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소리 풍경 / 허 정 진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4. 4. 13. 01:38

본문

                                                      소리 풍경 / 허 정 진

 

깊은 산속 농막에서 몇 년간 지내본 적 있었다.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여 전망은 그지없이 좋았지만 이웃도, TV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사계절 내내 오직 자연의 소리밖에 없었다. 숲속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 바람이 여울져 휘감는 소리, 겨울 나뭇가지 뚝뚝 부러지는 소리, 지둥 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산장 주위를 배회하는 산짐승 소리, 멀리서 풀국새 울고 장꿩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까지 들렸다. 더 마음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그들만의 낮은 주파수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꽃이 피고 지는 소리, 해토머리 나무줄기에 물오르는 소리, 겨울밤 함박눈 내리는 소리 같은 것들. 그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고요와 여유 덕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도시 소리가 그립고 궁금하기도 했다. 혼잡한 도심이 뱉어내는 차량 소음과 왁자지껄한 군중들 외침, 그 흔한 배달 오토바이 굉음이라도 떠올리면 내가 살던 동네 길목과 도심의 즐빗이 늘어선 빌딩들이 생각났다. 도시든 시골이든, 너든 나든 소리는 저마다의 풍경을 각자의 가슴 속에 끌어안고 산다. 지금도 예전 산장 생활을 되돌아보면 산과 바람과 소낙비와 풀벌레가 만들어 준 소리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사람들은 착하고 따뜻한 소리를 좋아한다. 자극적이지 않고 마음을 편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소리다. 자연이 주는 소리가 그렇고, 첼로나 팬플루트 같은 영혼을 담은 악기 소리가 그렇다. 아이 울음소리, 글 읽는 소리, 다듬이 소리의 삼희성(三喜聲)도 그렇고, 어린 강아지들이 어울려 마당에서 신나게 가댁질하며 뛰어노는 소리도 사랑스럽고 평화스러운 풍경이다.

소리는 소리로서 끝나지 않는다. 소리를 듣고 풍경이 그려지는, 물 흐르는 소리가 단순한 ‘물소리’가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청량감이 느껴지는 가치 현상이 일어난다. 자연이나 일상의 소리 환경을 조경학에서는 음향 경관 또는 소리풍경이라고 한다. 소리풍경은 실제로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뿐만 아니라 주관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심상, 기억 속 소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소리가 시공간을 넘나들어 과거의 경험, 배경, 사연, 인연, 흔적들을 소환하고 추억을 채굴한다.

옛사람들이 집에서 명승고적의 그림을 보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와유(臥遊)가 가능한 것도 그 이유다. 누군가 감옥에서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만 듣고도 계절이 오가는 것을 알았다는 것도, 오랜만에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도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이 먼저 와닿는 것도 기억 속에 풍경의 틀을 촘촘히 쌓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악보의 소리풍경이 있어 상상력만으로 그 유명한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소리에 예민한 날도 있다. 마음이 허할 때나 외로움의 그림자가 스며있을 때는 사물들의 곡성마저 들려온다. 형광등으로 전류가 물 흐르듯 빨려 들어가고, 화장실 샤워기에서 수돗물이 뚝뚝 떨어지고, 방문 틈새에서는 밤새 삐거덕거리는 기척이 들려오며 불안과 초조를 한껏 부채질한다. 카메라 줌인하듯 소리에도 원근법이 있는지 신경을 집중할수록 상상으로 만든 풍경은 자꾸 부풀려지곤 한다.

세상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태초에 세상의 모든 생명과 물상은 고유의 소리를 갖고 태어난다. 소리가 곧 존재의 증명이고, 그것이 이미지화되어 서로 간에 인지와 판단의 기능을 한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무성영화처럼, 음향도 없는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무의미한 일이다. TV보다 라디오나 음악처럼 소리로만 만들어 내는 정경이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천둥과 바람도 형상은 없지만 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귀가 나빠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일찌감치 난청 증세가 있어 남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애면글면 귀청에 매달린다. 낮거나 또렷하지 않은 목소리, 질감 나쁜 마이크 소리는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한다. 방법은 없다. 절반은 소리로, 절반은 풍경으로 전체 내용을 직감하고 판단한다. 이러다 언젠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면 그나마 풍경마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쉬운 마음이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난청이나 소음 탓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칭찬하는 소리만큼 듣기 좋은 소리도 없다는 말도 있다. 믿고 싶은 말만 믿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확정 편향이거나, 편하고 손해 보지 않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남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떠드느라 주위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마음으로 듣는 소리에 풍경도 따라온다. 초저녁잠에 빠진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한낮 땀 흘리며 일했던 노동 현장이 떠오르고, 아내의 가만한 한숨 소리를 듣고 친구 앞에서 가난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했던 쓸쓸한 발걸음이 그려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 하더라도 듣는 이의 여유나 감성, 공감대가 없을 때는 풍경이 따라오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포용하는 배려심과 겸손함이 부족해 추억 속에 좋은 풍경을 많이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시인은 나이가 들고서야, 힘이 빠지고서야, 이별을 경험하고서야 겸손한 귀를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귀뚜라미 소리가 선명해지고, 달이 뜬 것처럼 소리의 모양이 둥글어지고, 창밖 풍경을 듣는 귀의 자세가 순해졌다고 한다. 내 말을 덜어내고, 내 목소리를 낮추는 마음이 있어야겠다. 앞서려고만 말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비록 귀로 듣는 소리는 자꾸 닫혀 가지만 대신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 목소리만 들어도 평화로운 초록 들판의 풍경이 떠오르는, 누구에겐가 반갑고 보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듣는 소리가 좋으면, 듣는 마음이 겸허해지면 나의 소리풍경도 더 여낙낙하고 풍성해지지 않을까 싶다.

 

                                      두부 한 모 앞에 두고 / 허정진

 

밤새 불린 흰콩을 맷돌로 곱게 갈아낸다. 어처구니를 힘들이지 않고 다루는 여유가 삶의 근력처럼 믿음직스럽다. 가마솥에서 천천히 끓여가며 알갱이가 몽글몽글해지면 베자루로 비지를 걸러내고, 뽀얀 콩물에 간수를 살짝 뿌려 서서히 순두부를 만든다. 그 덩어리를 틀에 넣어 누름돌로 눌러주면 물이 빠지고 두부가 완성된다. ‘두부 만드는 일은 게으른 며느리에게 맡겨라.’는 말처럼 오랜 과정을 꾹 참고 지켜보며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곧 장인정신이다.

오일시장 귀퉁이에 오래된 두붓집을 들렀다가 두부 한 모를 사 왔다. 속이 꽉 찬 것 같은 하얀 속살이 자기 생의 이력서 인양 오지고 탱탱하다. 뭘 해 먹을까? 된장찌개에 숭덩숭덩 잘라 넣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그냥 부침이나 해서 먹을까 망설여진다. 그러고 보니 두부로 할 수 있는 음식이 무척 다양한 것 같다. 두부전, 두부탕, 두부보쌈, 두부조림, 두부전골, 두부샐러드 등등.

부드럽고 촉촉하며 고소하다. 무미하고 덤덤해서, 담백하다는 말이 원래 두부 맛이었던가 싶다. 두부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만 특별한 색깔도 냄새도 없는 두부는 다른 재료들과 원만하게 조화를 잘 이룬다. 방아깨비나 고수처럼 자기만의 특이한 맛과 향을 고집하지도 않고, 파프리카나 홍당무처럼 강렬한 원색으로 자기주장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천성이 순하고 수더분해서 매사에 순응하고 순종한다. 뼈가 없어 칼도 덩달아 부드러워지고, 갖가지 모양내기도 요리사의 마음에 달렸다. 무슨 요리를 하든, 어떻게 살점을 베고 떼어내든 이래도 “응”, 저래도 “응”하는 목낭청이 따로 없다. 오상아(吾喪我)며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눈에 보이는 뼈는 없어도 ‘자아’라는 내공이 단단히 들어앉아 어떤 칼날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에 모서리는 존재하지만 젤리처럼 말랑말랑하다. 겉으로 보기에 단호하고 날카로울 뿐 모서리가 있어도 모나지 않아 한 번도 누군가를 다치게 한 적이 없다. 취급하기 좋으라고 벽돌처럼 네모지게 만들었지만 누군가 원한다면 동그랗게, 붕어빵 모양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영혼과 본성이지 겉모습이나 형태가 진정한 실체가 아니라는 모양이다.

나를 지탱하기에 내 무게, 내 부피면 족하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최적의 조화로움 그 자체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위에도, 아래에도 함부로 위치하려 하지 않는다. 내 존재의 밀도가 지나쳐 남이 무너지거나, 남으로 인해 내가 손상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지키며 제 삶에 충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렁물렁하고 내구력이 약한 것을 일컫는 관용어로 ‘두부살’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는 자식들이 하나같이 두부처럼 물러터졌다고 아버지가 안타까워하신 적도 있었다. 어디 가서도 손해 보지 않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차돌 같은 아들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물컹하게 살까 봐 두부 안 먹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때는 교도소 출소자가 받아 드는 첫 먹거리로 생두부를 사용했다. 단백질을 보충한다는 뜻도, 흰 두부처럼 깨끗이 속죄한다는 이미지도 있었다고 한다. 박완서 작가의 수필 <두부>에서의 답이 그럴듯하다. “징역살이를 속된 말로 ‘콩밥 먹는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출옥한 이에게 두부를 먹이는 까닭을 알 것도 같다. 두부는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이나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두부는 다시는 옥살이하지 말란 당부나 염원쯤으로 되지 않을까.”

아무런 독도, 날카로움도 없어 목구멍 너머로 넘기기에 편하다. 단백질이 필요한 승려나 채식주의자의 식물성 치즈이고, 조상님들을 목숨처럼 받드는 조선시대 제사상의 중요한 제수(祭需) 중 하나였다. 고려말 이색의 <목은집(牧隱集)>에 이 없는 늙은이가 먹기 좋은 음식이고, 먹을 것 많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열량 낮은 다이어트 식품이기도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최선과 최적만 골라 으깨어 논 듯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함이다.

형체는 없어져도 콩이 가진 본성은 잃지 않는다. 불가마 속 항아리가 뜨거움을 견뎌 존재를 드러내듯 콩이라는 형상에서 탈피하여 전혀 다른 물상으로 변한 것이 두부다. 자신을 희생하고서도 주연이든 조연이든 탓하지 않고 부드럽게 서로 어우러져 하나 되는 법을 일깨워 준다. 주변의 김치든 된장이든 끓일수록 그 속에 스며드는 두부는 세상에 융화와 통섭을 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한다.

세상을 당당하게도, 부드럽게도 살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들이 신발 속 모래알처럼 불편하고 버석거렸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감정을 겹겹이 껍질 속으로 감추려고만 들었고, 조그만 충돌이나 불화에도 배반감을 느끼며 담을 쌓기 일쑤였다. 채워졌다가 비워지는 일들에 익숙하지 못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어주지도, 나를 죽여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지도 못했다. 두부로의 변모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줏대 있는 콩이나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만 충실한 자존감이 문제였다.

두부 한 모가 누구에게는 보잘것없는 재료일지라도 또 누구에게는 한 끼의 식사이고 한 때의 목숨이 될 수도 있다. 부재료든 주재료든, 간단하든 공든 요리든 간에 허한 뱃속을 채우기에 그만한 음식도 없다. 빈약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고, 낯설거나 까다롭지도 않은 친숙한 음식이다. 계절도, 유행도 없이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나 좋아하는 고향 같고, 어머니 같은 음식이다.

그나저나 저 두부 한 모로 뭘 해 먹을까?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그냥 끓는 물에 두부를 통째로 삶아 묵은김치에 막걸리 안주를 하기로 했다. 뭐로 해 먹든 간에 두부처럼 순하고, 이물 없고, 낮은 자세로, 겸손한 삶을 이참에 좀 깨닫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