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 함 무 성
앞뜰에 안개가 자욱하다. 매미의 계절이 어느새 가고 거미의 계절이 왔나. 정원 이곳저곳에 거미줄이 부옇다. 촘촘하게 올을 짜서 레이스처럼 펼쳐놓았다. 거미들이 지난밤에 나무 사이에 설치미술작품을 만들어 놓았나 보다. 호랑거미와 무당거미들이다.
거미는 곤충이 아니다. 거미에게는 날개도 없고 여덟 개의 긴 다리와 머리는 가슴에 붙은채 통통한 배를 가졌다. 나는 이 괴이한 절지동물에게 호감이 갈 리 없었다. 더구나 덫을 놓아 남을 옭아매는 기분 나쁜 동물이 아니던가.
아침 이슬이 걷힌 후에도 덩치 좋은 무당거미는 제 집 한가운데서 미동도 없다. 시력도 약하고 날개도 없는 거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물을 칠 수 밖에 없겠다. 항문 근처의 방적돌기에서 자아내는 실로 세로줄을 먼저 놓고, 밖에서부터 안쪽으로 빙글빙글 돌아 들어가며 가로줄을 친다.
거미줄은 공학적이다. 자연과학에서 공업생산기술을 연구하려는 데는 거미만한 동물도 없을 것 같다. 설계도 섬세하고, 재질은 가볍고 질기며 끈적인다. 그 끈적임은 가로줄에만 있고 세로줄에는 없다하니, 여덟 개의 다리로 더듬어 세로줄로만 다니는 거미는 제 몸은 절대 줄에 걸리지 않는다. 파리나 나비, 벌들에게만 ‘죽음의 덫’이다.
거미에게 있어 거미줄은 생존을 위한 진지한 사고의 도구이다. 거미줄을 조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정신도 함께 조율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보기에 한낱 미물도 이토록 진지하다.
아침 출근을 서둘렀다. 불경기지만 그래도 사무실을 비울 수는 없다. 홀로 제 영역을 목숨 걸고 지키는 거미처럼 내 영역도 지키자.
어항속의 ‘구피’에게 먹이를 주고 그동안 쌓아 놓은 신문 뭉치와 빈종이 상자 등을 정리하고 폐지를 모으는 ‘연이’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환갑을 훌쩍 넘은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남편을 대신해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리어카를 이용하여 폐지와 고물을 모아 파는 일이다. 산더미 같은 폐지와 고물을 오전에 한 리어카, 오후에 한 리어카를 모아 고물상으로 가면 일만 5000원 남짓 받는다고 했다.
그 돈으로 두부 한모와 라면, 남편의 주전부리로 건빵 한 봉지를 사면 끝이다. 그녀 자신도 당뇨병을 앓고 있으면서 쇠약해진 몸으로 리어카를 잡고 다니면 그녀가 리어카를 끄는 것인지, 리어카가 그녀를 미는 것인지 알 수도 없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팔, 다리도 앙상한 그녀는 율량동, 사천동, 주중동을 거미줄을 늘이듯 온종일 걷는다. 그녀는 얻어 입은 허름한 옷에, 발에 헐거운 운동화를 신고, 뒤로 질끈 동여맨 머리위에는 낡은 야구 모자를 썼다.
나는 그녀를 위해 내 사무실 주변에서 눈에 띄는 폐지를 얼른 주어모아 사무실 구석에 쌓아 놓는다.
그녀의 동선마다 거미줄 같은 삶의 통로가 놓인 듯하다. 나는 그녀에게 ‘천사거미’라고 별명을 붙였다. 아픈 남편은 그녀 삶의 원동력이고, 걷고 또 걷는 일는 그의 몸과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는 도구이다. 그녀는 꿋꿋이 제 삶을 가꾸는 거미를 닮았다.
퇴근해서 바로 아침의 그 거미집을 관찰했다. 몇 마리의 벌들과 당랑권을 자랑하던 사마귀도 거미줄에 돌돌 감겨있다. 무당거미는 망가진 제 집을 입체적으로 줄을 놓으며 부지런히 보수하고 있었다.
나는, 홀로여도 당당한 그 무당거미를 사랑하게 되었다. 거미가 그렇게 하듯 느슨해진 내 인식의 줄도 팽팽히 당겨본다.
실뜨기 / 함 무 성
밤이 되니 제법 서늘하다. 창가의 풀벌레 소리가 마치 연주를 준비하는 오케스트라 현악기의 스트링 같다. 칫 찌르르르. 쯔리이이~. 또르르르릉. 찌르르륵 찌르륵.
수컷들이 짝을 부른다. 여치, 땅강아지, 귀뚜라미, 방울벌레, 베짱이들이 한껏 청아한 소리를 낸다. ‘나를 받아 주오.’ 하는 사랑의 세레나데인가. 얼핏 불협화음 같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소리의 길이와 음높이에서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눈을 감고 들어도 오색의 찬란한 빛이 느껴지며 저절로 명상에 들게 된다. 어느새 가을이 문턱에 와 있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가의 텃밭을 살폈다. 이슬에 흠뻑 젖은 배추밭엔 어린 달팽이들도 붙어있고, 녹색의 배설물이 있는 곳에는 영락없이 연둣빛 배추벌레가 터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폴짝거리며 뛰는 섬서구메뚜기들이 배춧잎마다 구멍을 낸다. 땅 심 돋워서 농약 없이 키운 먹거리인지라 녀석들이 단체로 몰려들었다.
풀벌레를 잡으려고 쪼그려 앉아서 배춧잎을 들여다보았다. 섬서구메뚜기의 어미가 새끼를 등에 업고 있는 것 같다. 짝을 지은 암컷과 수컷이다. 오호라, 등에 올라탄 작은 녀석이 서방이로구나. 녀석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제 종족을 번식시키려고 연한 배추포기에 터 잡고 앉아 밭주인이 보는 줄도 모르고 태연히 서로 꽁지를 붙이고 ‘실뜨기’를 하는 중이다.
‘실뜨기’는 어렸을 적 우리 자매들의 놀이였다. 젖 물려 아기를 재워 놓은 어머니는 우리에게 조용히 놀아야 한다며 실뜨기를 가르쳐 주었다. 동생과 나는 무릎을 맞대고 앉아 굵고 긴 실을 둥글게 매듭지어 실뜨기 놀이를 즐겨 했다. 순서대로 날틀, 쟁반, 젓가락, 베틀, 소눈깔, 절굿공이를 번갈아 만들며 실이 엉킬 때까지 소근 대며 놀았었다. 잠든 아기가 깨지 않도록 숨죽이고 집중해야 하는 놀이이다.
실뜨기를 좋아한 건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은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얼굴이 뽀얗고 눈이 가느스름한 아가씨와 맞선을 보더니 서둘러 장가를 갔다. 새살림을 나기 전에는 우리 집 건넌방에서 함께 살았는데 문 닫고 조용히 지내는 때가 많았다. 그때 어머니는 “삼촌네가 방에서 조용히 실뜨기를 할 때는 함부로 문 열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유년의 시절에는 삼촌 내외가 우리들처럼 정말 실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사춘기를 거치며 어머니가 말한 또 다른 ‘실뜨기’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곤충들의 ‘실뜨기’는 보기에 관능적이다. 등에 업혀 붙은 놈, 긴 꼬리를 말아 둥글게 모양을 만들고 둘이 붙은 채 하늘을 나는 놈, 뒤집어진 채로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단단히 붙어 있는 놈, 나름 형이상학적인 오르가슴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음탕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한살이 과정에서 후손을 남겨야 하는 사명使命이 인간이 추구하는 쾌락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일까.
접사렌즈로 풀벌레들의 모습을 찍었다. 참깨밭에서 사랑을 부르는 노린재는 엉덩이를 훼훼 흔들며 터울거리다가 짝이 정해지면 엉덩이끼리 잇댄다. 머리는 서로 반대편을 향한 채 미동도 없다. 미세한 움직임으로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동안에는 사람의 인기척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사마귀의 사랑 방식은 독특하다. 수컷이 암컷의 등 위에 올라타고 사랑을 나눈 후 암컷이 수컷을 대가리부터 바수어 먹는다. 몸을 섞어 붙인 채 암컷에게 순순히 몸을 내주는 수사마귀는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지아비로서의 희생으로 만족할까.
남자들은 암사마귀를, ‘제 서방 잡아먹는 독한 년’이라고 욕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수컷 왕사마귀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밤이 늦도록 술잔을 부딪친다.
독한 암사마귀는 짝짓기와 동시에 이미 여자가 아니고 어미이기 때문이리라. 자연의 섭리는 오묘하고 경이롭다. 후손을 위해 넉넉히 양분을 섭취한 암컷은 몇 주 지나 돌 틈과 나무뿌리 사이에 알을 낳은 후 훌쭉해진 배와 기진한 팔과 다리를 숲에 내려놓는다. 먼저 보낸 수컷을 따라가려는 듯 기꺼이 생을 마친다. 숭고한 그들의 사랑 방식을 풀잎과 들꽃들은 알 것이다.
배추 포기마다 짝지은 섬서구메뚜기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난다. 지난해 겨울, 앞산 고라니의 실뜨기를 눈치챈 밤에 남편과 나누었던 그 일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흰 눈이 사르륵거리는 밤에 고라니가 ‘쿠왝 쿠왜액!’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렀다. 수고라니가 암컷을 부르는 소리이다. 그 소리를 듣고 성숙한 암컷이 찾아오면 고라니 부부는 그때부터 은밀한 실뜨기에 들어간다. 새 봄에 태어날 새끼를 위해 수컷이 만든 보금자리에 신방을 차린 것이다. 짐승이나 곤충들의 실뜨기는 몇 시간, 혹은 며칠씩도 이어진다 하니 그들의 그 순간은 절실하고도 진지할 것이다.
짝을 정한 고라니가 실뜨기를 시작한 듯 숲이 조용해졌을 때쯤에 남편이 슬그머니 나를 흔들어 깨운다. 숲속마을에서 자연과 친구 되어 살자고 한 남편은 신방 차린 고라니들이 부러웠나 보다. 우리도 실뜨기를 하잔다.
눈 내리는 겨울밤은 깊고 길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우리는 숨죽이며 실뜨기를 했다. 조용히 날틀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쟁반도 만들어 보고, 젓가락과 절굿공이도 만들어 본다.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며 한 쌍의 겨울 고라니가 되었다.
숭숭 구멍난 배춧잎을 본다. 많이 먹어 두어야 할 섬서구메뚜기들의 삶이 절정에 이르렀다. 제 몸집의 열 배는 됨직한 암컷의 등 위에 작은 수컷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수컷은 옆으로 살짝 허리를 비틀어 암컷의 날개 밑으로 꽁지를 붙였다. 심지를 암컷에게 깊게 넣은 채 아무리 암컷이 폴짝이며 뛰어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수컷의 모습은 작지만 당차 보였고, 길쭉한 주둥이를 내밀은 암컷은 풍만하며 수줍어 보였다.
점점 날씨가 추워진다. 고단했던 한 생을 마치게 될 섬서구메뚜기들은 땅속에 알을 묻고 이제 곧 시들어 가는 풀숲에 몸을 누일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들의 실뜨기는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풀벌레 잡는 일은 그만 두어야겠다. 배춧잎이 몇 닢 결딴난들 어떠랴. 풀벌레들의 향연을 축복하며 곧 끝나게 될 그들의 마지막 생生을 기다려 주자.
아침 공기가 싸늘하다. 배추밭 고랑에서 섬서구메뚜기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히 일어선다. 미물들의 삶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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