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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 / 야합(野合)ㅡ 최 민 자

5매수필

by 장대명화 2023. 12. 31.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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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추(晩秋) / 최 민 자

 

가브리엘 포레의 파반느가 실크처럼 휘감기는 카페에 앉아 창 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다. 가을이 이 거리를 통과하고 계신건가. 은행나무들이 일제 사열중이다. 봄여름 동안 존재감 없이 서 있던 나무들에 황금나비 떼가 북적이기 시작하면 가을은 급격하게 조락으로 치닫는다. 익은 노랑빛으로 차오르는 계절, 에스프레소 잔이 식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커피한테 어느 계절과 한 잔 하실 거냐고 물어본다면 가을이랑 하겠다 할 거라고. 초가을이 아메리카노라면 늦가을은 에스프레소다. 깊고 그윽한 커피향과 어우러진 포레의 선율이 내 안의 와디를 느리게 적신다. 눌러 두었던 감상(感傷)이 마른 물길을 따라 스멀스멀 번져온다. 뜨거운 혓바닥을 가진 불뱀 한 마리가 핏줄을 타고 거슬러 오르는지 명치 어디쯤이 알싸하게 아프다.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늙어가는 여자에게도 가을은 위험하다.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결 하나에도 애써 잠가둔 안전핀이 순식간에 뽑혀나갈 수 있는 나이, 그 나이쯤 되어 봐야 아름다운 것들 속에 감추어진 슬픔도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극기(克己)에는 마조히즘적 쾌감도 있는 법, 둑이 터져 넘치기 전에 서둘러 털고 일어나야 한다.

공원 옆 길, 늦게 핀 구절초들이 해쓱하게 웃고 있다.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관리 중이지만 갈급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듯, 수척하게 야윈 낯빛들이다. 해끗한 이마 어디쯤에 죽음이 한 발을 걸쳐놓고 있는데도 저리 천연스레 웃을 수 있다니. 강적(强敵)이다. 고수다. 대단한 전략가다. 연약한 듯 노련한 포커페이스들 앞에, 웃음을 무기로 원하는 바를 쟁취해내려는 목숨의 저 비장함 앞에, 나는 그만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싶어진다.

둥근 둘레를 풀어헤친 나무 아래로 늦가을 같은 여자 하나 휘적휘적 걸어간다. 변심한 애인처럼 가을이 가고 머지않아 눈이 내릴 것이다. 그렇게 해가 갈 것이다. 그렇게 한 생이 흘러갈 것이다.

 

                                                야합(野合) / 최 민 자

 

천변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억새밭 가장자리엔 환삼덩굴이, 그 아래쪽엔 강아지풀과 냉이들이 군집해 있다. 냉이는 냉이끼리 질경이는 질경이끼리, 각자의 영역을 고수할 뿐 함부로 경계를 넘나들지 않는 것이 암묵적 약속 같은 게 있어 보였다.

언제부터인지 질서가 깨졌다. 땅만 보고 기어가던 환삼덩굴이 슬금슬금 하늘을 넘보기 시작했다. 예민한 촉수를 허우적거리며 허공을 성큼 도발하더니 억새의 멱살을 냅다 낚아채 다짜고짜로 휘감기 시작했다. 단풍잎을 닮은 잎사귀에서 울긋불긋한 제 가을을 꿈꾸었을까. 억새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무렴,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얽히고설켜 더불어 사는 게지.

환삼덩굴은 단풍이 아니었다. 천하를 덮고 싶은 욕망이 소름처럼 돋아 있는 사이비(似而非)였다. 취한 억새들도 급기야 알아챘다. 휘청거리는 허리를 질끈 조여 주는 짜릿함도 잠시, 가시에 찔린 살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밤낮없이 옥죄고 흔들어대니 숨통이 턱턱 막히기도 했다. 앞줄 억새들이 시름시름 쓰러졌다. 덩굴들도 함께 주저앉았다.

파렴치와 탐욕의 은밀한 결탁, 야합의 끝은 '함께 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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