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끝내 낯설다. 숙소에서 바라본 검푸른 새벽 바다는 움직임이 없다. 물꽃 없는 바다는 꽁꽁 언 호수처럼 기이하게 느껴진다. 장시간 여정에도 두 눈은 어김없이 묘시에 떠진다. 잠에 취한 일행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일어난다. 주위를 둘러봐도 뜨거운 커피를 담을 용기가 없다. 전기 포트에 커피를 쏟아붓고 손에 쥔다. 뇌리에 내내 그렸던 한 폭의 그림처럼 한가한 백사장에 자리한다.
명사십리 바다는 남다르다. 동해의 격한 파도를 꿈꾸지 마라. 적요한 섬처럼 파도도 수굿수굿하다. 걸음에서 고운 모래 소리가 청각을 깨운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 숙여 바닥을 살피며 걷는다. 신은 무의식 속에 일어나는 감정과 속내를 읽은 듯 발밑에 선물을 내놓는다. 속살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별불가사리류인가. 꽃무늬가 그려진 도자처럼 말끔하여 신기한 듯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바닥에 새겨진 무늬 형상에 꽂힌다. 밀물이 백사장에 그려놓은 물길이 마치 나무처럼 보인다. 시선을 확장하니 잎을 떨군 나목들이 즐비하다. 한여름 바닷가에서 나목을 만나니 묘한 기분이 일어난다.
일명 파도를 먹고 사는 나무이다. 백사장에 밀물 썰물이 무시로 오가며 물길을 낸 나무 형상은 파도가 빚은 흔적이다. 바닥에 남긴 물길은 파도의 강약에 깊이가 굵거나 가늘게 미세하게도 그려진다. 물길은 파도가 강하면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육지의 나무는 나이테를 보고 수령을 헤아릴 수 있으나, 파도를 먹고 사는 나무는 나이를 알 수가 없다. 매일 들고나는 파도에도 나목은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밀물이 달려온다. 나무는 바다가 주는 대로 파도를 삼키고 있다. 바닥에 핀 물꽃은 잦아들거나 이내 제자리로 돌아간다. 나무는 작정하고 바닷물을 먹고 있는 듯하다. 먹는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리 생각하니 인간은 말을 먹고 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잠들기까지 수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다. 쏟아낸 말을 호주머니에 아니 상자에 주워 담는다면, 말의 무게는 어느 정도 될까 궁금하다. 문장을 퇴고하며 매번 느끼는 것이 있다.
머릿속에 담아 둔 언어를 백지에 펼쳐 놓으면 문자가 어마어마하다. 무엇보다 온몸에 이렇게 많은 언어를 품고 하중을 이겨내는 육신이 위대하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니, 언어는 공기보다 가벼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마른 자가 늘어놓는 언어를 떠올리면 그것도 아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말과 불만을 늘어놓아 판단을 흐리게 하는 말은 상대에게 책임져야 할 무게가 상당하다. 우리는 자기 몸속에 언어를 파먹고 사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나이가 들어가니 말을 하는 것보다 듣고 있을 때가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여하튼 언어는 말로 꺼내든 백지에 내놓든, 말하는 본새와 글 쓰는 품새에 적당한 조율이 필요하다.
다시금 물길을 살핀다. 파도만 먹고 사는 나무라고 생각하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순간 짠물이 나무를 와락 덮친다. 파도의 극성에 물의 매를 숱하게 맞고 있다. 나무는 온몸을 짠물로 무시로 헹구니 고순도의 경지에 다다랐으리라. 어쩌면 나무는 변화와 처세술에 능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무도 인간이 생활하며 느끼는 고통처럼 외력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겪으며 파도에 기꺼이 순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무는 물의 맷집과 짠물의 역사를 지닌 물줄기이다. 물길을 바라보며 모순투성이인 언어와 감정을 정련하는 시간이다. 나는 섬에 오기 전까지 두 갈래 길에서 갈등으로 편치 않았다. 섬에 도착하니 정작 바다를 즐기는 언어와 마음의 갈등은 진심이 아닌 듯 어정쩡하다. 여하튼 ‘말은 아끼고, 뜸을 들여야 하고, 말미를 둬야’한다고 했던가. 진리는 생활 속 처처에 놓여 있다. 파도는 나의 상념과는 다르게 해안에 나무를 새기느라 열일 중이다.
기다림은 꽃이 되고 / 이 은 희
꽃그늘 아래에서 서성거린다. 푸른 하늘에는 크림색 꽃송이가 가득하다. 마치 꽃등을 켜놓은 듯 환하다. 순간 바람결에 꽃잎이 흔들리며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다. 이렇듯 향기를 뿜는 꽃등이 어디에 또 있으랴. 꽃등이 저절로 켜진 것은 아니다. 꽃들이 온 우주의 기운을 담아 하늘을 수놓은 덕분이다. 아니 꽃의 여신은 겨우내 빈 가지에 털북숭이 꽃봉오리를 피우고자 수백 일 그리워했으리라. 목련화 하늘을 목 놓아 기다린 끝에 닿은 것이다.
꽃그늘 아래 서니 고흐의 ‘아몬드 꽃’이 떠오른다. 고흐도 나처럼 꽃그늘에 들었으리라. 잎도 없는 나뭇가지에 흐드러진 흰 꽃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렌즈의 초점을 맞춘다. 눈물이 날 정도로 푸른 하늘을 수놓은 무량한 꽃들에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우윳빛 꽃송이가 시야를 흐리고, 은은한 꽃향기가 숨겨둔 무의식 속 심연을 건드린 듯하다. 꽃의 초점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잡히질 않는다. 목련화로 수놓은 하늘과 유화로 그린 아몬드꽃 그림은 몽환적 분위기로 이끈다.
명작 「아몬드 꽃」은 반 고흐(1853∼1890)가 죽던 해에 동생 테오의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그린 작품이다. 아이가 태어나자 삼촌이 된 고흐는 조카가 생긴 기쁨에 꽃 그림을 그려 선물하였단다. 그림에 조카를 기다리는 진정한 마음이 담겨 그런가. 아니면 고흐의 애정이 전이되었던가. 그림 속 맑은 하늘색을 좋아한 조카는 청년이 될 때까지 이 그림을 침실에 걸어두고 보았단다.
남프랑스의 아몬드꽃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이끌리듯 뇌리에 자리 잡은 꽃이다. 아몬드꽃의 느낌을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손에 잡히지 않는 애잔함이 서린 ‘그리움’이라고 말하련다. 꽃의 슬픈 전설을 알고 있어선가.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데모폰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필리스와 슬픈 사랑의 이야기이다. 필리스는 집에 다녀온다는 데모폰을 기다리다 지쳐 숨을 끊는다. 지독한 그리움의 결정체인가. 그녀를 묻은 자리에서 아몬드나무가 아름드리 자라난다.
사랑의 신은 참으로 얄궂다. 데모폰이 돌아와 그녀를 찾으나 그 자리에 아몬드나무만 우뚝 서 있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인 양 나무에 입을 맞추니 봇물이 터지듯 가지마다 꽃잎이 하얗게 돋아났단다. 반 고흐가 그린 아몬드나무 꽃처럼 피어나 더욱 그녀가 보고 싶어 애달팠으리라. 필리스가 사랑하는 데모폰을 목 놓아 기다리고, 고흐가 태어날 조카를 기다리듯 막연한 그리움이 낳은 기다림의 꽃이다.
꽃은 참으로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낳는다. 정녕코 한 송이 꽃을 피우는 데는 많은 시간과 고통이 따른다. 시린 동토에서 새싹이 돌올한 모습이나, 고목 나뭇가지에서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는 형상을 본 사람은 알리라. 자연의 몸짓은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품게 한다는 것을. 돌아보니 헐벗은 나목에 등불처럼 꽃을 피워 주위를 따뜻하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위인이 여럿이다. 정신적 아픔과 처절한 삶의 역경 속에서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고흐도 그중 한 사람이다. 태어날 사랑스러운 조카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행복했으리라. 정녕 기다림은 그리움을 넘어 꽃이 되고, 그 기다림은 명작을 낳는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삶일지라도 잠시 잠깐 자연이 낳은 명작에 마음을 주길 바란다. 털북숭이 겨울눈으로 수백 날 인내와 기다림으로 꽃을 피운 나무. 꽃의 우아한 몸짓을 바라보며 고통을 이겨내길 비손한다.
온 누리가 결결이 봄꽃으로 맑고 향기롭다. 눈앞의 꽃 세계는 겨울이란 힘겨운 계절을 참고 버티고 이겨낸 선물, 삶에 의지의 결실이다. 막연한 그리움이든, 기다림이든 가슴에 품어보길 원한다. 그 대상이 꽃이든 인간이든 다 좋으리라.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것’ 하나쯤은 가슴에 품어야 헛헛하지 않으랴. 부디 자신만의 아늑한 꽃그늘을 만들어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