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등의 방정식 / 현경미
꿈결인가. 등이 따뜻하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내 등에 맞닿은 그의 등이 느껴진다. 침대 위아래에서 잠이 들었건만 등과 등 사이 바람 한 톨 비집고 들 틈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인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도, 등을 돌리고도 편안하게 각자의 잠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치 우리만의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신혼의 단꿈을 꾸던 때였다. 서로의 앞만 바라보느라 등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등이 있어도 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조금씩 거리가 느껴졌다고 할까. 등과 등 사이 거리가 마치 그와 나, 마음과 마음의 거리라도 되는 양 서운함이 밀려들고 불안이 끼어들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꿈을 꿔야 한다는 생각이 문제의 근원이었을까.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능한 한 빨리 해답을 도출해야 한다는 성급함이 우리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무모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해내려고 덤볐으니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진리는 굳이 증명하려 들지 않아도 시간이 갈수록 명확해져만 갔다. 이걸 해도 저걸 해도 딱 맞아떨어지기보다는 번번이 우리는 어긋나기 일쑤였다.
키 높이가 달라도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그저 서로의 눈높이에 맞춰주기만을 고집하는 나날이었다. 서로의 등을 토닥거려주기는커녕 서로에게서 등을 떠밀어내는 날이 더 많아져 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등을 돌렸다. 더러는 서로 보이지 않는 곳을 탐하기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등이 보일세라 아예 문을 잠그고 마음을 꺼버린 채 잠이 들었다.
말 한마디에 등골이 오싹해지는가 하면 행동 하나에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로의 말과 행동에 지나치리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렇게 그와 나의 등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좀 더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와 나는 등을 굽힐 생각은 하지 않고 언제나 뻣뻣하게 서서 먼저 다가와 굽신거려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좀 더 부드러운 내가 되어주기를, 나는 한없이 너그러운 그가 되어주기를 서로 바라고 바랐다.
우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끌어안고 애꿎은 등만 못살게 굴었다. 등을 돌렸다, 뻣뻣해졌다, 밀치기를 반복했다. 더 나은 방향이 있다는 것도 접점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동갑내기인 우리는 한 치 양보도 없는 시간을 보내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등이 휘었다. 툭, 하고 언제 끊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팽팽한 고무줄 같았다. 끊어지는 순간, 되돌아 돌진해온 줄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마저도 잊은 채 각자의 자존심만을 위해 버티고 버텼다.
달라도 너무 다른 그와 나. 시간이 더해져 갈수록, 하나에서 열까지, 생각도 생각의 방식도 다 달랐다.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때는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달라서 부딪칠 때마다 서로 맞다, 틀리다 우길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등과 나의 등 사이에는 정비례도 반비례도 아닌 그래프가 생겼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모양이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내리꽂혀 버둥거릴 때면 어처구니없다가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며칠 전 둘레길에서였다. 다리도 등도 둥글게 휘어진 노부부를 만났다. 손과 손을 꼭 잡은 채 서로 나란히 서서 걷고 있었다. 더뎌 보였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등과 등이 나란히 서서, 서로 의지하며, 한 곳을 향해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저 힘은 무엇일까. 저들에겐 있는데 우리에게 없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등도 다리도 둥글어지는 동안 각자에게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기에 가능했을까. 꼿꼿하던 것들이 둥글어지자면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걸까. 어떤 해답이 있을 것만 같았기에 물음에 물음을 더하며 노부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등이 둥글어질 만큼도 아니고, 펄펄 뛰어오를 만큼 힘찬 나이는 더더욱 아닌 우리다. 그렇다 할지라도 간혹 등이 뻐근하고 통증이 일기도 한다. 이만큼이라도 욱신욱신 살아내고 보니 누구의 등이라도 안쓰럽다. 공치기에서 힘을 빼는 것에만 걸리는 시간이 십 년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어지간히 힘이 빠졌을 법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팽팽하기만 하던 것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는 것 같다. 절반쯤은 포기요. 나머지는 서로 다름을 인정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걸 터득한 것일 테다.
어느 사이엔가 달라진 풍경이다. 예전과는 달리 등의 높낮이가 달라도, 등을 돌려도, 아예 등이 보이지 않아도 불안할 것도 서운할 일도 아닌 요즘이다.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온갖 것들이 녹아내려 등과 등 사이를 메우는 듯 어떤 얄궂은 믿음이 다져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둘 사이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증명하기엔 난해하기만 한 방정식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만 같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그와 나 사이 등의 방정식. 모든 부부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수천수만의 부부에게는 수천수만의 등의 방정식이 존재하겠기에 딱 꼬집어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 해답이 있을 터. 누구라도 명쾌한 해법 하나쯤 도출해주었으면 좋겠다.
함수 그래프를 떠올려 본다. 도저히 마주할 수 없다는 듯 각자 앞만 보고 내달리는 엑스축과 와이축, 등을 돌려 서로를 향해 다시 왔던 길을 조율해 가다보면 그들이 만들어낸 사면체에 원점이라는 접점이 있다. 이 순간만큼은 엑스축 와이축 어느 한 쪽도 자기만을 고집하지 않기에 한 치 기울어짐도 없이 화평해 보인다. 누구나 꿈꿀 수는 있지만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아닌 듯, 고난도 문제처럼 다가온다.
누운 채 등을 돌린다. 곯아떨어져 있는 그가, 그의 등이 낯설고도 애처롭다. 잠결인 척 등을 쓰다듬는다. 그를 안는다. 잠 속에서나마 힘을 뺀 우리는 비로소 접점에 다다르게 되려나. 그를 향해 등을 돌려 마주하는 일이 마치 지구를 돌아오기라도 한 듯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 새벽, 우리는 접점 어느 언저리쯤 와 있는 것일까. 순해진 남편의 등이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서로에게 스며든 온기가 방을 채운다.
2024 시사불교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누가 희곡을 썼을까/ 박기준
온난화로 뜨거운 아스팔트를 안고 있던 여름도 계절의 순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더위를 피해 떠나 있던 선선한 바람이 제법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다. 들판에는 벼가 여물고 과실수들이 한해의 결실을 가지에 달아매고 있다. 자연의 수확물들을 보며 인생을 한번 뒤돌아 보게 된다. 나의 가을은 어떤 결과물들이 나올까?
밤이 깊었다.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아 인터넷 서핑을 하다 템플 스테이가 눈에 띄었다. 취업, 퇴직, 창업, 실패, 재기의 과정을 거치며 롤러코스트 같은 삶을 뒤돌아 보고자 40대 후반에 아무 생각 없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흥국사로 템플 스테이를 간 적이 있다. 주제가 ‘참 나를 찾아서’였으니 오십 목전까지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온 나 자신에게 딱 맞는 주제이기도 했다.
태생부터 혼자 살 수 없는 구조인 현대 사회, 수많은 관계와 관계가 시절인연으로 맺어진 터라 잠시 멈춤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 관계의 멈춤은 핸드폰에 있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하루 종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핸드폰을 끄고 잠시 분절의 시간,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흥국사로 가는 길목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는 광고 카피가 차창 밖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흥국사는 서기 661년 신라 문무왕 때 당대 최고의 고승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다.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라 했다. 북한산 북서쪽 서기(瑞氣)를 발견하고 흥성암을 창건하였고,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전쟁으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을 위로하였다. 그 후에 조선 영조대왕이 어머니 숙빈 최 씨의 묘소를 갈 때마다 여기를 들러 나라를 흥하게 하는 절이라 하여 흥국사로 이름을 바꾸고 약사전의 편액글씨를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고 하니 그 역사의 크기가 경건하고 엄숙한 나를 빚는다. 입구에 들어서니 초가을 날씨, 저잣거리의 공기와 풍경이 다르다.
일주문을 지나 많은 계단을 올라 불이문을 통과하였다. 불이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3문(三門)중 절의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을 말한다. ‘불이’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불이(不二)의 경지에 도달하여야만 불(佛)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이 문을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템플스테이에 35명의 인원이 참석했는데 주로 여성들이 많았고, 남성들은 10여 명 정도 되었다. 남자들은 거의 40대에서 50대였다. 두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온 아빠, 젊은 연인, 또는 홀로 찾아온 20대 여성. 신랑이 일방적으로 신청해 같이 온 부부, 각기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이유는 달라도, 저마다 참 나를 찾아보고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며 성찰해보고 싶은 마음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도시는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죽순처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지는 세상이다 보니 자기 자신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특히 4-5십대 중년들은 사업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생업에 매달려 가정경제를 이끌어 가야 되니, 앞만 보고 달려올 수밖에 없는 현실. 그렇게 살다 보니 가끔은 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사실 관계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정보, 이를테면 동물, 남자, 49세, 회사원, 서울거주 등과 같은 정보들은 자연 또는 사회 계약 안의 ‘나’의 위상을 알려줄 뿐 ‘나’라는 존재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도와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누군가의 아들, 사위, 아빠, 남편, 친구, 직장동료 수많은 관계 속에서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데 그럼 진정 나는 누구인가? 나는 분명 존재하는 거 같은데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자아(自我)는 있는가? 이날 참가자 중 불교 신자는 1명에 불과했고, 불교에 막연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도 몇 분 계셨다. 종교라는 관점을 벗어나 '나'라는 관점에서 나를 보는 일은 쉬운 기회가 아니였다.
사찰 생활의 기본이 되는 합장과 반배, 절을 하는 법을 배우는 오리엔테이션 시간은 미리 따로 주어졌다. 남녀노소 아래위로 똑같은 황토빛 수련복을 입었다. 사찰 내에서는 묵언이 기본이었다. 부득이 급한 상황이 되면 귓속말로 하여야만 한다. 각종 소음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고요함이 얼마나 좋은지, 침묵이 얼마나 힘든지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침묵은 물과 같아서 다이아몬드 보다 강한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재식을 거치고 주지 스님의 특강. 불교에서 ‘너와 나는 무엇인가?’였는데 모든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설명하며 나와 모든 생명은 둘이 아님 즉,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일깨워 주었다. 결론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게 아니고 더불어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게 불교의 큰 특징이라며 강의를 마무리하셨다. 소승불교의 시선이 아닌, 대중성이 있는 대승불교의 영향이 삶에 보탬이 된다는 의미였다.
저녁 공양시간. 봉사자들이 공양을 짓는 것을 보고, 한 그릇의 공양이 만들어지기까지 보이지 않는 수고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발우라는 그릇을 사용하는 스님들의 식사법인 ‘발우공양’을 처음으로 하였다. 김치 한 조각을 남기고 밥과 반찬을 모두 먹은 후 남겨두었던 김치와 숭늉으로 발우를 씻는다. 발우에 고춧가루나 밥풀이 남아 있는 물은 버리지 않고 마신다. 그래서 밥 한 톨, 고춧가루 한 개도 떠 있으면 안 된다. 환경문제를 생각하고 이 음식이 나오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비와 바람과 햇볕을 아낌없이 준 자연에 감사하며, 그 자연에 순응하며 땀 흘리고 수고한 농부를 비롯하여, 우리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여러 사람이 고생한 공덕에 감사하며 저녁 공양을 했다. 언제 음식을 이렇듯 진지하게 음미하며 감사하게 먹었던 적 있던가? 발우공양 체험은 나를 더불어 살아가야 할 미래를 성찰하는 시간이었고 소중한 체험이었다.
다음 순서는 연등 만들기. 종이컵에 붉은 꽃잎을 붙여 만드는 약식 연등이지만 초를 넣고 불을 켜니 더 이상 예쁠 수 없다. 초를 들고 한 줄로 서서 탑돌이를 하니 그동안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수많은 별들이 총총하다. 나의 잘못된 말과 행동이 저 별처럼 많았겠거니…. 탑돌이 후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인 참선과 명상 시간. 결가부좌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이미 아는 스님은, 반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꼿꼿이 펴라고 지도했다. “눈을 감으면 잡념이 들어오게 됩니다. 눈은 아래로 지긋이 뜨되 한 곳을 정해 응시하세요. 그리고 머릿속의 모든 상념을 지웁니다. 비우세요, 깨끗하게 비워내세요.” 주지스님이 이끌어준 명상시간까지 마친 뒤 각자 방으로 돌아가 11시쯤 잠에 들었다.
새벽 4시. 30분, 새벽 예불이 시작됐다. 세상의 미물까지도 잠에서 깨운다는 타종을 하며 각자의 소원도 빌었다. 새벽산책에서는 자연과 호흡하며, 바람과 대화하며,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찾기도 했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이미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나려 하거나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옵니다. 남을 괴롭히거나 고통을 주는 일이 결코 없기를 원하옵니다. 그릇된 견해에 말려들지 않고 바른 견해 갖기를 원하옵니다. 스스로를 잘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기를 원하옵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참으로 향기로운 말을 하겠습니다. 내가 잘되는 이치는 항상 주는 마음이기에 흔쾌히 베풀겠습니다. 집착하는 마음 버리고 애착의 고통에서 벗어나겠습니다. 제가 이제 남김없이 참회합니다…” 라는 백팔예참문 일부가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니 무척 인상적인 시간이었나보다.
태어나 처음으로 백팔배를 하며 다리와 관절이 아파 땀을 뻘뻘 흘렸지만 백팔가지 인간이 행하여야 할 덕목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하심(下心)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여러 행사가 끝나고 각자의 느낌을 1분 동안 발표하는 시간에 참나를 찾아서 왔다가 나의 마음을 비우고 나를 좀 더 버리고 간다는 말로 나의 느낌을 발표했다. 1박 2일 동안 얼마나 나를 찾았겠는가? 다시 세속의 전쟁터로 돌아가면 마음에 번뇌가 가득 찰 것이고 그때에는 다시 2박 3일. 그다음에는 3박 4일 이렇게 와서 비우다 보면 어느 사이에 선(善)해져 있는 나 자신이 되어 있지 않을까? 나를 찾은 다음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어렵고 힘든 곳에서 작게나마 봉사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백팔배와 명상과 참선과 가부좌를 하느라 온몸이 쑤시고 다리가 아팠지만 마음만은 평화로운 1박 2일.
평생이 걸려도, 30년이 걸려도 참 된 나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 된 '나'라는 것의 정체성을 아직도 모르고 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참 된 '나' 이전에 시선을 돌려 내 주변에 있는 자연과 관계, 섭리의 운행법칙. 들꽃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들에 나가야 하며, 아픔을 알기 위해서는 아파봐야 한다는 진리. 좀 더 광의적으로 생각하면 참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참 된 '너' 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당신에게 내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중요하다. 어쩌면 짧은 템플스테이에서 내가 배운 것은 참 '나'가 아닌, 참 '너'를 찾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나의 연극무대는 아직 진행 중이다. 커튼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 끝난 후, 관객이 떠난 텅 빈 객석에 앉아 나의 무대를 보면서 흐뭇할 수 있다면 홀로 일어서 기립박수를 보낼 것이다. 나에게. 내가 꿈꾸는 소박한 희곡의 시놉시스다.
박기준 시인, 수필가
국민일보 신춘문예, 경기 노동 문화 예술제 수상, 한국 디지털 문학상, 근로자 문학제 수필 부문 동상, 2023 직지문화콘텐츠 최우수상, 방송대 국문과, 제3회 한용운 문학상 수상, 2024 오륙도 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24 시사불교 신춘문예 디카시, 수필 부문 당선
2024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인쇄용지의 결 / 김경숙
작은 것이라도 굴곡이 생기면 오류를 일으킨다. 괜찮다 싶다가도 어딘가에 걸리면 그대로 멈춘 채 꼼짝하지 않는다.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여보지만 미세한 엉킴에도 상처투성이다. 습기를 먹는 날엔 갈래갈래 찢겨 회복조차 힘들다.
용지함을 열어 엉킨 종이를 빼내고 상태를 확인 후 다시 인쇄를 누른다. 조금 더 두꺼웠다면 걸림이 덜했을 것을. 얇고 가벼워 곧게 굴러가는 것도 힘들고 때론 들러붙기도 해 내부 센스가 존재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비침이나 번짐도 심하다. 양면으로 인쇄할 땐 한쪽이 물을 먹은 듯 흐느적거려 다음 길을 제대로 걸어올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결국 멀쩡한 종이를 들어내고 결이 좀 더 튼튼한 용지로 바꿔 넣는다.
사람도 인쇄용지처럼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결이 다를 수 있다. 같은 프린터 기계에 종이를 넣어도 무게마다 차이가 있는데 저마다 다른 결로 살아온 사람들은 하물며 오죽할까.
나도 얇은 용지처럼 버겁다는 느낌이 들면 곧장 굴곡이 생기는 날들이 있었다. 결이 얇아 비침과 번짐도 심했다. 밖으로 훤히 드러날 만큼 남에게 속을 보이기도 했고, 안으로 오므라들어 납작하게 눌어붙기도 했다.
밀실에 자주 갇히던 때였다. 이상한 것은 그때마다 나는 간 곳 없고 무성한 눈빛들이 텅 빈 나를 채우고 있었다. 불편한 무게가 들어서는 것을 느끼면서도 내가 없다는 생각을 못 했다.
나와의 거리감이 열 배, 스무 배쯤 있었던 시절이었다. 숱한 눈빛들이 거대한 봉우리라면 나는 그 앞에서 숨죽이는 아이에 불과했다. 원치 않는 것을 받아들이고 삼키는 바람에 걸림도 잦았고 제자리에 멈추는 날도 많았다. 자존감이란 게 하나도 없었다.
열등감 때문이었다. 타고난 결이 얇은데다 남들보다 깨치는 것도 더뎌 자라는 어느 지점쯤 스스로를 모자라고 서툰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미세한 상처도 견디지 못하고, 무엇을 해보겠다고 덤빌 저항이나 욕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이 얇아도 좀처럼 오류가 생기지 않고 왕복을 힘들어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들은 질긴 실로 엮여 있거나 건조되는 과정 중 또렷한 색깔과 무늬를 가졌는지 모른다. 그것이 곧게 굴러가는 힘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촘촘하지도 않고 색깔과 무늬도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안개처럼 모호한 회색이었다. 진작 또렷한 색이나 무늬를 가졌다면 갇히는 일이 덜 했을 것을. 반복되는 엉킴과 걸림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나였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출구를 찾지 못했다. 내 존재를 들여다볼 여유가 더 없었고 색깔도 부피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일상 안으로 나를 욱여넣기만 했다. 얇디얇은 인쇄용지처럼.
'내'가 필요한 일. 그것은 기습이었다. 작은 공장을 운영한 남편의 예기치 못한 실패는 무섭고 생경한 질서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갇혀 있으면 나 혼자 길을 잃는 게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도 길을 잃게 되는 일이었다.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볼품없는 저항이라도 꺼내고 휘둘러야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벽을 오르고 상처 난 곳에 약을 바르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헤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두려움이 최고조로 달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무력감에 빠진 내 존재가 바뀌는 지점이기도 했다. 엄마라는 말은 나약하고 게으른 결을 메울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세찬 비바람이 지나가서인지 비침과 번짐도 한풀 꺾이고 엉키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늦게나마 그 지점이 출발선이 되었다. 어느 모퉁이쯤 깊숙이 눌려있던 자아를 맞닥뜨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들여다보았으면 자라는 여러 지점을 거치며 조금씩 여물어갔을 텐데. 무대 곳곳에 다른 사람을 세워놓고 그들이 바른 립스틱이 메말라 가는지, 마스카라가 번지진 않는지, 피부톤이 붉게 달아올라 힘들어하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을 냈다.
톺아보면 수시로 엉키는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몰랐다. 남에게 맞추는 게 습관이 되어 내 안에 두고도 나를 찾지 못했다. 정작 나에게 나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어수선하고 서툰 날이었다.
풍경은 달음박질하듯 흘러가는데 내 시간은 한참이나 더뎠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쯤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어떤 무늬를 그리고 싶은지 들어오기 시작한다. 노을이 생길 무렵에야 서툴렀던 시간을 위로받으며 물들일 입구를 서성인다.
단단해지는 일. 이를테면 무수한 시선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나를 앉히는 일. 내 안에 두고도 몰랐던 것을 밖으로 꺼내는 일. 내 식으로 짜인 생김새를 이렇게 저렇게 그려보는 일. 달무리처럼 희미한 둘레라도 무늬를 가지는 일이다. 시간은 그렇게 조금씩 나를 바꾸어 가고 있었다.
처음엔 겉돌았던 지점이 많아 안타깝고 미웠다. 서둘렀으면 좋았을 것을 싶기도 했다. 이제 와 바라보니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생각도 들고, 천천히 다가와 준 마음이 오히려 고맙기도 하다. 거짓 없이 흘러나오는 것들을 마주할 수 있어서.
결이 단단해진다는 것은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전에 생긴 굴곡을 다듬고 문지르며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 일이다. 버겁다는 느낌이 들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무늬 하나를 보태어 다시 그리면 되는 것이다.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있을까. 프린터 용지함에 종이를 넣고 고르게 들어갔는지, 들러붙진 않는지 살핀다. 출구를 향해 늦은 인쇄용지 하나가 덜컹대면서도 천천히 제 길을 걸어오고 있다.
2024신춘문예 전북도민 당선작/ 칸나 / 한경희
드디어 칸나가 빨간 꽃을 피웠다.
이른 봄 알뿌리를 마당에 심었는데 석 달이 지나도록 미동도 없었다. 벌레가 먹었는지, 거름으로 땅만 살찌웠는지 의심스러운 그때 조그맣게 파란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빠른 속도로 자라 줄기가 굵어지더니 크고 널따란 이파리가 멋스럽게 서로 비켜 가며 자리를 잡았다. 검은 펜스 넘어 우뚝 솟은 칸나의 견고한 줄기에 빨갛고 보랏빛 도는 두툼한 꽃대가 한꺼번에 여럿 올라오고, 닭 볏 같은 빨간 꽃이 피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칸나만큼 열정적인 꽃이 또 있을까. 여러 겹의 빨간 치마를 나선형으로 두르고 플라멩코를 추는 정열의 여인 같은 칸나, 그 칸나 위로 셋째 언니 얼굴이 떠오른다.
언니는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우리 딸부잣집 셋째 딸이다. 동네 아주머니가 셋째 언니의 혼처를 가지고 왔을 때 엄마는 펄쩍 뛰며 대번 퇴짜를 놓았고 당사자인 언니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고 홀시어머니에 외아들이라는 이유였다. 뒤늦게 사실을 안 언니는 그길로 아주머니 집으로 뛰어가 맞선을 보겠다고 말했다. 집을 떠나고 싶었던 언니는 형부의 직장이 탄탄하니 시집을 가겠노라 선언하였다. 뽀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언니는 성격 또한 당차고 분명했다.
단출하게 살던 형부는 형제들로 북적이는 처가에 자주 드나들며 나이 어린 처제들을 잘 챙겨주었다. 언니의 시어머니인 사돈 할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엄하게 키우셨지만, 며느리에게는 한없이 자상하셨다. 언니는 시어머니를 존경하였다.
방학 때 가끔 가본 서울 언니 집에서는 낯선 냄새가 났다. 새로 지은 집에서 나는 그 냄새는 시골 우리 동네에서는 좀체 맡을 수 없는 도시의 냄새였다. 한여름 언니의 단독주택 수돗가에는 배달해온 커다란 수박이 물에 둥둥 떠 있곤 했다. 너무 커서 냉장고에 넣기도 힘든 수박을 언니는 거침없이 쓱쓱 잘랐다. 수박의 빨간 속살은 어찌나 달콤하던지, 언니처럼 자신만만하게 사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어린 나에게 언니는 이상이었다. 연년생으로 아들을 둘 낳은 언니의 이층집은 부지런한 안주인의 성정이 그대로 나타났다. 언니 중 제일 잘 사는 언니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칸나가 무더운 햇빛 속에 피었으니 얼마나 목이 마르고 힘이 들까? 한여름의 땡볕 같은 어려움이 언니 집에 드리워졌다. IMF가 터지면서 형부는 다니던 회사에서 나오고 언니에게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이 부도를 맞으면서 가세가 급작스레 기울어졌다. 이후 친구가 하는 회사에 들어간 형부가 적지 않은 자금을 여기저기 끌어다 넣었는데, 결국 회사가 문을 닫고 말았다. 넣은 자금을 못 건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애써 지은 단독주택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 미안한 마음에 형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언니는 냉철하고 단호하였다. 집을 팔지 않으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말에 형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빠른 결단을 내린 것이다. 비관과 원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만큼 절박했지만 넓은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언니가 그렇게 아끼던 집을 팔자고 했을 땐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언니의 오십 대는 시련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장이 되어 보험, 책 외판, 아기 돌보미 등 여러 일을 전전하게 된 언니에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쁘고 힘든 생활 탓이었을까? 어느 날 시작된 하혈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놀란 마음에 찾아간 집 근처 산부인과에서 자궁 근종이 육 개월 넘은 태아 크기로 자라 있다는 진단을 받고 말았다. 똑똑한 언니가 자신의 건강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던 것일까, 생활에 밀려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일까. 암이 아닌 건만도 어디냐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서둘러 대형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언니의 유방암 진단과 수술. 우리 자매의 충격은 컸다. 서둘러 간 입원실에서 수술을 마친 언니가 여전히 씩씩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가슴에 멍울이 만져져 곧바로 병원에 왔노라며 웃었다. 지난번 수술 이후 몸 상태에 관심을 가져 그나마 빨리 발견한 모양이다. 가발과 모자가 언니의 애용품이 되건 그때부터였다.
작은아들이 7급 공무원이 되고 대기업 다니는 며느리를 얻으니, 몸을 추스른 언니가 손녀를 돌보느라 형부와 주말부부가 되었다. 암 수술 환자인데 괜찮겠냐며 걱정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결연하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언니는 더 적극적으로 삶의 끈을 견고히 다졌다. 튼실한 줄기와 마디가 꽃을 받쳐주는 칸나처럼 강인한 정신력이 언니를 받쳐주었다.
둘째를 낳은 며느리 휴직이 끝나갈 즈음 언니는 식구들과 여행을 갔다 오다 심한 구토를 하였고, 이상히 여겨 간 병원의 검진에서 위암을 발견하고 말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암이라니. 유방암 치료 후 완치 판정도 받았는데. 병원 바닥에 주저앉았던 언니는 예의 씩씩함으로 벌떡 일어섰다. 조바심내지 않고 힘든 마음을 잘 다독인 언니는 수술을 마친 후에도 평온하였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에서 고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위암은 암세포 퍼진 부위가 중요해.’ 하필 가운데 부분에 암세포가 퍼져 위 대부분을 절제할 수밖에 없었노라며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담담히 말하였다. 튼실한 기업에 들어간 큰아들도 결혼하고 이제 한숨 돌릴만한데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밖으로 토해낸 것일까.
칸나의 견고한 파란 줄기가 마디를 지나며 붉은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언니의 안온했던 시기는 칸나의 파란 줄기처럼 평화로웠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굵은 마디가 생기더니 고군분투하며 암 수술로 점차 붉은 보랏빛 피멍이 들어갔다.
언니는 먼저 앓았던 유방암은 지금의 위암에 비하면 사소한 암에 불과하다는 말로 그 심적 고통을 표현하였다. 위 절제 후 항암치료를 여러 차례 하였다. 항암을 마치고 가다 속이 메스꺼워 정신없이 내려 모두 토하고 길가에 주저앉았던 일, 혓바늘이 돋고 현기증이 일어 하늘이 노래질 때면 그 자리에서 그만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일, 그 힘든 날들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칸나의 또 다른 꽃대에서 여러 개의 꽃도 피어올랐다. 커다란 빨간 새 여러 마리가 비상하기 위해 몸짓하는 모양새다. 꽃이 더욱 짙어진 칸나는 찌는 듯한 햇볕과 비바람을 견디고 병충해도 잘 이겨낸다.
이제 언니 몸은 칸나 같은 언니의 정신세계를 잘 따라와 주고 있다. 지금도 일주일에 이삼일 둘째 아들 살림을 살펴주고 있다. 몸을 먼저 챙기라는 우리에게 손주들이 눈에 밟힌다며 자신이 해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언니는 경제적 어려움과 세 번의 큰 수술을 잘 견뎌냈다. 그 힘든 항암치료 중에도 두 아들의 취업과 결혼 그리고 손자 육아까지 해내었다.
추위에 약한 칸나는 서리 내리기 전 알뿌리를 캐어 보관하면 이듬해에 다시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다.
언니는 꾸준한 건강관리와 섭생으로 추위를 타는 겨울도 병치레 없이 잘 보낸다. 손주들이 커서 자유시간이 많아진 언니는 국내 이곳저곳 여행을 다닌다. 살아보니 인생 별것 없더라. 내가 앞으로 이렇게 마음대로 여행 다닐 시간이 얼마나 되겠니. 지난날을 생각하며 눈물 짓거나 우울한 감상에 젖는 일 따위는 언니 사전에 없다. 무더운 여름에 애써 꽃을 피우는 칸나처럼 굴곡진 세월을 한올 한올 잘 풀어나간 언니의 삶이 깊은 울림과 진한 감동을 준다.
‘언니! 칸나가 멋진 꽃을 피웠으니 보러와.’ 나는 사진을 몇 컷 찍어 언니에게 보냈다.
2024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움쑥 - 김서연
새 살처럼 연한 쑥을 쓰다듬는다. 여름이 되면 수수깡처럼 속이 비어버리는 터라 봄이 다 지나기 전에 살찐 쑥 우듬지를 뚝뚝 잘라 저장해 두었는데, 추석을 며칠 앞두고 산적을 할 요량으로 양하밭을 더듬다가 뜻밖에 우북한 쑥 무더기를 보았다. 사위어가는 불땀처럼 흔적을 지우고 재만 남았던 자리여서 더욱이 놀랐다.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 옷을 태웠다. 요양병원에서 하루 날을 잡고 나와 당신 살림을 미리 정리했던 터라 유품이랄 것도 없었다. 병원 생활에 꼭 필요할 물건만 챙겼으니 옷가지 몇과 전화기가 전부였다. 잘 마른 쑥을 불쏘시개 삼아 작은 보따리를 던졌다. 그 안에는 입어보지도 못한 외투도 있었다. 물색이 너무 곱다고 저어했지만 상점주인과 내가 우측 좌측 밀어붙여 장만한 옷이었다. 영 내키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바꾸자고 했을 터인데 날 따뜻해지면 나들이옷을 하겠다고 두었다. 기껏 딸 집에 한 번씩 다녀가는 어머니다. 시골살이하는 내 집 뜰에서 새싹 보는 것을 좋아했다. 잡초 사이에서 올라오는 머위나물이며 쑥을 한주먹 뜯어 와서는 먹기도 아깝게 이쁘다며 웃었다. 꽃 밴 수선화를 보고도 그랬다. 어디에 있다가 작년 모습 그대로 얼굴을 내미는지 신기해했는데 환절기 때면 한 차례씩 앓았던 당신에겐 어린 싹들이 더없이 대견했을 것이다. 그마저 오래 보지 못했다. 다음 해에는 입원을 하고 말았다. 병실에 있는 동안 꽃철은 두 번이나 지나갔지만, 외투는 나들이 한 번 못 해보고 결국 불더미 속에서 사그라졌다.
전화기만 가져와 서랍에 넣어 두었다. 이제는 소리도 없는 껍데기지만 어머니의 전화기는 내게도 특별한 물건이다. 아파트에서 혼자 사셨는데 가까이 지내던 내가 수시로 전화를 하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때로 받지 않을 때가 있었다. 외출했을 것을 가정해 어림한 시간까지 기다리다 끝내 연락이 되지 않을 때는 쭈뼛쭈뼛 머리카락이 섰다. 번번이 전화선이 빠져 있거나 전화기가 잘못 놓여 있었다. 이렇게 한번씩 소동이 나는 것을 친가나 외가도 알게 돼 외갓집에 가시면 외삼촌이, 큰집에 가면 사촌 오빠가 어머니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줬다. 하지만 시장이나 병원같이 예고 없는 출타가 문제였다. 협박도 하고 사정도 해가며 어머니의 목에 걸리게 된 전화기였다. 병원에서도 침대 난간에 걸어두고 자식들의 전화를 받았는데 딸네 뜰을 생각하는지 쌉싸름한 머위나물이며 연한 파나물, 된장 풀어 끓인 쑥국 이야기를 자주 했다.
어머니 가시고 흑백사진처럼 어두운 나날이 갔다. 당신과 연락이 안 되면 사색이 되어 뛰어다니던 나를 아시면서. 잘 도착했노라고, 여긴 날마다 봄날이고, 지천에 나물과 꽃이 가득하다고 전화 한 번 주면 안 되는 것인지. 겨우 연락이 닿은 어머니를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울던 나를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나뿐인 건지. 얼마나 먼 길이길래 아직도 도착을 못 한 걸까. 한살이 마친 꽃자리처럼 어머니 떠난 자리가 허전해질 때면 무시로 전화기를 뒤적였다.
전화기 속에서 친구들은 손주 자랑으로 앞다툰다. 나 역시 꼬물거리는 손짓, 발짓이 귀여워 내 손주도 아닌데 몇 번이고 사진과 동영상을 돌려본다. 이집 저집 카톡 사진들을 훑는데 이게 웬일인가. ‘엄니 핸드폰’이 카톡에 떴다. 어머니가 쓸 때는 기능이 단순한 폴더폰이어서 카톡을 사용할 수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액정을 뒤로 밀었다. 분명 어머니 번호가 맞았고 반갑기보다 무서웠다. 시아버지 초상을 치른 후 ‘아버님’ 이란 번호로 전화가 와서 놀란 적이 있다. 남편 명의로 해 드렸던 전화기를 받아와 다시 사용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때 망자들의 세상도 어디에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 좋아졌으니 저세상에도 변화가 있어 전화기 하나씩은 손에 들려있을지도 모른다는 맹랑한 상상을 했었다. 조심스럽게 화면을 늘렸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앳된 여자의 진달래 빛 상의가 환했다. 손가락 사이로 눈, 코, 입이 선명해졌다. 피부가 희고 잇속 보이는 웃음이 언뜻 우리 자매들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전화번호를 반납했으니 새 주인을 만난 것이 당연했다. 번호 잃은 어머니의 전화기는 멍텅구리가 되어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음을 잘 알면서도 ‘엄니 핸드폰’ 속 그녀를 자주 훔쳐보았다. 대강의 일상을 읽으며 취향이나 성격까지 마음대로 가늠했다. 여행지에서의 거침없는 웃음이 화면 안에서 쏟아질 때는 나도 덩달아 입이 벙그러졌다. 요즘은 연애를 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까무잡잡하고 이목구비가 반듯해 어디서 본 듯 낯설지 않았다. 어머니 가시고 우리 형제는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혼자 보기 아까워 잠잠한 형제들의 단체 톡 방에 그간 이야기들을 나열했다. 아버지처럼 안경을 꼈다는 얘기도 했지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노을을 바라보듯 어머니를 보내고 제각기 가슴에 검게 타 들어간 구석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박완서 작가의 <움딸>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시집간 딸이 죽고 사위가 새 장가를 가서 맞은 부인을 전처의 친정에서는 움딸이라고 부른단다. 불탄 쑥밭에서 새로 돋은 가을 쑥을 움쑥이라고 부르는 이치와 같았다. 딸을 잃은 친정어머니와 전처의 흔적을 보아야 하는 새 부인이 서로 편한 관계일 리 없다. 소설 속에서 새 부인은 절대 움이 틀 수 없는 불모지에 있다. 하지만 아이의 외할머니 마음에 딸 같은 정이 움트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가슴에 오래 남았었다.
뜬금없이 동생한테 문자가 왔다.
“어머니 번호 쓰는 사람 행복한가 봐, 보기 좋네.”
풀숲을 헤매던 손이 움쑥을 쓰다듬으며 평온을 만났듯이 요즘도 한 번씩 전화기에 새 소식이 움트면 형제들과 대화를 엮는다. 서로의 불탄 마음 언덕을 어루만지며 보듬는다. 이렇게 어머니는 조금 더 우리를 돌보다 갈 모양이다. 열여덟 살에 시집을 왔다고 했다. 목화를 따다가 들녘 사람이 된 어머니는 솜털보다 순한 사람이었다. 쑥 향이 코 끝에 맴돌다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바람 닿는 그곳에도 쑥이 돋았는지 전화 걸고 싶다. 우리 형제들의 웃음이 만발한지 물어보고 싶다.
외눈[전라매일2024신춘문예-수필]/권상연
나는 술래다.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어둠을 더듬으며 아이들이 쳐대는 손뼉 소리를 따라간다. 짝짝, 어둠 속에서 내가 의지할 데라곤 소리뿐이다. 악동이었던 순애는 나를 물구덩이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다. 나는 쓰러졌다. 발목이 접질렸다.
“황반변성 백내장입니다. 수술해야 합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같은 의사의 말에 캄캄한 어둠은 또한번 닥쳐왔다. 혹시 이건 유전이 아닌가, 어머니한테 의심이 갔다.
어머니 눈은 외눈이다. 출생한 순간부터 눈에 이상이 있었다. 마땅한 치료 약이 없던 시절이라 민간요법에 의존했다. 갓난쟁이의 젖이 즉효 약이라 하여 할머니 생젖을 짜 넣기도 했다. 좀 더 자라서는 심 봉사 젖동냥하듯 이웃의 젖먹이를 통해 젖을 얻어 치료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백내장 수술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의술이 좋아졌다는 의사 선생님의 호언장담이 있었기에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눈 수술은 어둠 속에 갇혀 지냈던 아버지가 떠올라 나는 더욱 두렵게 다가왔다. 눈을 잃은 순간, 아버지는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세상을 손으로 더듬으며 터득해 나갔다.
눈이 불편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에 눈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술 날짜가 가까워지자, 나누어도 나눌 수 없었던 아버지의 어둠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내 신경은 한껏 당겨진 활처럼 팽팽해졌다.
젊은 나이에 시각장애로 집안에 들어앉은 아버지를 어머니는 외눈으로 보살펴 왔다. 혼사란 비슷한 처지가 만나야 잘 산다는 말이 있다.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뜻이었으리라. 선천적으로 시력이 약했던 아버지가 외눈의 어머니를 만난 건 일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비 때마다 아버지가 잘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외눈 덕분이지 싶다.
명사수는 활을 날리기 전 마지막 동작으로 한쪽 눈을 감는다. 분산되는 신경을 차단하여 멀리 떨어진 과녁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다. 화살은 선수가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려 균형을 잡고 활을 당길 때의 힘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승부를 판가름하는 건 한쪽 눈이 과녁을 잘 읽었을 때라고 한다. 어머니의 하나뿐인 눈은 언제나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아버지는 흰색 한복을 즐겨 입었다. 어머니는 철철이 베를 끊어와 손수 옷을 만들었다. 흰색이라 빨래하기 힘들다고 투덜거렸지만, 어머니는 “없는 살림일수록 더 살뜰히 챙겨야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시 적삼을 입은 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있으면 옛이야기나 동양화에 등장하는 선비처럼 곱다고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할 정도였다.
누구나 흉터는 숨기고 싶어 한다. 옷이나 다른 장신구로 가릴 수 있는 흉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는 젊을 때부터 머릿수건을 모자처럼 푹 덮어쓰고 다녔다. 감긴 눈을 감추느라 멀쩡한 외눈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는 한쪽 눈을 감고 어머니를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다.
자식이 태어나면 눈부터 살폈다. 혹여라도 외눈이 유전이라도 되었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좀 더 자라서 시력검사를 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머니 눈을 탓했다. 내 속만 타는 줄 알았던 시기에 어머니의 외눈도 새파랗게 질려갔음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요즘 백내장 수술은 수술이 아니라 할 정도로 의학이 발달 되었다. 아버지의 눈 때문에 병원 문턱이 닿도록 드나들었던 어머니가 아니던가. 요즘 의학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수술을 눈앞에 둔 자식을 보면서 그 초조함을 어디에 견줄까.
“외눈으로도 팔십이 넘도록 살아왔다. 요즘은 좋은 약도 있고 의술이 있지 않으냐. 너는 두 눈이 있지 않으냐. 수술받아라. 염려 말아라.”
자식은 여든이 돼도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나는 어머니를 알지 못한다. 나는 연로한 어머니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건만 어머니는 내 마음을 거울 들여다보듯 알아차리고 다독거린다.
수술이 끝나고 한쪽 눈에 안대를 했다. 습관적으로 바라보던 신경이 제자리에 찾지 못해 흔들린다. 걸음을 뗄 때마다 어질어질하는 것이 멀미하는 것 같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남은 눈에 힘을 줬다. 그제야 흐릿했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내가 외눈으로 산 날은 며칠뿐이었다. 어머니의 세상을 알기엔 턱없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어머니 영정 사진을 만들었다. 죽기 전에 멀쩡한 두 눈을 간직한 모습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영정 속 두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머리카락이며 입 주위를 한참 맴돌 뿐이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영정 속 눈을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외눈으로 본 온전한 세상이 눈 안에 다 담겨있는 듯했다.
어머니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두 눈이 해야 할 일을 홀로 감당했으니 지쳤을 법도 하건만 무슨 염려를 그리하는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내 어깨에 얹힌 짐이라고 생각했던 외눈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근심거리는 멀쩡한 내 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현관문을 여닫는 손길이 유난히 파르르 떨린다. 당신으로 인해 내 눈이 약하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나이도 한참 지났건만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세상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나 보다.
저녁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달이 떠오르고 있다. 앗! 달도 외눈이다. 외눈으로 저렇게 세상을 밝게 비추다니 오늘부터 나는 외눈을 온눈이라고 부르련다.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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