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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눈 / 내 그림자에게 ㅡ 법정스님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3. 3. 18.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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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눈 / 법정스님

 

 선가에 '목격전수(目擊傳授)' 라는 말이 있다. 입 벌려 말하지 않고 눈끼리 마주칠 때 전할 것을 전해준다는 뜻이다. 사람끼리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것도 사실은 언어 이전의 눈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은 설명하고 해설하고, 또 주석을 달아야 하는 번거로움과 시끄러움이 따르지만, 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마주 보면 이내 알아차릴 수 있고, 마음속까지도 훤히 들여다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는 소리내는 말 보다도 오희려 침묵의 눈으로 뜻을 전하고 받아드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눈은 어디까지나 '창문'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의 빛이 눈으로 나타날 뿐, 그렇기 때문에 창문인 그 눈을 통해 우리들은 그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눈길에서 우리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느끼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초점을 잃고 몽롱하게 흐려 있는 눈, 출세를 위해 약삭빠르게 처신하느라고 노상 흘깃 흘깃 곁눈질을 하는 눈, 앉은 자리가 편치 않음인지 불안하고 초조해 하는 눈, 자기 뜻에 거슬리면 잡아먹을 듯 살기 등등한 그런 눈을 대할 때 우리는 살맛을 잃는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오만하고 차디찬 눈초리는 그래도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디에 호소할 길마저 없는 사람들의 그 불행한 눈만은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다.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굽어보는 그 눈이 우리들의 양심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컷 부림을 당하다가 아무죄도 없이 죽으러 가는 소의 억울하고 슬픈 그 눈을 보라. 그러나 쇠고기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사람들은 그 눈이 표현하고 있는 생명의 절규를 읽어 내지 못한다. 나만 맛있게 잘먹고 잘 살면 그만이니까.

 생떽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서 조종사인 한 사나이는 비행기 사고로 조난을 당한다. 그는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먹지도 못한 채 며칠을 걷다가 쓰러져 가물가물 사경을 헤맨다. 그때 문득 아내의 얼굴이,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라디오 앞에서 자기가 살아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그 눈들이 떠오르자, 이제는 자기 자신이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를 기다리며 떨고 있는 그 눈들을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이 자기 손에 달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마침내 그들 곁으로 돌아간다. 아내와 친구들의 맑은 눈이 그를 살려낸 것이다.

 맑고 선량하고 고요한, 그래서 조금은 슬프게 보이는 눈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일 수 있다.

 10여 년 전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수녀님의 눈을 나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그 눈길과 마주쳤을 때 내 안에서는 전율 같은 것이 일어났다.

 그것은 아득한 전생부터 길이 들어 온 침묵의 눈이었다. 그 눈은 밖으로 내닫기만 하는 현대 여성의 들뜬 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안으로 다스리는 맑고 고요한 수행자의 눈이었다. 진실한 수행자의 눈은 안으로 열려 있다. 내면의 길을 통해 사물과 현상너머의 일까지도 멀리 내다볼줄 안다.

 그때의 그 눈길이 때때로 나 자신을 맑게 정화시켜주고 있다.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는 말은 조금도 빈말이 아닐 것 같다.

 

                                                     내 그림자에게 / 법정스님

 

 한평생 나를 따라다니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내 삶이 시작될 때부터 그대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햇빛 아래서건 달빛 아래서건 말 그대로 '몸에 그림자 따르듯' 그대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니 그대와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동반자다.

오늘은 그대에게 내 속엣말을 좀 하려고 한다. 물론 전에없던 일이다. 그대도 잘 알다시피 내 육신의 나이가 어느덧 70을 넘어섰구나. 예전 표현에 의하면 사람의 나이 일흔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고 했다. 고희古稀라는 말을 남의 일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내가 그 앞에 마주서게 되었다.

요즘에 와서 실감하는 바인데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남은 세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허락된 남은 세월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따라서 내 삶을 추하지 않게 마감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혼자서 살아온 사람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남은 세월이 다할 때까지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늙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면 그 인생이 초라하게 마련이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것은 젊은만이 아니다. 늙어서도 한결같이 자신의 삶을 가꾸고 관리한다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 화사한 봄의 꽃도 좋지만 늦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에 피는 국화의 향기는 그 어느 꽃보다도 귀하다.

자기 관리를 위해 내 삶이 새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누구보다도 그대가 잘 알다시피 내 삶의 자취를 돌아보니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대중 앞에서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너무 많이 쏟아 놓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침묵의 미덕과 그 의미를 강조해온 장본인이 침묵보다 말로 살아온 것 같은 모순을 돌이켜 본다.

 

지난 가을 지방 순회 강연 때 이번이 내 생애에서 마지막 순회 강연이 될 거라는 말을 흘렸는데 이것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생각이 있어 예고한 말이었다.

길상사에서 짝수 달마다 해오던 법회도 내년부터는 봄, 가을 두 차례만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절 소임자에게도 미리 알려두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지상에서 내 자취가 사라진다면 가까운 이웃들에게 충격과 서운함이 클 것이므로 그 충격과 서운함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서서히 물러가는 연습을 해두려고 한다.

그리고 달마다 쓰는 그런 글도 좀 달리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가를 돌아보니 내가 그동안 쓴 글들이 번역물을 포함해서 서른 권 가까이 되는구나. 말을 너무 많이 해왔듯이 글도 너무 많이 쏟아 놓은 것 같다. 세월의 체에 걸러서 남을 글들이 얼마나 될지 자못 두렵다.

말과 글도 삶의 한 표현 방법이이기때문에 새로운 삶이 전제됨이 없이는 새로운 말과 글이 나올 수 없다.
비슷비슷한 되풀이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선감이 없는 말과 글은 그의 삶에 중심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할 수만 있다면 유서를 남기는 듯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읽히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삶의 진실을 담고 싶다.

옛글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나이 칠십에도 어떤 직위에 있는 것은 통행금지 시간이 되었는데도 쉬지 않고 밤길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그 허물이 적지 않다.' 이 구절을 나는 요즘 깊이 음미하고 잇다. 요즘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참으로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정년이란 있을 수 없다. 생의 마감인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그 개인에게는 현역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정년제는 합리적이다. 새로운 세대들이 지출함으로써 그 조직이 활성화 될 수 있다. 묵은 것과 새것이 교체됨으로써 새롭게 이어갈 수 있다.

우리 나라 모든 조직에는 정년제가 행해지고 있는데 정치인과 스님들만 예외다. 정치인들은 자기네가 법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노탐老貪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추한 정치인들이 더러 있다.

수행의 세계에는 물론 정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직위에는 반드시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이 많은 늙은 줄이 어떤 직위에 있다는 것은 더 물을 것도 없이 추하다. 목사와 신부도 70이 정년이므로 때가 되면 현직에서 물러나 은퇴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을 벌이다 보니 나는 본의 아니게 '회주會主'라는 관사를 내 이름 위에 붙이게 되었다. 회주스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회장님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속으로는 언짢았다. '맑고 향기롭게' 에서 적당한 직책이 없어 상징적인 의미로 모임의 주관자란 뜻에서 회주라는 이믈이 생겼지만 일찍이 없던 호칭이다. 길상사의 경우도 그렇다. 절은 주지에게 모든 책임이 주어져 있다. 회주는 불필요하다.

맑고 향기롭게가 됐건, 길상사가 됐건 내가 들어 시작한 것이므로 끝까지 뒤바라지할 책임이 내게 있다.
맑고 향기롭게는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길상사는 대중의 한 사람을로서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뒤에서
도울 것이다. 회주라는 이름은 수행자에게 욕된 호칭이므로 아무도 입에 담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남은 세월 동안에도 나를 낱낱이 지켜볼 그대에게 내 진실을 쏟아 놓았다. 내 남은 삶을 추하지 않고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한 말이니 그대로 받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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