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추 / 권 상 연
재약산 7부 능선, 암석 조각이 산허리에 쌓였다. 부채모양으로 봉긋하게 솟은 것이 무덤을 닮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크고 단단한 바위가 자리를 잡았다. 산꼭대기에 있던 암석이 중력의 힘을 받아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바위틈에 스며든 물이 얼면 송곳처럼 뾰족해진다. 늘어난 부피와 압력을 감당하지 못한 바위는 금이 가고 깨지면서 부스러진다. 그렇게 부서진 물질은 지하에 얼어있는 땅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지형을 만드는데, 평지에 쌓인 것을 암괴원, 급경사에 쌓여있는 것을 ‘애추崖錐’라고 한다. 너덜겅 혹은 돌서렁이라고도 부른다.
오빠가 왔다. 한 손에는 ‘검은콩 우유’ 한 박스 들려 있다. 담담한 시선이 방안을 훑다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어머니 몸에서 멈춘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목덜미를 따라 자잘하게 돋아난 검은 점처럼 보이는 사마귀, 영락없는 우리 식구다. 구부정한 등과 한쪽으로 기운 어깨를 보니 가슴에서 시린 바람이 인다.
아버지가 실명하자 우리 가족의 삶도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지만, 밀린 병원비를 정산하고 나니 남은 것이 없었다. 오빠는 공부를 잘하여 집안의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며 치켜세우던 친척들도 아버지가 집안에 들어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등을 돌렸다.
애추 앞에선 누구나 긴장한다. 급히 스틱을 접어 가방에 넣고는 두 손으로 바위를 짚는다. 위로 오를수록 날카로운 바위가 나타났다.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게 뻔하다. 행여라도 발에 챈 돌이 굴러떨어질까 봐 조심조심 발을 디딘다. 뒤따라 오는 이에게도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평평하고 단단한 부분만을 골라 느릿느릿 기어간다.
오빠는 인색한 사람으로 굳어졌다. 돈을 모으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천 원짜리 한 장도 허투루 못 쓰게 했다. 전기요금뿐만 아니라 전화 요금 구간에도 예민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전화하라는 문자가 먼저 도착했다. 문자는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눈먼 아버지와 생활고로 시달리는 어머니, 나이 어린 동생들은 오빠를 짓눌렀다. 포개고 포개어 쉴 틈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우리가 아무리 두드려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덮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그 아래에도 구멍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오빠는 저 홀로 서 있는 큰 바위가 되었다.
애추는 한 덩어리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아래위로 포개져 숨구멍을 낸 암석 조각이 있는가 하면 저 혼자 외떨어져 비탈길 옆에 박힌 큰 바위도 있다. 나는 큰 바위 옆에 잠시 멈춰 섰다. 묵직한 틈을 비집고 들어선 참나무 옆에 배낭을 푼 후, 희끄무레한 바위를 등지고 앉아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시야가 트인 탓일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꼭대기는 아직 멀었는데 다 왔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냉한 기운이 슬며시 다가왔다. 한순간에 힘을 실은 냉기가 아니었다. 등줄기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스쳐왔다. 신기하여 뒤돌아보니 바위 사이에서 차가운 바람을 뿜어내고 있다. 얼음골이었다.
바위틈으로 들어간 공기는 차가워지면서 더 깊이 내려간다. 이때 아래층에 있는 습한 공기가 바깥으로 밀려 나오게 되는데,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와 만나면서 습기가 증발한다. 밖으로 시원한 바람을 내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터울이 적은 나와 동생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쉴 틈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밥하고 빨래는 나와 동생이 도맡아 했고, 그 아래 동생들은 아버지의 잔심부름을 했다. 각자의 시간을 쪼개고 포개어 추울 때는 온기를, 더울 때는 냉기를 섞어 서로를 보듬었다.
여수로 내려간 오빠가 대기업에 취직하고 살림을 꾸렸다. 억대의 연봉을 받는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지만, 여전히 인색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막내의 소망을 단칼에 잘랐다. 오빠의 결정에 반발이라도 하듯 나와 동생은 새벽마다 신문을 돌렸고 주말에도 식당 허드렛일을 하면서 입학금을 마련했다. 그 힘을 받아 악착같이 공부했는지 막내는 혼자 힘으로 학업을 잘 이어나갔다.
산을 오르다 보면 지칠 때가 있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조급해지면 더 빨리 지친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길을 나선다. 평범한 야산에서도 그럴진대, 애추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외떨어진 바위는 굴러가지를 않았기 때문에 모난 바위가 되었다. 오랜 시간 눈과 비를 맞고 바람과 얽혀 지내다 보면 두루뭉술하게 변해 간다. 기개가 꺾이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에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러다 떠도는 풀씨 하나를 만나게 되면 소박한 꽃 한 송이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올케가 혈액투석을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얼마나 큰 비용과 시간이 드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했던 나는 오빠를 위로할 줄 몰랐다. 날마다 구급차를 불렀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능력 있는 오빠니까 알아서 잘 해결하겠거니 여겼다. 어린 자식 둘을 거느리며 병든 아내를 병간호하느라 모가 갈리고 흙이 되어간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다.
오빠가 가족 대화방을 열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전해오는 안부를 묻는 인사말에 아무도 답글을 달지 않았다. 수년이 이어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을 조금씩 다르게 볼 줄 아는 혜안을 갖는다는 말인 것 같다. 올해는 내가 먼저 안부를 물었다. 담담하게 툭 던진 한마디가 오빠의 가슴에 닿았나 보다.
올해 오빠가 정년퇴직했다. 대기업의 이름을 뗀 오빠는 평범했다. 엄마의 손을 잡느라 바짝 다가앉는 모습에서 예전의 날카로운 모를 찾기는 어렵다. 숙련된 기술이 있어 재취업에 성공했다고 어머니께 자랑한다. 신장 이식에 성공하여 올케도 일상생활에 지장 없다며 미소도 짓는다.
좀 더 아래로 시선을 돌려본다. 이제 막 돋아난 굴참나무 새잎이 바위에 닿을락 말락 한다. 바람이 인다. 희끄무레한 색으로 일관하던 바위가 햇살을 받아 연둣빛으로 일렁일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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