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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歸路)에서 외 3편 / 원 종 린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3. 7. 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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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로(歸路)에서 / 원 종 린
                                                                                                           
 이번에 나는 진주(晉州)에서 회합을 마치고 귀로의 코스를 생각하다가 역시 버스를 타고 남강 사유의 계곡을 따라서 산청(山淸) 함양(咸陽) 진안(鎭安)을 거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정류장에는 함양까지 가는 차가 대기하고 있고 차장 아이는 목청을 높이며 열심히 손님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보나마나 포장도 안 된 지방의 부실한 도로에다 버스도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는 털털이 차로 몇 백리 산속을 달릴 일을 생각하니 다소 어두운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낯선 고장에 대한 호기심이 결국 나를 이 길로 몰아세운 것이다. 그러나 지나다 보면 가끔 생각지 않게 물 좋고 숲 좋고 거기에 기암괴석이 깔린 계곡을 달릴 수도 있어 이런 것들을 다 그날의 부수입으로 친다면 산길을 달리는 그 싱싱한 멋은 다소의 불안쯤은 메우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1년에 몇 차례씩은 모임이 있게 되어 그때마다 다른 지방을 돌아볼 기회가 생긴다.
  시일에 쫒기는 일만 없으면 나는 대개 철도나 큰 국도를 버리고 지방의 등외 도로를 누빈다. 한 장의 안내도를 벗삼아 구석진 고장의 인정도 살피고 산정(山情)도 돌아보며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떠다니는 묘미는 정말 매력을 느끼곤 했다.
 이 소로를 누비는 방랑취미가 혹시 세세한 데까지 마음을 써야하는 접장이라는 직업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다른 동업자들에게는 꾸중을 들을 엉뚱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가령 우리 여러 직업들을 길에 비긴다면 교직생활은 확실히 화려한 고속도로나 포장이 잘 된 일등국도 축에는 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성’이라는 굴레만 벗긴다면 정말 하찮은 소로 일 수밖에 없는…….
 어떤 이들은 수천억의 예산을 주무르고 삼천만 겨레를 장중에 놓고 정책을 다루는데 우리는 때로 어린이의 콧물을 닦아주고 옷의 먼지를 털어주며 판서의 줄이 비뚤어지지 않았는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교실안의 게시물의 조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이 직업의 높고 낮은 것을 따진다는 뜻도 아니고 더구나 내가 남의 직업을 넘겨다본다는 뜻도 아니다. 말이야 바로 말이지 큰 길만 골라 다니는 여행처럼 멋없고 싱거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우리네 직업에서도 말이다.

 진주에서 함양까지 오는 동안 길가의 마을마다에는 빨갛게 익은 감들이 지붕을 덮었고 아름다운 계곡들은 시야를 즐겁게 해주어서 몇 시간 동안 심심찮은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함양에서 갈아 탄 버스가 몇 십 분쯤 달렸을 때 장마당이 있고 옆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조촐한 마을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때 어떤 골목에선가 얼굴이 희고 예쁘장한 소녀가 밝은 미소를 띠며 차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고장의 환경처럼 티 없이 맑고 순박하게 보이는 이 소녀는 산골 아가씨답지 않게 옷차림이나 태도가 아주 세련되고 한 송이 꽃처럼 마냥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나그네의 점수가 후했을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서울에 있는 딸 연아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이 소녀를 지켜보았다. 이 소녀는 이 차의 운전기사와 잘 아는 사인가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쌍의 종달새처럼 즐거운 대화가 벌어지고 있었고 점수가 헤픈 한 나그네는 그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얼마 뒤에 운전기사는 작별의 신호라도 하듯이 호주머니에서 빨간 사과를 하나 꺼내서 소녀에게 던져주고 이내 핸들을 잡고 떠났다. 소녀는 미소를 띤 채 꽃잎 같은 손을 연방 흔들고 있었다. 이 구김없는 애틋한 정경이 나의 마음속에 긴 여운을 남겼다.
  다시 떠난 버스는 아름다운 계곡을 몇 구비 돌았다. 나는 두 젊은이에게서 이 계곡의 맑은 물보다 더 청순한 애정의 샘물 같은 것을 느끼며 이 두 사람이 꼭 다정한 애인이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얼마 뒤에 버스는 이제 무척 가파른 고갯길에 다다랐다. 한동안 숨을 헐떡이며 산마루에 올라서자 차는 숨을 돌리기라도 하듯이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곳이 정류소인지 노파 한분이 내릴 채비를 하고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쭈그러질 데는 하나도 남김없이 온통 다 쭈그러진 것 같은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얼굴과 손등은 지금 허덕이고 올라온 이 버스처럼 무척 어려운 인생의 고갯길을 기어올라온 자취를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런 고갯길과 저런 할머니 사이에는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통히 인연이 없는 것 같기도 한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할머니의 걸어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한손에는 허름한 보따리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술병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내리는 찰나에 술병을 쇠붙이에 부딪쳐서 병이 두 동강이로 깨지고 말았다. 그 순간 나와 할머니는 동시에 병 깨지는 소리보다 더 비통한 소리를 질렀지만 술은 아랑곳없이 온통 버스바닥에 번져 흘렀다. 할머니는 엉뚱하게 흘러가는 술의 행선지를 원망스럽게 되돌아보며 내렸고 진땀을 뺀 버스는 생각잖게 한 병의 술을 송두리째 들이켜고는 그대로 떠나버렸다. 바닥의 술은 자취도 없이 흘러갔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할머니 일그러진 표정이 오래도록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 야위고 가련한 저 할머니에게는 한 병의 술이나마 정말 귀하고 소중할 터이다. 집에서는 누군가가 목이 마르게 저 술을 기다리고 있을는지도 모르는데…….
  이제 길은 아찔한 낭떠러지를 끼고 도는 내리막길이었다. 그러나 차는 이제야 술 취한 기분이라도 내듯이 양장(羊腸)의 굽이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차는 지금 도계(道界)를 지나서 다음 행선지를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는 것이었다.
 안계(安溪)라는 곳에 왔을 때 골목에서 제복의 어린 중학생들이 떼를 지어서 하학길에 오르고 있다. 얼마 전에 전국체전에서 맨발의 축구선수로서 화제에 오른 학교가 바로 이 학교였던가? 이런 생각을 하며 중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우리 집의 두 학생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조금 전에는 귀엽고 순박한 소녀에서 딸 연아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두 아들 지야와 준이의 모습이 떠 오른 것이다. 여행 중에는 가끔 이런 일이 있게 마련이다. 나의 머릿속은 세 아이들 생각이 가득 차온다.
  혹시 이번 공휴일에는 연아가 다녀갈는지도 모른다. 햇병아리 교사 노릇하기에 일과가 바빠서 여간 벼르지 않고는 집에 한번 다녀가기도 어렵다고 했었다. 두 동생이 늘 보고 싶다고 했었다. 혼자 떨어져서 그대로 별 다른 불평없이 지내고 있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내 욕심으로는 연아는 꼭 과학을 시키고 싶었다. 나는 퀴리 부인전을 즐겨 읽었고 연아도 어려서부터 크면 한국의 여류 과학자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서 아빠엄마를 즐겁게 해 주었었다. 그래서 별명도 ‘퀴리부인’이었다. 그때 지야는 ‘나폴레옹’이었다. 방 속에서도 고사리같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병정놀이를 하면서 재롱을 부렸다.
 지야는 누나가 퀴리 부인된다고 자랑하는 것이 샘이 나서 하루는 이름을 지어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너는 사내대장부니까 나폴레옹 이지 뭐.” 했던 것이 우리 집 꼬마 대장의 간단한 즉석 명명식이 된 셈이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난 일이다.
  우리내외는 퀴리와 나폴레옹의 커가는 모습을 보면 살아오는 동안 안생의 계단을 꽤 많이 기어 올라왔다. 그동안 퀴리는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서 교직에 발을 들여놓아 마담 퀴리보다는 페스탈로치와 인연이 더 가까워졌다. 나폴래옹은 이제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서 대학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어 온 식구가 날마다 마음을 조이고 있다. 우선은 장군코스와는 거리가 먼 공과를 지망하고 있지만.
  퀴리의 이름은 아빠가 지었고 나폴레옹의 작명은 엄마가 한 셈인데 둘이 다 오행도 모르는 아마추어 작명가들이라 애당초 이름에 큰 기대는 안 걸고 있었지만 두 아이들이 가는 길이 이름과는 아주 다른 길을 걸을 것이 뻔하다.
  이제 연아는 어린이들 콧물 씻어주고 지도안 쓰는데 열중하다가 마땅한 자리가 나서기만 기다리면 되겠고 지야에게는 우리 가정 중흥의 건실한 건축가쯤으로 상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집에서 응석받이 노릇만 하던 막내둥이 준이란 놈이 올 봄에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고 의젓해졌다. 아빠를 첫 주자로 해서 누나, 형에 이어서 우리팀 인생계주(人生繼走)의 마지막 주자가 된 셈이다.
  연아나 지야에게는 실로 너무나 거창한 이름을 걸어주었던 것과는 달리 이놈에게는 별다른 이름을 붙여 줄 생각도 않고 두 아이들 그늘에 묻혀서 자라왔다. 그런데 이제 어차피 이 놈에게도 직업이름이건 위인의 이름이건 무언가 하나를 따로 지어서 보이지 않는 호신패마냥 매달아 줄 때가 왔다. 아빠나 엄마 중 누군가가 작명가의 실력을 한 번 더 발휘하지 않으면 안될라나보다.
  며칠 전에는 학교에서 준이의 신상조사서에 장래의 직업이나 희망을 적어내라고 독촉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직 중학 1학년 짜리 어린 아이의 직업을 고르라는 학교 측의 의도가 결코 뼈 있는 다짐이 아닐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급한 다짐에 한참 고소를 지었다. 우리식구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이 마지막 주자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놈에게는 어떤 이름의 코스를 지목해주는 것이 가장 평탄하고 행복한 길일까 하고 생각에 골몰했었다. 우리 모두의 뒤떨어진 계주를 어린 준이에게 기대라도 걸기나 하듯.
  과연 우리 준이에게 어떤 길을 골라주어야 할까? 정치가. 행정가, 은행가, 실업가, 공무원, 외교관, 의사, 법관, 교원, 기술자. 무역업, 신문인, 항공사, 출판업, 농업, 상업, 공업, 예술가, 연예인 ……. 흡사 어떤 인생의 정류장에 서서 멀리 늘비하게 적힌 인생의 행선지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나는 가끔 버스정류장에 서서 행선지의 표지를 바라보면 이상한 착각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여행하는 나그네, 어떤 행선지를 골라서 제각기 떠나야 할, 또 떠나고 있는 승객들이 아닐까하고.  그리고 우리 모두 표를 사서 버스를 타듯이 가벼운 기분으로 평탄한 인생가도를 바르고 안락하게 달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우리 준이에게는 어떤 길을 골라주어야 할까?
  나는 아직도 명상에 잠겨 있고 우리의 차는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인생의 여행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現代文學,1970.4)


                                               장마철

                                                                                                                 
올해는 장마가 좀 늦은 편이었다.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이 근방의 농촌에서는 모내기 실적이 부진한 곳이 많았던 것 같다. 우리 고장의 부면장도 그런 사유 때문에 해직이 되었던 모양인데 나는 전연 그런 사실을 모르고 후임관계로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잠시나마 기분을 울적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발단은 오랜만의 고향 나들이 길에서 생겼던 것이다. 
 며칠 전에 나는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정류소 앞에서 보통학교 후배인 K형을 만났다. 질금거리는 비를 피할 참인데 K형이 앞장을 섰다. 마침 가까운 곳에 다방이 있었다. 이런 촌구석에도 다방이 몇 개나 된다니 이제는 다방(茶房)이 아니라 다방(多房)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몇 패가 질펀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개 인근 마을의 낯익은 얼굴들이다. 볼일이 끝났어도 노닥거리다 보면 밑이 길게 앉아있게 마련이다.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이제는 다방출입이 예사라고 하니 다반사(茶飯事)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자리에 앉자 K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아들 말씀이오 형님…….”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라야 그저 그렇고 그런 일일 터인데 마침 K형의 아들이 우리 학교의 졸업생이어서 화제가 그쪽으로 풀린 것이다. 그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 중이던 아들이 발령이 나서 마음이 놓인다는 얘기서부터 동창인 누구는 분만교사, 보충강사로 어느 학교에 근무 중이고 등등 주로 아들 친구에 관련된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이어서 불쑥 군청의 간부급 중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나는 필경 무슨 부담스러운 부탁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어서 대답을 주저했다. 그러나 30년이나 군청 소재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터에 안면 있는 간부 한두 사람 없다고 해서 납득할 것 같지도 않다. 더구나 의자까지 끌어당기며 자못 진지하게 나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뒷일은 별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간부 중에 제자가 한 사람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 버렸다. 
  나는 최근에 부임해온 어떤 과장을 생각하고 한 말이지만 사실은 이런 데서 내세울 만큼 탐탁한 생각이 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과장은 전에 내가 어떤 중학교에 있을 때의 학생이었는데 과장으로 승진해 왔다기에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치 말투가 친구사이처럼 맞먹으려 드는 것이 아닌가? 
  말버릇이 잘못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나올 수도 있다고 이해는 하면서도 어딘지 탐탁치 않은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또 내가 그 사람을 안다고 들먹였는지 아무래도 경솔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그것이 곤욕의 발단이 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속셈은 모르고 K형은 하여간 '사제지간'이란 말에 큰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 짐작한 대로 K형은 어떤 인사문제에 관해서 나의 도움을 빌리려는 생각이었다. 
  “현재 이곳 부면장이 공석으로 있는데 금명간 후임발령이 날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임으로 가까운 친지인 모 계장이 물망에 올라있는데 지방 유지들도 다 밀고 있으니 그 제자 과장에게 전화나 한 번 걸어 달라”는 것이다. 
  이 정도의 부탁이라면 별로 큰 부담을 주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더구나 물망에 올라있다는 사람은 나도 잘 아는 사람이다. 고지식하고 부지런하기로 잘 알려진 사람이며 중요부서의 계장도 고루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인품으로나 경력으로나 이런 기회에 마땅히 승진할 만한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더구나 지방민들이 다 같이 믿고 있다지 않은가? 나는 전화를 꼭 걸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주무과장이 아니어서 기대는 하지 말라고 다짐도 해두었다. 그런데 전화를 거는 일도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다음날 나는 강의시간의 틈이 나는 대로 일삼아서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늘어졌는데도 과장과는 한 번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번번이 회의 중 아니면 출타 중이란다. 야속스런 생각이 들었지만 받을 사람이 없다는 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환에게 꼬박꼬박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과장이 들어오는 대로 전화를 걸도록 단단히 당부를 해두었다. 그런데 전화는 한 번도 걸려오지 않았다. K형은 금명간 발령이 날 것 같다는 말을 강조했었는데 이러다가는 행차 뒤에 나팔 격으로 발령이 난 뒤에 전화를 거는 꼴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 이튿날 나는 다시 단단히 각오를 하고 전화통을 잡았는데 이번에는 첫 호출이 직통으로 걸렸다. 이쪽이 누구임을 확실히 밝혔는데 저쪽의 응대는 “아! 난데…… 그래서……” 하는 식으로 어조가 별로 달갑지가 않다. 
  나는 갑자기 열적은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끊어버릴까 하다가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친걸음으로 용건을 간단히 말해버렸다. 나는 차분한 기분이 아니어서인지 인적사항에 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설명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나는 상대편의 반응에 큰 기대는 걸지 않았을 것이다. 
  절차는 잘 모르지만 그런 인사가 과장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이런 경우 전화 한 통의 효력이 얼마나 있을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다만 K형과의 약속이 부담이 되어서 이틀에 걸치면서까지 힘겨운 전화를 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남의 부탁은 잡아떼지 못하고 선뜻 약속하고 나선 자신의 나약한 마음이 야속스러웠다. 야속한 약속이라고나 할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인데 저쪽에서 말을 받았다. 과장의 말은 이러한 전화에 대비해서 미리 연습이라도 해둔 것처럼 조리가 정연했다. 이번에 부면장이 직위해제 당한 것은 개인의 과오가 아니라 가뭄 때문에 모내기 성적이 부진한 직책상의 책임을 진 것이다. 해임된 것이 불과 며칠이나 되었단 말인가? 
  이러한 개인의 불운을 동정은 못하나마 기다렸다는 듯이 후임운동을 하고 다니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런 사람은 승진은 고사하고 도리어 견책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자리는 6개월간은 그대로 공석으로 남게 될 터인즉 아무리 후임운동을 한다 해도소용이 없는 일이다. 
  직접 운동의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부질없이 그런 운동에 개입하는 사람도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내 앞에서니 말이지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과장이 말한 요지는 대개 이러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과장은 다소 흥분하고 있는 것인지 시종 높은 억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대화라고 하기보다는 훈계를 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다소 곤욕을 느끼며 부면장이 해직된 경위를 전연 몰랐고 또 이것은 당사자가 직접 부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곡히 말했지만 어조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사실 나는 해직 경위를 전연 몰랐었고 또 K형도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었다. 경위를 알거나 모르거나 약속을 너무 가볍게 한 것은 나의 실수였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리가 정연한 과장의 전화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인사문제로 진정 차 찾아온 지방대표자들에게 주무과장이 타이르는 자리에 그 사람도 자리를 함께 했었고 내가 받은 전화는 바로 주무과장의 훈계내용이었던 것이다. 마침 내가 그 시기를 맞추어서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복창(復唱)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모교의 교사들은 가끔 제자들을 쫓아가서 추수지도(追隨指導)를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일은 가만히 방에 앉아서 제자의 지도를 받은 셈이 되었다. 좌수지도(座受指導)라고나 할는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전화통은 통화의 작동을 완전히 끝냈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한동안 출렁이는 물결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창밖에는 간간이 푸른 하늘이 드러나 있다. 올 장마철도 이제 천천히 물러가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마음처럼 변화무쌍한 구름떼를 몰고서 장마철도 이제 천천히 물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韓國隨筆, 1977)



                                     百合이 피면
                                                                                                                           
이십 평 남짓한 뜨락에 여러 해를 두고 화초를 가꾸었더니 이제는 제법 조촐한 녹지대를 이루고 정원이라는 이름쯤 붙여 보아도 그렇게 무색하지는 않게끔 되었다. 내가 이 집에 이사 온 뒤부터 줄곧 나의 손끝으로 꾸며진 뜨락이다.
  맏딸 연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 통학거리가 가까운 한적한 주택가를 찾는다고 일부러 나는 이 산 밑 마을을 골라온 셈인데 집식구는 주위가 허술하고 골목길이 후미지다고 꺼림칙하게 생각했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탁 트인 시원스런 전망이며 맑은 공기를 강경하게 내세웠었다. 이제는 차츰 둘레에 집도 늘고 앞뜰의 정원이 훨씬 집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 집은 전에 노인 내외분이 단출하게 살던 집이라 간단한 꽃밭하나 꾸미는 것도 힘에 부쳤던지 이삿짐을 풀고 보니 마당가에 애송이 살구나무가 한 그루 외톨로 서 있을 뿐 버젓한 과목이나 꽃나무 한 그루 없는 허전한 뜰이었다.
  체목(體木)도 잘 쓰고 튼튼하게는 세워진 집인데 아침저녁 바라보는 뜨락이 너무 초라했다. 우선 돌을 주워다 둘레를 쌓고 넓은 마당이 소용이 없는 터이어서 구석구석까지 파고는 화단(花壇)을 꾸몄다. 그때부터 줄곧 손에 닿는 대로 값싼 정원수나 꽃나무를 주워 모았더니 차츰 정원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무가 차츰 커서 아담한 정원 구실을 하게 되니 제법 재미가 붙고 또 마음의 여유(餘裕)도 생기는 것 같았다.
  3월의 막바지에 가서 살구꽃이 봄의 첨병(尖兵)처럼 함짝 피고나면 뒤따라서 산당화(山棠花), 개나리, 진달래가 부풀기 시작하고 철쭉, 라일락까지 필 무렵이면 어느새 봄은 반쯤 지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모란, 작약, 장미, 수국, 백합들이 계절따라 차례차례 피어나간다. 꽃들이 계절을 맞춰가며 피는 것인지 계절이 꽃에 맞춰서 찾아오는 것인지 캘린더를 펼치듯 어김없이 피고지는 이 꽃들. 생각없이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바라보면 한없이 오묘한 조화의 질서가 새삼 놀랍다.
  다아원 영감의 자연도태설(自然淘汰說)이나 드볼 아저씨의 돌연변이의 이론도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인원(類人猿)을 조상처럼 모시던 우리 인류도 이제 올바르게 족보(族譜)를 찾아가는 셈인지 모른다. 그러나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과연 조물주(造物主)의 표현 아닌 것이 없을진대 조물주의 본적지를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속 천당동(天堂洞) 영번지(零番地)로 삼는 것은 좀 어떨까? 조물주는 우리 중생을 비롯해서 풀이나 나무 그리고 미물인 벌레 따위에 이르기까지 창조의 힘으로 이루어진 만물 속에 언제까지나 존재하면서 그들을 다스려 나간다는 이 절대 무한의 신앙이 더 실감있게 느껴지는 때가 많다.
  오늘날 과학의 위력을 동원해서 진공관(眞空管) 3천만 개만 쓰면 인간까지도 창조할 수 있다는 어느 과학자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장담은 그것이 조물주에 대한 불경죄로 다루어지기에 앞서 그 무진(無盡)한 조화력을 반중하는 애교로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아량이 있을 것 같다.
  인간은 고사하고 미물의 곤충이나 한 포기 풀, 한 그루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단위가 붙는 한에는 그 창조 또한 조물주의 무궁한 조화력 아닌 것이 없을 터인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창조란 정말 터무니 없는 잠꼬대가 아닌지 모르겠다. 과연 인간의 예지와 인내의 축적(蓄積)인 이 과학의 문이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떻게 이 하나님의  길로 열리는 날이 있을 것인가?
혼탁한 인심에는 아랑곳없이 어느 세월 속에서도 말없이 피고지는 꽃들 ---.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攝理)와 무궁한 시간의 흐름에 견준다면 도시 세속이나 인륜(人倫)은 수유(須臾)에 지나지 않는 것.
  다만 사람들만이 변함없는 세월 속에서 물거품처럼 솟았다가 꺼지는 이 찰나의 점에서 서로 싸우고 시새우고 아귀다툼하고 버티고 아우성치고 까불고 날뛰고 물욕을 탐하고 헐뜯고 물고 늘어지고……. 그 가운데 늙어가며 세월이 덧없음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우리 뜨락의 꽃들이 피고 지는 동안 이 집 주인도 주름살이 어지간히 늘어갔다. 삶에 시달리며 마음을 언짢게 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이 정원의 꽃들은 거친 세파(世波)나 각박한 인심에는 아랑곳없이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또 때가 되면 씨앗을 맺어왔던 것이다.
  어제 오늘 백합 봉우리가 눈에 띄게 부풀어왔다. 이제 머지않아 그 순박한 흰 꽃잎을 수줍은 촌색시의 입술처럼 방긋방긋 열 것이다. 언제 보나 백합에는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처녀의 기품이 있다. 헌칠하게 뻗은 줄기도 다른 꽃들보다 훨씬 시원스럽고 꽃도 모란이나 작약처럼 요염하지 않아서 좋다. 한 잎 한 잎 꽃잎을 열고는 초례청에서 수줍게 절하는 새댁처럼 고개 숙여 서 있는 모습은 백합 아닌 어느 꽃에서도 그 청조한 맛을 느껴보지 못할 것 같다. 실바람이라도 살짝 스치고 지나가면 아련히 눈웃음치며 싱그레 풍겨주는 나리꽃 특유한 그 내음! 이제 머지않아 그 백합의 계절이 다가오는 것이다.
  어느 해 뒷방에 세 들었던 색시가 한 뿌리를 얻어다 준 것을 몇 해를 가꾸어서 찢어놓았더니 소담하게 벌어나갔다.
  작년에는 모처럼 백합이 많이 폈었다. 뜨락이 좁다하게 피어난 백합꽃이 아까워서 평소에 신세지고 있는 지기(知己) 몇 분을 집으로 모셨었다. 살곰히 빚은 머루술 항아리를 기울이며 초라한 자리나마 담담하게 세간사(世間事)를 이야기하며 초여름의 저녁 한때를 즐겼다. 몇 번인가 술잔이 오고가는 동안 얼굴들이 어지간히 붉어져가는 것 같았다. 다들 머루술의 준(峻)한 주기(酒氣)를 들어서 흐뭇하게 이야기했지만 그보다는 아마 백합의 진한 향취에 더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야 원래 권모술수(權謀術數)나 말재주로 한몫 보며 화려한 단상에서 나라의 경륜(經論)을 논하는 정객(政客)의 기질을 타고나지 못했다. 천하를 주름잡는 영웅호걸(英雄豪傑)의 재목은 더구나 아니고.
 다만 어떤 바람이 불었던가 해방(解放) 직후의 흔하게 굴러다니던 감투들을 모두 외면해버리고 교직에 첫 발을 들여놓은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어언 20년이 넘는다. 그동안 다른 길에는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큰 허물없이 오늘에 이른 것만 생각해도 분수에 넘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만 틈틈이 가꿔온 20평 남짓한 조촐한 녹지대(綠地帶)를 그래도 나의 실적인 양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어서 백합이 피면, 정말 빨리 백합이 피면 올해에는 노래(老來)에 고향에서 가업에 골몰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지은 불효나 사죄(謝罪)하면서 느지감치 사람노릇 한 번 하고 싶을 따름이다.
  뜨락에서 풍겨오는 그윽한 내음에 헝클어진 머리나 가다듬으면서 말이다.
                                                                                                                     ( 現代文學, 1967)
 

                                           초여름 밤
                                                                                                                         
 아마 분명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무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으며 길을 걸었으니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집을 나섰다. 마침 고향 쪽으로 가는 버스가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이 지척의 거리에 사시는데도 자주 못 찾아 뵈 온 것이 죄스러웠다. 전번에는 문 밖 출입을 통 못하셨는데…. 날씨만 차면 기동을 거의 못하신 지가 벌써 여러 해째 되신다. 차가 마을 앞 정류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날은 이미 어둠의 장막에 깔려 있었다. 거기서부터 어머님이 사시는 집까지는 초간한 거리다. 소로(小路)를 한식경 걸어야 한다.
 
 도랑길을 지나면 외나무다리가 나서고 그 다리를 건너면 또 냇가의 모래밭이 이어진다. 그 모래밭 길의 끝닿는 곳이 마을의 어귀다. 어디서나 흔하게 보는 시골길이다. 그런데도 이 길은 언제 걸어도 내 마음에 드는 길이다. 발에 익은 길이지만 나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도랑가에 우뚝우뚝 솟은 미루나무들은 어둠 속에서도 훈훈한 바람을 일으키며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나무들 사이를 따라서 한동안 도랑길을 걸었다. 길가의 무논에서는 개구리 떼들이 서로 경연이라도 하듯이 목청을 돋구어서 울어대고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농촌의 조용한 정취를 맛보는 것이 마음에 흡족했다. 별로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이다. 그래서 시골길이 더 좋은지도 모른다. 풀섶에서 쉬고 있던 개구리가 몇 마리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텀벙텀벙 논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낮 같으면 앞 뒷다리를 쪽 뻗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이 귀여운 다이빙 선수들의 애교 있는 폼을 즐길 수가 있을 터인데 어둠 속에서는 그저 소리만 들릴 뿐이다.
  초여름의 총아는 역시 개구리다. 봄과 여름은 그 철바꿈이 싱겁다. 인사성 없는 나그네들처럼 가는 줄 모르게 떠나고 오는 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 봄과 여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상 늦봄과 초여름은 거기가 거기다. 달이나 날을 따져서 금을 긋듯이 봄 · 여름을 가리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그저 개구리가 울기 시작하면 봄이 가고 여름이 온 것으로 생각하면 틀림없다. 개구리 울음소리마저 들을 수 없는 도시생활에서는 늦봄과 초여름을 선뜻 분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정말 여름은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시작해서 매미 울음소리로 절정에 이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봄의 꿀벌, 한여름의 매미, 가을의 뀌뚜라미 그리고 겨울의 기러기를 한몫 주듯이 초여름의 개구리를 놓고 다툴 미련한 친구는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신록의 짙은 가지사이로 훈훈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보리이삭이 익어갈 무렵이면 바로 초여름이자 개구리의 계절이다. 논마다에는 물이 그득하게 고인다. 제철 만난 개구리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물속을 헤치고 다닌다. 그리고 세상의 한(恨)을 도맡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껏 울음통을 터뜨린다. 그러나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결코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니다. 신록의 계절을 즐겨 노래하는 것이 울음소리로 들리는 것뿐이다.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결코 아름다운 가락 속에는 들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아기 보채듯이 성급하게 울어대는 그 귀염스러운 가락은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를 않는다. 거기에 가끔 맹꽁이라도 끼어들어 한몫을 맡고 나서면 이것은 소박한 자연의 교향곡이 아니면 풍물시(風物詩)가 될 수도 있다.
 “개골 개골 개골 맹--꽁! 개골 개골 개골 맹--꽁 개골 개골 개골 맹--꽁….”
  나는 길을 걷는 동안 어느새 정신없이 개구리소리에 말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밤과 나는 하나가 되어 주위는 한결 호젓하게 느껴졌다.
  마을의 농군들은 다 집으로 들어갔는지 인기척 하나 없다. 넓은 들판에는 여기저기 온통 개구리 소리만이 밤의 공간을 메운다. 일자리에서 돌아간 농군들은 아마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서 지금쯤은 곤한 잠에 떨어졌으리라. 어쩌면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른다.언제 걸어도 즐겁기만 하던 이 길이 이제 나에게는 덧없이 슬프고 먼 길이 되고 말았다.
  작년 겨울이었다. 어머님이 자리에 누우신 것은. 가벼운 감기 정도로 생각하고 며칠만이면 일어나시려니 했는데 병세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며칠 사이에 의식을 잃으시고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약석(藥石)의 효과도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워낙 쇠진하신 때문이었다. 읍에서 모시고 나온 의사 선생님에게 희망을 걸어 보았지만 그분의 고명한 의술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진찰을 한 뒤에 절망적인 선언을 하고 돌아갔다. 어머님의 여명(餘命)은 길어야 10일 정도라고. 뵙기에도 딱할 만큼 어머님은 날마다 신고(辛苦)만 계속하셨다. 무엇이 저렇게 어머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괴롭히는 것인가?
  앙상한 어머님의 손을 잡고 체모도 없이 나는 어머니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어쩌면 어머님 생전에 마지막 불러 보는 일일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임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심정으로는 어머님이 70고개만 넘기셔도 한이 없을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나는 어머님을 부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님은 나의 애절한 기원을 알아들으셨는지 입술을 조금 움직이셨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물을 한 모금 잡수셨다. 이 정도의 호전도 며칠 만에 처음 있는 차도였다. 누구의 글이던가. 병에서 회복되는 때처럼 행복스러운 때가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어버이가 다시 살아나시는 때보다 더 감격스러운 때는 또 없을 것이다. 어머님은 기적처럼 차츰 회복단계에 들어가셨다. 그때부터 정확하게 1년하고 3개월 동안을 어머님은 인생의 여백처럼 더 사시고 올봄에 세상을 떠나가셨다. 70의 생신을 거의 혼수상태 속에서 넘기시고 꼭 사흘 만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한껏 바란다는 것이 겨운 1년3개월의 유예를 어머님께 빌어 드린 셈이었다. 그 순간에는 한 달만 서 사셔도 아니 열흘만 더 사셔도 한이 덜어질 것만 같았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후회가 되고 한다. 천수(天壽)가 그뿐이시라면 후회해서 무엇하고 한탄해서 무엇 하랴!
   어머님은 그동안 어렵고 괴로운 연명(延命)을 하신 것이다. 마치 아들의 기원을 의무처럼 부담을 느끼며 억지로 사시려고 무한히 애쓰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어이 아들의 기원을 들어주시고 이 세상을 떠나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님은 봄볕이 쏟아지는 이른 봄날을 가려서 영생의 길을 조용히 떠나셨다. 그날은 지루하고 음산한 긴 겨울이 한꺼번에 풀린 것 같은 따뜻하고 맑은 날씨였다. 구름도 없고, 바람도 없이 개인 날이었다. 한 평생을 착하고 어질게만 사셨던 어머니― 나는 어머님의 아들로서보다도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 훌륭하신 생애 앞에 항상 고개를 숙인다. 어머님의 일생은 결코 화려하고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간구하고 외롭고 고단한 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항상 바르고 성실하고 착하게만 한  평생을 사신 분이셨다. 돌아가시고 나니 더욱 높은 덕이 우러러 뵈는 어머니!
  어떻게 붓끝이 가는 대로 생각이 흘러가다 보니 여기까지 지나치고 말았다. 나는 지금 이 적막한 밤에 어머님을 조용히 불러보면서 언젠가 개구리 소리 들으며 도랑길을 걷던 초여름의 밤길을 다시 한 번 머리속에서 그려본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에 자주 못 가 뵌 것이 한스럽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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