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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수필문학상 / 이 효 순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4. 1. 2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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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곡(石斛)의 은은한 향기 속에 / 이 효 순

 

동쪽으로 향한 하얀 창(窓) 안으로 겨울 햇살이 곱게 드리운다. 가까이 다가가니 석곡의 은은한 향기가 스친다. 오래전에 한 자모님이 작은 석곡 네 촉을 파란 화분에 심어 선물로 주셨다. 나는 그것을 10여 년 가까이 키우면서 이젠 그들과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정으로 세월을 엮어가고 있다.

처음에 석곡이란 이름을 접하면서, 꽃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감을 받았다. 그 향기와 가련한 꽃의 고운 자태에 비해 너무 이름이 투박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이 시작되면 밖에 내어놓았던 석곡을 실내로 들여놓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햇빛, 바람, 비를 맞으며 나름대로 강인하고 건강하게 자란 그들을 거실로 들여놓는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아파트 같으면 베란다가 적절하지만, 주택인 관계로 적당하게 둘 장소가 없어 항상 동쪽 아침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 실외에서 들여놓을 때 잎이진 줄기마다 꽃눈을 달고 꽃이 피기까지를 기다리는 그들을 보면 마음이 막 설레어 온다.

석곡은 잎이 지고 나면 멀뚱하고 밋밋한 줄기만 남는다. 정말 볼품없는 모습으로 그렇게 겨울을 보낸다.

어느 날 외출하였다가 돌아와 보니 촘촘히 달았던 꽃대들이 다 떨어지고 주 당 한 송이씩만 간신히 살아남아 있었다. 그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석곡을 보는 순간 느닷없이 은은한 향기와 고고한 자태를 펼칠 사이도 없이 자신의 삶을 접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련하였다.

내가 석곡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서울 어느 연수원이었다. 겨울이었는데 잎도 하나도 없는 줄기에 하얀 꽃이 한 송이 피어 그 은은한 향기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밖은 하얀 눈이 내리고 싸늘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곳 실내 창가엔 흰 꽃 한 송이가 고고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내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 후, 사십 대 후반에 들어서며 가정생활도 거의 안정이 되고,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던 석곡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석곡은 꽃이 지고 나면 꽃이 진 줄기 아래에서 신아가 생겨난다. 새 생명이 생기는 것이다. 잎이 다지고 꽃이 진 그곳에서 돋아난 새 촉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비바람, 햇빛을 받으며 줄기는 굵어지고 싱싱해져 기온이 싸늘해진 늦가을부터 꽃눈을 만든다.

나는 꽃눈이 생기기 시작하면 꽃 필 때를 기다리며 인생을 되돌아본다. 자연의 섭리는 주어진 법칙에 따라 계절과 순응해 가며 자신의 삶을 엮어간다. 식물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인생의 여정과 같이 자라고, 꽃을 피우며, 향기를 발하고 새 촉을 만들어 가족들을 늘인다.

나는 석곡을 닮고 싶다. 언제나 묵묵한 모습으로, 넉넉하고 아름답게 진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를 나누어주면서 조용하게 지내야겠다. 외로워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산골 도랑물 같은 맑음을 지니며 살았으면 한다. 세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남은 인생을 석곡처럼 보내야 하겠다.

석곡의 꽃이 피기 시작하면 새로운 나날은 시작된다. 꽃이 필 때마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은 흐른다. 서글퍼 눈물 흘리던 시절, 기쁨에 가슴 벅차 마음 설레던 날들, 그 속에 석곡의 향기를 묻히며 주어진 외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여정이다.

올해도 석곡은 잎이진 줄기 아래 새 촉을 만들어 새봄을 맞이하고 있다. 한해의 삶을 빈틈없이 준비하고 마련하는 식물의 모습에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고통을 견디어 내며 미래를 준비하는 그들. 하지만 자연의 질서에 어김없이 순응하며 주어진 길을 가는 석곡을 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연분홍빛 뇌산, 연노랑의 황환, 키가 작은 만월, 자줏빛의 자금성….

말없이 그러나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차분하게 연출해 가는 석곡들처럼 내 인생길 주어진 여정을 걸어가야겠다.

한 송이 가련하게 핀 석곡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토끼풀 화관 / 이 효 순

 

피아노 의자 위엔 토끼풀꽃으로 만든 화관이 놓여있다. 참 오랜만에 만든 풀꽃 화관이다. 그곳에 눈길이 머문다. 아직도 내겐 정겨운 여린 감정이 깃든 곳이 있음을 본다. 시간이 많은 계단을 쌓았지만, 유년의 시간은 마음 한 곳에서 아직까지 작은 숨을 쉬고 있다.

남편은 화관을 바라보며 시간이 많이 있었냐고 말한다. 내가 할 일이 없이 무료해서 그 화관을 만든 거로 생각했나? 그렇게 내겐 들렸다. 남편이 내 마음을 읽을 수가 없지. 어찌 내 감성까지 읽을 수 있을까? 나의 내면이 담긴 것을 …그 말에 눈물이 핑 돈다.

날마다 가는 산책로에는 토끼풀꽃이 많이 핀다. 지날 때마다 네잎클로버가 혹시 없을까 해서 한 번씩 더 바라보다 지나친다. 오늘은 산책로에 있는 철쭉과 잡초 이발하는 날인지 작업복 차림의 인부들이 여러 명 웅성거린다. 그 옆에 날렵하게 생긴 예초기가 여러 대 보인다. 그들은 철쭉과 잔디를 차례대로 깎는다. 잘려 나가는 풀과 나무들이 안쓰럽다.

산책로 옆의 공간에는 토끼풀꽃이 많이 피어있다. 제법 반그늘에서 키가 많이 자랐다. 예초기로 자르기 전에 풀꽃을 뜯기 시작했다. 잘려 나갈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반대쪽에서 풀 깎는 소리를 뒤로하고 꽃 핀 대궁을 길게 뜯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잘려 나갈 것이기에 빠른 손놀림으로 뽑았다. 며칠 전부터 그 토끼풀꽃에 눈길이 자주 멎었다. 마음에 담긴 토끼풀 화관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토끼풀꽃이 무리 지어 있는 곳을 보면 꼭 그런 마음이 들었다. 참 오랜만에 마음에 품었던 것을 오늘은 실제로 하게 되었다.

갑자기 미국에 사는 손녀딸이 생각났다. 이곳에 살면 이런 풀밭에 와서 함께 화관을 만들 수도 있을 텐데. 그런 마음으로 토끼풀꽃을 열심히 뽑았다. 옆 잔디밭엔 예초기 돌리는 소리가 더 요란해서 귀에 거슬렸다.

귀가해서 우리 집 작은 마당 꽃 작업장에 앉아 뜯어온 토끼풀꽃을 길이별로 나란히 놓았다. 참 오랜만에 만들어 보는 화관이다. 산책할 때마다 한번 만들어 보고 싶던 화관이다. 나는 남자아이만 셋을 키웠기에 그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만들어 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모처럼 마음 한곳에 두었던 손녀들을 생각하며 만들게 되었다. 마음마저 설렌다.

토끼풀꽃 두 개씩을 차례로 엮어갔다, 30분 남짓해서 둥근 화관이 완성됐다. 먼저 남편에게 씌워 주었다. 마다하지 않고 내 하는 대로 좀은 쑥스러운 모습으로 포즈를 취했다. 남편을 찍어주고 나도 머리에 화관을 썼다. 현관 입구 단풍나무 앞에서 내 모습을 촬영했다.

토끼풀꽃 작은 화관을 만드는 동안 내 유년으로 돌아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을 데리고 풀밭에서 화관도 함께 만드시고 꽃시계도 만드는 낭만적인 선생님이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작은 기억들이 잊히질 않는가 보다. 선생님께서 만든 화관을 머리에 씌워 주시던 기억이 아직도 아련히 내 마음에 남아있다.

손녀딸들을 가끔 한 번씩 영상으로 만난다. 하지만 늘 1%가 부족하다. 그 채워지지 않는 작은 정은 공간을 초월한 내 마음을 파고든다. 나 혼자 짝사랑하는 것도 안다. 그러면서 자꾸 그리워한다. 손녀들은 나처럼 이렇게 애틋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드나 보다. 하긴 고희가 넘었으니 많기도 많다. 언제 그렇게 잡히지 않는 세월을 많이 보냈는지. 끈으로 묶어도 묶이지 않는 시간을….

온유와 소명이가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특별한 것이 없다. 직장생활로 제대로 한번 함께 놀아주지 못했다. 제 엄마가 집에 함께 있으니, 내게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언젠가 제 엄마가 건강검진 가는 날 우리 집에 맡긴 적이 있다. 그때는 주말이어서 나도 집에 있게 됐다. 두 손녀기 옥상에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불편한 다리를 간신히 옮겨 옥상으로 갔다. 올라가서 물뿌리개로 바위솔에 물을 함께 주었던 던 일, 그것이 사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무엇 하나 뚜렷하게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며 정들었던 많은 것들을 잊을 수가 없다. 내일은 사진 촬영한 것을 명성이에게 보내 손녀들에게 보여 주라고 해야겠다.

그 아이들이야 어찌 되었든 보고 싶은 그 마음을 만든 화관을 보며 전하고 싶다. 피붙이가 무엇인지. 작은 것 하나가 마음을 건드리기도 하니 말이다. 토끼풀꽃 화관을 코로 가까이 대어 본다. 풀꽃의 은은한 냄새가 스민다. 손녀딸 온유와 소명이의 웃음처럼 맑은 향기 속에 내 마음을 담는다. 현관 옆 주목 아래 맥문동 푸른 풀밭에 토기풀 화관을 놓는다. 스마트폰을 누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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