와 소재 그리고 형식 사이의 결속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미래의 수필은 전통적 방법 즉 평면적 글쓰기에서 입체적인 글쓰기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낯설게 하기의 중요성이 제기된다. 문학이나 예술은 습관적인 지각이나 인식이 당연시하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사물들을 더욱 깊이 있게 인식하게 한다고 하였다.
윤재천 교수는 실험수필에 이어, '아포리즘'이란 용어로 '격언(格言), 금언(金言), 잠언(箴言)이 되는 아방가르드의 '수필 아포리즘'문집을 펴내어 새로운 수필문학 방향을 이끌어 가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한 변화를 시도하는 노력의 몸부림이 느껴온다. 수필문학은 언어의 표현예술이다. 언어의 문장표현의 문화는 수 천 년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도 인간의 정서적(情緖的) 지적(志的) 감성은 크게 변화되지 않고 있다. 다만 시대적 문화의 흐름에 편승되어 체험의 표현과 수사적 묘사만이 다를 뿐이다.
결국 좋은 수필이란, 해박한 지식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깊은 사유(思惟)를 담은 통찰력 있는 글이다. 참신한 예술적 함축미의 문장으로 표현한 문격을 높인 글을 독자는 읽고 싶어 한다.
새한국문인 7,8월호 신작 수필을 읽으며 과연 정서적이고 지적이면서 참신한 작품으로 다시 읽고 싶은 글은 몇 편이나 될까.
고재덕님의 <구우일모(九牛一毛) 같은 효성> 은, 국난의 회오리 속에 공비 토벌로 아버지를 잃어 어머니 보살핌으로 중학교를 겨우 마친 후 청소년 시절인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숙모님 밑에서 자랐기에 은혜는 깊고 보답은 얕아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글이다.
숙모님은 조카 삼 남매를 친자식들처럼 키워주셨다. 당시 숙부님은 공무원이었는데 승진하여 서울로 가시면서 광주의 집을 빨리 팔아 서울로 송금하라고 당부하셨다. 여러 복덕방에 집을 내놓고 매일 애타게 기다리던 차 열흘 만에 매수자가 나타났으나 뜻밖에도 고등학교 은사이셨다. 계약금은 받았으나 중도금은 자꾸 미루시었다. 선생님은 재직 증명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다고 귀띔해 드려 손쉽게 대출받아 중도금과 잔금 문제가 해결되었다. 군제대후 학원에 다닐 때 사 개월째 학원비가 밀려 재등록 독촉 전화를 받고 조급한 마음에 숙부님심부름의 조위금으로 학원비를 내고 말았다. 숙모님이 눈치 채시어 다행히 다음날에 조위금을 전달하게 된 추억의 내용이다. 숙모님의 은혜에 정성껏 모시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기껏 명절 때와 생신에 조그마한 치레는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했으니 어찌 숙모님의 큰 사랑에 보답하랴!는 심정을 표현하였다.
인간의 본심이 배어있어 정감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권정순님의 <추억이 깃든 물건>은, 거의 70년이 다 된 재단 가위, 예전 남편이 공부했던 책들, 누가 보아도 제대로 작동할 것 같지 않은 라디오 등이 방 한구석에 놓여 있다. 사실 공간만 차지할 뿐 근래에 들어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물건들에 대한 온고지신을 담은 글이다.
시집올 때 가져온 재단 가위와 라디오는 없는 형편에 친정어머니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고, 남편이 읽던 한자로 된 책은 가끔씩 그가 그리울 때마다 만져보는 물건이다. 누가 보아도 당장 정리해야 할 물건을 보관하는 것이 때로는 사진 한 장보다 더 큰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는 법이라며 물건이 낡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정리한다. 그 물건은 저마다의 사연이 존재한다. 그 사연은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이 깃든 것일 수도 있다. 물건을 끄집어내었을 때 옛 기억이 환기가 되며 웃음 짓기도 하고,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의 기억이 나기에 슬프기도 하단다.
변화를 주는 것이 요즘 세대들인데, 손자는 그래도 할머니가 사준 만년필을 지니고 있는 모습에 성인의 듬직함도 느껴졌다며 내가 간직할 물건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간직할 순간을 선물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라고 한다. 훗날 기억해주는 이가 많다면 나는 행복한 인생을 보냈던 것이 아니던가 라며 끝을 맺었다.
글을 통하여 사물의 의미를 갖게도 하며, 물건의 소중성과 삶의 철학이 스며난다.
김길자님의 <오월의 꽃바람 되어> 는 '최명희 문학관' 을 두어 번 가본 적이 있지만 그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는 문학기행 수필이다.
'혼불' 사람들은 혼불을 본 적은 없지만, 우리 몸속에 누구나 갖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불덩어리로서 모양은 둥글고 빗살 없는 푸른색으로 크기는 종발만하다고 한다.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 나간다고 하니, 혼불이 몸 안에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그것이 빠져 나가면 죽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혼불은 목숨의 불이요, 정신의 불이며, 삶의 불이라며 최명희는 소설은 작가의 육신을 불사른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였다.
문학관 옆 한옥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남자 회원은 양반님네 옷으로 도포와 갓을 쓰고, 나도 한 못 끼어 화려한 옷으로 차려 입고 분단장 곱게 하고 머리에 빨간 장미꽃송이를 달고 거울 앞에 서니 세상에…….
화려하게 수놓은 노랑 치마에 꽃분홍 저고리 은박이 자주 고름까지. 예쁘다. 아! 행복하여라. 가슴에 꽁꽁 숨어 사그라지는 청춘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노래와 춤이 저절로 나온다. 문학이 대체 뭐더냐. 밥이 되더냐, 옷이 되더냐,
인생은 덧없다 하거늘, 작가 최명희도 그렇고, 출중한 가무와 미모로 뭇 남성들의 혼을 뺏은 기생들도 백년을 못 사는 인생이지 않던가. 한 세상 잘났거나 못났거나 어우렁더우렁 살아 보세. 내가 보기에도 지금 입고 있는 기생 옷이 어찌 그렇게 내게 잘 어울리는지. 꼭 춘향어미 월매 같고. 아니, 내 속맘이야 춘향이 같건만……. 오늘 하루, 나는 오월의 바람이 되어 詩 짓고 노래하며 나비같이 춤추고 즐기노라.
문학기행 수필로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하는 세련된 작가의 흥취묘사로 독자의 감성을 이끌어낸 다시 읽고 싶은 수필이다.
김배숙님의 <지금은 회복 중>은 현실 사회의 가장 어렵고 힘든 인간애다운 효심의 체험을 담아낸 글이다.
37년, 공직생활을 마친 남편은 퇴직 후, 살이 찐다며 40년 간 피우던 담배와 술을 끊고 식이요법, 운동으로 자신감 상승에 성격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종갓집 외아들답지 않게 마음이 약한 탓인지, 알츠하이머로 병석에 계시는 부모님 케어하며 직장까지 다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가사 일을 도와주고 있어 고맙고도 미안하다.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하는 남편은 오랜 객지 생활에 자식 노릇 제대로 못 했다며 가족을 몰라볼 정도가 되면 병원에 모시기로 하고 집에서 16년째 모시고 있다.
‘팔자야’가 아니라 ‘내 복’이고, ‘부모님은 병중’이 아니고, ‘지금은 회복 중’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긍정적인 내 성격을 여섯 시누이는 늘 고마워했고, 나를 내려놓으므로 집안은 따스운 바람이 불었지만 사람인지라 가끔은 가슴앓이를 할 때도 있다.
엄마는 94세, 어머님은 89세, 부모님을 40년 전 신혼여행지였던 현충사 나들이를 하였다. 오랜 세월의 역사를 간직한 오백 년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발걸음을 세웠고, 아름드리 노송도 긴 역사를 품고 서 있었다. 가을 햇살에 농익은 빨간 산사나무에는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도 달려있다. 나무는 고목이 될수록 사랑받는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어가니 마음이 아프다고 끝을 맺었다.
효행을 담은 작품으로 노모를 모시는 어려운 심정을 ‘지금은 회복 중’이라는 의미로
내세워 16년을 보살피는 갸륵한 정성이 귀감으로 느끼게 한다. 사족을 함축하고 주제를 살려낸 작품으로 이끌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 학님의 <설날 풍경>은, 내 나이 희수(喜壽)가 되고 보니, 설날인데도 세배 갈 곳도 없고, 나에게 세배를 올 가까운 친척도 없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설날이면 아내는 세배객들 다과상 준비하느라 종일토록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었다. 세배를 받고 세뱃돈을 준다는 게 큰 기쁨이었음의 그때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옛날이 그립다. 옛날 시골에 살 때는 또래들이 많아서 좋았다. 설날이면 서둘러 세배를 마치고 또래들끼리 만나서 놀이 삼매경에 빠졌었다. 딱지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널뛰기, 윷놀이, 등을 하느라 추운 줄도 몰랐었다. 방안놀이나 바깥놀이도 많았었다. 설날이라 집집마다 먹을거리도 많을 때였으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설날 한가히 아내와 영화관에서 『극한직업』이 란 영화를 관람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형사들이 출연한 영화도 코미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1분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터지는 웃음’ ‘웃다가 복근 생길 영화’ ‘최고의 코믹 수사극! 이렇게 웃기는 영화는 없었다.’ 설날 같은 명절날 좋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명절이 가져다 준 보너스다. 라는 수필로 인생노년의 세태를 들려주었다.
박원명화님의 < 이수도에서 추억을 만들다>는 기행 수필이다.
섬은 정이다./ 섬은 맛이다./섬은 멋이다.
어디론가 떠났으면……. 정신없는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면 문득 깨어나고 싶지 않은 깊은 잠 같은 긴 여행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한 번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돌면 신경이 온통 딴 곳에 머문다. 사방이 딱 트인 바다가 눈앞에 보인다. 시방리 선착장의 염풍이 제일먼저 반긴다. 광활한 자유가 나로 하여금 천방지축 철없는 아이로 만든다.
늘 보던 하늘이고, 바람이고, 햇볕인데도 섬이라 그런지 다르게 보인다. 섬에서 만난 나무, 섬에서 만난 들풀, 섬에서 만난 곤충, 섬에서 만난 갈매기, 섬에서의 작은 어촌마을에 이르기까지, 반 고흐의 그림 오베르 마을의 풍경처럼 평화롭고 한가하다. 섬에서만 맛볼 수 있는 2박3일의 자유를 힘껏 껴안는다.
한적한 어촌에서 귀농을 꿈꾸었던 한 사나이가 태풍 매미로 인해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뀐 후, 하나 둘 돌과 벽돌을 쌓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매미성’이 되었다고 한다. 설계 없이 두루뭉실 쌓아올린 게 이토록 멋진 성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뭐랄까, 한때의 화려한 영광이 사라진 뒷모습의 풍경을 닮은 듯하다. 민박집(바다화원) 주인마님의 친절함은 감동을 넘어 친정엄마의 손맛 같은 따뜻한 인정이 넘친다. 그 어떤 명품 음식점과도 비교할 수 없는 미미(美味)이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단백한 맛이라니, 그야말로 궁극의 비경(秘境)이다.
감칠맛 나는 여행의 풍경을 잘 그려내었다. 느닷없이 서두에 섬은 정이다./섬은 맛이다./섬은 멋이다. 연역법적 시적 표현은, 문장의 멋스러움의 이끌림을 시도하려 한듯하지만 썩 어울려진다고는 느껴오지 않았다. 글의 내용상으로 볼 때, 차라리 결론의 끝맺음에다 표현함이 더 문학기행의 함축으로 어울릴 듯싶었다.
박 혜 숙님의 <두둠바리가 건너는 세월의 강>은, 비오는 날 손자 마중을 가다가 길에 넘어져 이로 인하여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현실 체험을 그려낸 글이다.
손자손녀가 다섯이라 할머니라고 부르면 반가워서 넙죽 대답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 같다고 하면 긴장하는 이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머리를 쓸어 넘기려다 올라가지 않는 팔에 통증이 인다. 다친 팔이 말을 걸어온다. 다쳤다고 하니 다들 또 넘어졌느냐. 살 좀 빼면 괜찮을 텐데 두둠바리는 어쩔 수 없어. 다들 내가 문제라며 측은해 한다.
딸들은 울면서 나 때문에 다쳤다고 야단이다. 큰딸은 동생들에게 사과를 하였다. 손자 손녀 둘이나 엄마께 맡겨 힘에 겨워 빗길에 넘어졌다고 그랬다. 둘째딸은 오전에 집에 와서 자기 쉬게 하려고 다섯 중 가장 샘하고 잘 우는 손자를 보는 게 무리였다고 자책한다. 막내는 직구로 사준 신발이 낡았던데 빨리 바꿔드리지 않아 미끄러졌다고 눈물을 흘렸다.
이번 일을 뒷받침하는 우리 애들은 모르는 확실한 논거 하나가 있다. 중학교 때 엄마는 목도장에 가서 화로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강을 건너다 넘어져 사온 질화로를 깨버렸다. 엄마는 야단을 치며 다음 장에 또 깨먹지 말고 이 보자기로 싸서 가져오라고 했다. 다리에 힘을 잔득 주고 양 다리를 벌려 얼음판을 기다시피 200미터 폭의 강을 다 건넜는데 이번에는 묶었던 보자기가 풀리며 또 질화로를 깨먹었다. 그때부터 내 별명은 두둠바리가 되었다. 이렇게 또 한 번 세월의 강을 건너고 멀고도 험한 아리랑 고개를 넘는 두둠바리가 건너야 할 여생이 심히 걱정된다.
이 작품은 오늘의 할머니들의 생활현실로 은근히 독자의 마음을 이끌고 있다. 넘어져 다침으로 안타깝고 두둠바리 별명의 추억이 독자에게 해학을 주고 있다. 주제를 이끄는 문장 함축의 아쉬움을 조금 느꼈다.
이 인 순님의 <활터와 막걸리>는, 새 기관장은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직원들의 체력 단련과 스트레스의 해소를 목적으로 청사 뒤쪽에는‘약식 활터’를 만들게 하고, 희망하는 직원으로는‘궁도회’를 구성하게 했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직원들을 향해 고대사에서 명궁의 민족으로 동북아를 주름잡던 한민족의 후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메달에 빛나는 우리나라의 양궁 선수들을 보라고 했다.
기관장이 궁도회에 열심이다 보니 눈도장이라도 받으려는 듯 직원들이 활터로 몰려들어 모두에게 활을 쏠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사대는 늘리되 1인당 쏠 수 있는 화살의 수는 줄이는 등의 손질이 불가피했다. 궁도에서 술은 활과 같은 우리의 것이 제격이라면서 막걸리만 택했다. 그때마다 회원들의 부담을 줄이려는 뜻에서‘더치 페이’를 주문했으나 회원들이 정성껏 부어 주는 술을 차마 한 잔도 거절하지 못해 술자리 끝의 과음과 만취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지나칠 때가 없지 않았다.
몇 해 전 작고한 그는 그 많던 활도 모두 태워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저승에서도 영원한 활의 후예로 살겠다는 뜻이리라. 역시 우리 것인 막걸리도 그의 묘소를 찾을 때면 한 바가지 정도는 가져와서 그 위에다 부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지난날 활을 쏘면서 행복했던 그 기관의 활터도 사라졌다고 들었다.
공직자로서 궁도를 익히며 과녁을 겨누듯 공무자세의 정신세계를 주제성으로 이끌어 내었더라면 수필의 품격이 살아나지 않았을까?
최인혜님의<부모는 자녀들의 시범조교>는 아버지의 인성교육의 고마움과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들려준 글이다.
나의 아버지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 커다란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자녀교육은 부모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다고 무언으로 실행하신 아버지. 40여 년 전 전북의 지방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을 스크랩하라고 오려주셨던 그 내용을 나는 지금까지도 생활하면서 큰 교훈으로 여기고 있다. 올바른 스승은 올바른 제자를 키우고, 현명한 부모는 현명한 아이를 만든다. 스승을 존경하는 가정에서 교육받은 아이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라는 장(場)에서 보다 훌륭한 것을 배우고 본받는 학생이 될 것이다.
일본의 어느 고등학교 1학년 물리시간이었다. 물리 문제를 풀던 중 선생님은 끝까지 문제를 풀지 못하고 중간에 막히고 말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시던 선생님은 “더 연구하여 다음 시간에 알려주겠다.” 하고 시간을 마쳤다. 이 문제는 나도 풀 수가 없구나. 너희 선생님께서 알려주시겠다고 했으니 선생님께 배워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서재로 들어가셨다. 서재에서 아버지는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한 내용과 편지를 써서 물리선생님께 인편으로 전했다.
가정에서 내 자녀만이 아닌 남을 배려하는 인간교육이 될 때 수능부정시험도 사라지고, 능력에 맞는 학교 선택과 진로 결정을 통해 보다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지금은 부모가 본이 되는 교육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자녀교육에 본을 보여주셨던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을 이 땅의 많은 동료교사와 학부모님들과 함께 새겨보고 싶다. 『교육은 백년대계』 라는 큰 명제 앞에 새로운 각오로 부단히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부모의 자세, 스승의 명제를 담고 있어 마음을 머물다가게 하는 수필이다.
허열웅님의 <노인과 어르신>은 ‘어르신’ 이라고 불러도 부끄러움 없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글이다.
어르신 소리를 들으려면 나이에 대한 예우보다는 존경할만한 이유가 있어야하지 않을 가하는 생각에 잠겨 보았다. 어르신! 참으로 듣기 편하고 좋은 호칭이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들 중 80~90%가 어르신으로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나왔다. 어르신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또는 나이 드신 분을 존경하여 부르는 단어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호칭을 원하는 것일까? ‘어르신과 노인의 차이’를 구별하는 방법을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노인은 자기 생각과 고집을 못 버리고, 상대를 자기 기준에 맞춰 부정적으로 본다. 또 잘난 체하며 지배하려고 든다. 그런가 하면 어르신은 상대에게 이해와 아량을 베풀고, 좋은 덕담을 해주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녔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이 내 생의 절정이며 가장 아름다운 순간임을 인식하고 앞으로 좀 더 많이 참여하고 편견을 버려 어디서나 그 누가 ‘어르신’ 이라고 불러도 부끄러움 없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노인 어르신은 평범한 단어이지만 용어의 의미를 통하여 그 사람의 인품을 은연중에 느끼게 함을 들려주며 어르신다움을 깨닫게 하였다. 수필의 묘미를 담아낸 글이다.
끝을 맺으며
신작수필을 살펴보았다. 발표된 작품들은 작가의 나름대로 특징 있게는 쓴 글이지만 크게 만족할 만한 작품은 많지 않았다. 작품마다 인간의 고뇌하는 삶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사색과 지식이 쌓아진 지혜와 철학으로 좋은 수필을 겨냥하여 보았다. 수필은 인생살이의 다양한 체험에서부터 소재가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감동을 줄만한 작품을 위해 작품마다의 종합적인 평으로 강돈묵, 박양근, 권대근교수의 글을 인용하여본다.
강돈묵교수의 <수필 문장, 이것만이라도 알고 쓰자>에서, 문장은 그 작품에서 요구하는 것에 충실히 응해야 한다. 하나 같이 짧은 문장이 좋다, 긴 문장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긴 문장도 써야 하고, 짧은 문장도 써야 한다. 글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면 그 글에서 요구하는 문장의 길이는 저절로 판명된다.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는 짧은 문장을 선택해야 하고, 지루하고 힘든 시간의 기록일 때에는 긴 문장이 효과적이다. 여하튼 문장은 글의 내용을 독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데에 최선의 것이어야 한다.
박양근교수의 <좋은 수필의 요건>에서, 수필은 팔방미인과 같은 것이다. 얕은 재주를 다양하게 지닌 수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8개의 장점을 갖춘 수필을 말한다. 그것은 압축성, 독창성, 절제성, 체험성, 소통성, 서사성, 그리고 심미성 이다. 달리 말하면 수필에는 4차원이 충족되어야한다.’고 하였다.
권대근교수의 <수필론>에서는, 진정 좋은 수필은 진통과 고뇌 속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수필을 창작함에 있어 필법에 대한 진통과 고뇌는 좋은 수필을 낳는 씨앗이요, 어머니다. 수필은 언어를 부리는 역량에 따라 작문 또는 잡문이 되기도 하고, 작품이 되기도 한다. 작문과 잡문의 수준에서 벗어나 작품의 수준에 든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수필창작론의 필법을 수필 창작시 기법으로서 활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본질론에서는 이렇게 들려준다. 무릇 문학의 정의를 들어보면, 크게 보아 문학이란‘인생을 그리는 글’이지만 달리 협의로서 문학이란 ‘미를 추구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필의 기본이 되는 본질은 첫째 미를 추구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미를 탐구하는 탐미성을 넓게는 예술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필을 쓸 때, 항상 수필은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수필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은 수학 공식처럼 글쓰기 작법은 있으나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다만 진선미를 추구하는 노력만으로 많은 독자가 하나같이 공감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는가. 이런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정진만이 요구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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