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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그림자 / 지팡이 ㅡ김 규 련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3. 3. 16.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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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그림자 / 김 규 련

 

 봄은 천지의 기를 뚫고 나오는 것일까.

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온기가 돈다. 누리 가득한 초목의 새싹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입술 같은 봄이 얼굴을 뻘쭘히 내민다.

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수달래… 온갖 꽃들이 향기를 흩뿌려 남아 있는 냉기를 밀어낸다. 산새며 들짐승이며 사람들, 모든 생령들이 생기를 얻어 저마다의 몸짓에 힘이 넘친다. 마침내 초록 빛깔이 밀물마냥 번져와 온 산야를 물들였다.

나는 신록이 향연을 펼칠 때와 갈잎이 귀토의식을 마감할 무렵이면 광기를 참다못해 팔공산에 오른다. 산허리를 감도는 순환도를 따라 파계사 방향으로 걷고 있다.

오늘은 일요일. 상춘객과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웅장한 신록의 바다와 풋풋한 내음, 뛰어난 산세의 위용과 신묘한 산정기, 사람마다 눈빛이 빛나고 미소 짓는 밝은 표정들이다.

풍진 세상에 살면서 시달리고 들볶이고 부대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불안, 근심, 좌절, 분노, 얼룩진 마음을 모두 벗어놓고 산에 온 까닭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자신들의 영혼을 봤기 때문일까.

등산복 차림의 젊은이 한 무리는 떠들썩 노래를 흥얼거리며 능선을 향해 오르고 있다. 가족끼리 온 사람들은 햇볕에 앉아 도시락으로 마음에 점을 찍고 있다. 늙은이들은 숲속 광장에서 팔을 흔들며 거닐다 심호흡을 즐기고 있다. 이방인 몇 사람은 찬란한 한국의 봄에 경탄하듯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는가.

나는 후미진 계곡, 바위에 올라 숨결을 고르고 있다. 비로소 나무 잎새들이 흔들리는 소리며 미세한 벌레 소리며 물소리가 들려온다. 산새들의 지저귐은 연신 빗물처럼 쏟아져 내리고 윤기 반들거리는 신록에선 녹즙이 뚝뚝 듣는 것만 같다.

힘이 없으면서 하지 아니함이 없는 대우주의 섭리를 감지해 보려고 마음을 연다. 말함이 없이 아니하는 말이 없는 만물의 무언설법을 들어보려고 심이心耳를 찾아본다. 문이 없으면서 깨달음의 문이 처처에 있음을 모르는 나의 우둔을 개탄한다.

봄은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희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봄에도 그늘이 있고 그림자가 있으리라. 봄이면 그리움 때문에 슬프고 아프고 서러운 사람들도 있다.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영상이 동공에 어린다. 어느 해 봄, 깊은 밤에 퇴계선생이 매향에 취해 잠 못 들고 집 뒤란을 거닐다 저만치 맏며느리 방에 불이 밝혀져 있음을 본다. 가까이 다가가자 소곤소곤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 야심한 밤에 홀로 있는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본다.

짚단을 뭉치고 천을 입혀 만든 남편의 형상을 앉혀두고 술상을 차려놨다.

"무정한 사람, 무심한 사람. 꽃 같은 나를 혼자 남겨 두고 그대 먼저 먼 길 떠나다니.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어떡하라고. 이 야속한 사람아, 매정한 사람아…" 흐느끼면서 술을 따르고 있지 않는가.

퇴계선생은 울컥 목이 메었다. 윤리가 뭣이기에, 도덕이 뭣이기에, 젊디젊은 청상을 밧줄로 묶고 옥에 가둬 평생 수절의 고통을 안겨준단 말인가.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다. 다음날 사돈을 모셔 와서 거부하는 것을 억지로 뿌리치며 며느리를 친가로 보내준다. 그리고 개가의 길을 열어줬다. 자유롭게 열려 있는 요즘 세상에도 이런 비극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절집을 돌아보고 내려온다. 금강경을 요약하고 압축해서 한 글자로 표현하면 '비非'자가 된다고 설파한 어느 선지식 모습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마을 옆을 지나오다 큰 똘배나무를 본다. 떨어져 있던 꽃잎들이 바람에 쓸린다. 다음 순간 불현듯 눈앞에 환상이 나타난다.

옷자락 붙들고 울며 놓지 않는 정인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머뭇머뭇 멈칫거리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한 풍류객이 있다. 그는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요 여인은 부안扶安의 명기 매창梅窓이 아니던가. 기약 없이 떠난 임은 임진왜란이 거의 끝나가는 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님 그리워 눈물짓던 그녀는 사무치게 애틋한 시를 남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의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황홀한 이 봄에 떠나 있는 님을 연모하는 마음, 타국에서 일하는 약혼남을 기다리는 마음, 이국에 억류된 남편이 풀려나기를 기도하는 마음, 이런 안타깝고 애절하고 절박한 마음을 헤아려 본다.

하산하다가 무심코 뒤돌아본다. 푸른 산은 여여한데 웬일일까 뜻밖에 로마의 교외 짙은 숲이 떠오른다. 그 숲에서 한 쌍의 남녀가 사랑을 속삭인다.

"우리는 별에서 내려와 여기서 만났군요."

"그대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키스로 잠 깨운 데지레 왕자님입니다."

남자는 독일의 젊은 철학자 니체요 여자는 독일계 러시아 장군의 딸 루 살로메이다. 그녀는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신학을 공부하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당시 유렵의 신여성이 아닌가. 뜨거웠던 사랑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들은 헤어진다. 사람의 감정은 대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에 의한 것이고 그 효력은 1년 6개월 지속된다고 했던가.

루 살로메는 그 후 여러 명망가의 가슴을 전전하다 장미 시인 릴케를 만난다. 니체는 상처를 크게 입고 평생을 독신으로 산다.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 한 분이 사련邪戀으로 인생을 망가뜨리는 아픔이 겹쳐 보인다고 할까.

봄날은 거침없이 가고 있다. 청춘도, 꿈도 사랑도 가고, 절망과 비애도 간다. 흘러가는 것이 어찌 이것들뿐이랴.

봄의 그림자도 가고 말 것이다.

                                     

 

                                                         지팡이 / 김 규 련

 

 산에 오를 때 지팡이는 힘이 된다. 가파른 산에선 더욱 그렇다.

나는 오늘도 지팡이를 짚고 산에 오르고 있다. 쿵쿵 지팡이를 짚고 걸으니 발이 한결 가볍다. 내려올 때는 지팡이가 큰 의지가 되리라.

한줄기 바람이 지나간다. 잇따라 낙엽이 쏟아져 흩날린다. 여름 한철 그토록 무성하던 잡초들은 마른 잎으로 땅 위에 누워 있다. 산에 있는 온갖 나무들은 저마다 기도의 자세로 묵묵히 서 있다. 늦가을 산중의 적막을 뚫고 지나가는 산행은 차라리 구도행각 같다고나 할까. 나는 지팡이가 연신 땅에 부딪치는 소리에 마음을 모으고 무심으로 걷고 있다.

한순간의 무심을 무심이라 생각하는 찰나에 마음의 바다엔 온갖 상념의 물결이 인다. 지팡이를 짚고 지구 한 모서리를 걷고 있는 자화상이 눈앞에 일렁인다. 가는 인연을 붙들지 말 것이다. 오는 인연을 막지도 말 것이다. 없는 인연을 구하지도 말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리라는 스스로의 다짐이 물이랑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힌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모으려고 지팡이 소리에 마음을 집중시켜 본다. 구름이 서서히 걷혀간다. 햇빛이 비춰온다. 얼마나 걸어왔을까. 잠깐 나도 잊고 산도 잊었다. 걸어가는 동작이 있을 뿐, 주관과 객관이 둘 아닌 하나의 경지를 한순간 지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한순간의 무심은 어렵잖게 체험한다. 허나 일상생활을 무심으로 지속하기란 지난의 일이리라.

갑자기 내게 지팡이를 준 옛 동료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들은 내게 지팡이와 함께 마음의 지팡이도 줬던 것이다.

십여 년 전 직장 동료들이 금오산에 갔다 오며 묘하게 생긴 싸리나무 가지를 주워왔다.. 그것을 다듬고 손질해서 지팡이로 만들어 내게 선물한 것이다. 큰스님들의 주장 비슷해서 웃으며 그냥 받아뒀다. 오늘에 이르러 이 지팡이가 나의 내면세계의 길잡이까지 할 줄이야.

지팡이 소리도 화두가 되는 것일까. 어떤 스님은 무심 공부를 위해 ‘이뭣꼬’를 화두로 잡고 평생 동안 정진한다고 했다. 어떤 성직자는 절대자의 뜻을 받들고 순종함으로써 무심을 배운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들숨 날숨 호흡을 하는데 마음을 모아 무심 공부를 한다고 했다.

무심이란 무엇일까. 마음을 비운다는 뜻일까. 마음을 비우자면 우선 뭣인가에 걸려 있는 마음부터 끊어야 된단다. 많은 사람들이 눈만 뜨면 먼저 차지하려 하고, 많이 차지하려 하고, 오래 차지하려 하는 재물, 명예, 권세 등 온갖 가치를 훌쩍 뛰어넘어 마음이 자유로워야 된단다. 파도처럼 금시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 많은 상념들, 헤아리고 따지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의식작용에서 벗어나야 된단다. 무심이니 유심이니 상대적이니 절대적이니 또한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관념에서 초월해야 된단다. 생사에서 풀려나온 언어 이전의 자리에 와 있어야 된단다. 그리하여 이것이 무심이구나 하면 이미 무심이 아니라고 한다. 무심이라 생각하는 그 마음마저 끊어버린 자리가 곧 무심이란다. 무심은 단지 무심이어야 한단다.

무심에도 여러 경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은 달이 밝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 눈. 부질없는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 인생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것을.’ 이렇게 무애가를 노래하며 산수를 벗 삼고 한 생을 초연히 살아가는 무심이 있다.

신라 진흥왕은 화랑도를 창설하고 가야를 정벌했다. 국위를 떨치고 여러 곳에 순수비를 세워 백성들로부터 추앙도 받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왕위를 버리고 법운(法雲)이란 이름의 중이 되어 운수 행각을 즐겼다.

대청제국의 태종 순치 황제(順治 皇帝)는 오랜 전쟁 끝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생사여탈의 권력과 부귀영화는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말년에 권좌에서 빠져 나와 산골짝 숲 속의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신분을 감추고 사찰의 잡일을 하는 부목(負木)이 되었다. 이들도 무심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마음만 바꿔먹으면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돌보고 부양하며 고생을 자청해서 하는 무심도 있다. 소록도로 건너가 문둥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치료하고 보살피며 일생을 마치는 무심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악명 높은 생지옥이었다. 수감자 한 사람이 탈출하면 십 명의 재소자를 감방에 수감해서 굶겨 죽였다. 한 번은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다. 나치 군대는 닥치는 대로 잡아 열 사람을 선발했다. 그 중 폴란드 레지스탕스 출신의 한 사나이는 고향에 살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 때문에 죽을 수 없다며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반발했다. 처절한 이 상황에서 대신 죽기를 간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주교 신부 콜베였다. 그는 담담하게 감방으로 끌려가서 공포에 떨고 있는 아홉 사람을 위로하며 함께 죽어갔다. 한 사람의 절박한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편안하게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무심도 있다.

마음이 무심의 자리에 머물게 되면 참된 안락, 손에 쥔 천하를 탁 놔버리는 용기, 순수한 헌신, 거룩한 살신이 가능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무심이 되면 꿈에서 깨어난 듯 자아의 본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 만사며 우주의 실상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실없는 망상이 너무 깊었다. 저 멀리 낙동강은 유유히 흐르고 하늘은 여여하다. 소나무들이며 나목들은 제자리에서 말이 없다. 낙엽처럼 흩날리는 마음을 다시 모아 보려고 지팡이를 쿵쿵 짚으며 산을 돌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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