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생각하기’의 문학적 상상력 / 한 상 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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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상상력은 일종의 감수성이다. 여기 감수성이란 미적 대상에 대한 인식을 위한 기본 능력, 외계의 자극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작가는 이런 감수성을 통해 발견한 소재의 이미지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깨우치게 되는 동기와 계기를 갖게 된다. 즉 자신의 체험과 이상을 작품 속에 구체화하기 위해 상상력의 기능에 의존한다.
이런 상상력의 기능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세계 즉 지각에도 없고 기억에도 없는 새로운 세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이다. 예술이 현실의 단순한 모방보다는 새로운 표상을 제시하는 영혼의 감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영감(靈感)이나 직관과 비슷하다. 둘째로, 체험을 표현하는 의식의 한 양식으로서의 기능으로, 칸트는 감각적 지각의 자료들을 사유 속에서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떻든 상상력이란 작품을 이루게 하는 정신적 능력을 말한다. 시에서의 이런 창조적 상상력은 새로운 지각과 낡은 체험을 결합하여 직관처럼 순식간에 새로운 체험을 얻고, 다시 반복되는 상상작용을 통하여 이를 결합하고 종합하여 한 편의 통일체로 작품을 완성시키게 된다. 특히 소설에서의 상상력은 무한히 펼쳐지며, 체험 중심의 수필에서도 이런 상상력은 수필의 일상성을 벗어나는 길이 될 것으로 보아 상상력의 발현을 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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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문학에서만이 아니다. 최근 광고의 이미지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이 이런 상상력이다. 광고 속에는 다분히 에로티시즘적인 이미지가 사용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광고제작사인 BBDO가 만든 ‘르판체스코 비아시아’란 핸드백 광고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 광고는 핸드백의 지퍼가 열리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음 직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여성의 성기와 결부시켜 상상력이 엉뚱하면서도 탁월하게 나타나고 있다. 깊은 동굴의 문이 열리듯 핸드백의 지퍼가 열린다. 그런가 하면, 영국 런던의 사치&사치에서 시작한 에로틱숍 ‘코코드메르(co co de Mer)’ 광고는 양배추를 통해 여성의 성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부엌에서의 판타지란 카피가 첨부된 이 광고는 양배추의 잘린 단면에서 여성의 성기 형상을 추출해 내는 에로틱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일종의 합법적인 포르노라고나 할까. 실체를 보여 줄 수 없는 메타포를 빌려 온 듯 은밀하고 내면적일수록 까발리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상상력의 탁월함에 놀라게 한다. 이런 경향은 전통적인 고전주의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발휘되고 있다 하겠다. ‘다르게 생각하기’의 좋은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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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엔 바캉스가 6월인가 보다. 피에르 뤼브롱도 바캉스를 맞이하여 그 동안 모아 둔 돈으로 바캉스를 떠난다. 그의 여행은 특이하다. 시간으로의 여행이다.
그는 전문 여행사를 찾아간다. 그가 꿈꾸던 루이 14세 시대로 여행하기 위해서다. 여직원은 그에게 등록 서류를 작성하도록 부탁하며 “예방접종은 다하신 거죠?” 하고 물었다. 1666년에는 여러 가지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은 그 밖에도 주의사항이 많다.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미래에 관한 정보를 주어서는 안 된다든지, 혹 신상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키를 눌러 돌아올 날짜를 입력한 다음 확인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리고는 곤경에 처할 경우 구조반을 보내기 위한 템푸스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태껏 보험 안 들고도 아무 탈없이 잘 다녔는데, 시간 여행이라고 해서 뭐 다를 게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보험에 들지 않는다.
드디어 루이 14세 시대풍의 옷을 입고 시간 여행을 떠났다. 파리 1666년으로. 온 도시에 지린내가 진동하고, 파리떼가 득시글거리는 도시는 쓰레기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 오염물질로 만연했다. 좁은 거리에는 쥐와 돼지들이 먹이를 찾느라 뒤지고 다녔다. 현대문명 도시의 모습과는 판이했다. 오염물 처리라든가, 쓰레기 수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떠나온 세상이 단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
교수대가 설치된 광장을 지나 묵을 곳을 찾기 위해 골목으로 들어섰다. 파리떼를 끌어들이는 건 비단 사람의 똥과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백정들의 거리’라는 팻말 아래 입을 헤 벌린 사람이 누워 있다. 그가 행인들을 향해 “기마 경찰대를 부르세요!”라고 소리치자, 남자가 그에게 일격을 가했다. 깨어 보니 젊은 여자가 그에게 지혈대를 대어 주고 있었다. 가방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현재로 돌아갈 때 사용할 기계가 든 가방이었다.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치더니 그를 ‘마법사’로 고발, 그는 투옥된다.
여기로 바캉스를 왔다가, 운수 사납게도 길에서 강도를 만났어요.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나도 잘 이해를 못하겠는데, 어쨌든 여기 사람들이 나를 이 감방에 처넣었어요.
―열린책들, 『나무』, 51쪽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현재로 돌아갈 수 있는 기계조차 잃어버린 그는 이제 시간 속에서 미아가 된 셈이다. 보험에 들지 않은 일을 후회해 봤자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비로소 그는 보험에 가입할 것을 서약한다. 사형집행인인 앙셀름 뒤프레가 “피에르 뒤불롱의 묶여 있는 손에 2000이라는 수가 나타나 있는 빨간 기계를 내려놓았다. 피에르는 버튼을 누르면서 맹세했다. 템푸스 보험이든 뭐든 시간 여행 보험에 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다시는 시간 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나무』는 18편의 이야기. 아니 일련의 심각한 질문, “인간은 파국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를 묶어 놓은 지식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가정을 극단으로 몰고 갔을 때의 결과를 보여 준다. 베르나르 특유의 유머를 곁들여 친근한 어조가 우리를 환상과 사색의 공간으로 이끌어 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만을 가지고 20년을 보내고, 또 그를 소재로 소설을 쓰겠다고 12년을 컴퓨터와 씨름해, 끝내 세계적인 화제작을 낳았다. 그는 한마디로 ‘다르게 생각하기’로 색다른 소설을 쓴 신세대 이야기꾼일 것이다. 창조적 기지, 경이로운 상상력, 치밀한 과학적 탐구, 섬뜩한 미스터리, 짜임새 있는 형식이 바로 『개미』와 『타나토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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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개봉된 영화에 「아일랜드」가 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웰즈의 『타임머신』이나 헉슬리의 『훌륭한 신세계』에서 이미지와 상상을 빌려 오지 않았나 여겨진다. 지구상에 일어난 생태적인 재앙으로 인해 일부만이 살아 남는 21세기 중반. 자신들을 지구 종말의 생존자라고 믿는 링컨 6-에코(이완 맥그리거 분)와 조던 2-델타(스칼렛 요한슨 분)는 수백 명의 주민들과 함께 부족한 것이 없는 유토피아에서 빈틈없는 통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몸 상태를 점검받고, 먹는 음식과 인간관계까지 격리된 환경 속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 지구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희망의 땅 ‘아일랜드’에 추첨이 되어 뽑혀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어린애를 낳은 산모가 아이를 낳자마자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링컨은 자신들이 다른 인간들의 장기를 제공하기 위해 사육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탈출을 시도한다. 결국 이상향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현대 과학문명이 만들어 놓은 덫에 인간이 스스로 갇히고 말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을 이 영화는 보여 준다.
최근 배아줄기 세포의 발견으로 세계적 인물이 된 황우석 교수의 연구 결과가 환영과 비난의 양극을 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욕망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일련의 소설 속의 상상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제, 베르나르의 작품세계를 살피기 전에 먼저 그가 심취했던 H.G. 웰즈와 올더스 헉슬리의 문학세계를 살펴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웰즈의 「타임머신」은 시간 여행을 보이고 있다. 처음 이 작품은 「시간을 항행하는 아르고호의 사람들」을 개작한 것으로 시간의 문제를 최초로 소설 속에 도입시켰다는 점에서 관심거리가 된다. 이 소설의 주제는 진보의 문제, 즉 인류는 진보할 것인가 아니면 퇴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당시 영국에는 인류는 진보하여 세상은 더욱 좋아질 것이라는 낙천적 견해와 파멸의 전조가 아닐까 하는 비관적 사유를 지닌 사람들이 양분되어 있던 때였다. 이런 견해는 웰즈의 은사인 토머스 헉슬리가 진화의 결과를 진보일 수도 있고 퇴보일 수도 있다고 본 견해와 일치한다. “비록 인류가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정상에 도달하고 그러자 이번에는 내리막길이 다가설 것이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웰즈는 이 소설에서 인류의 퇴화와 퇴보를 강조하고 있다. 온순한 지상인(地上人)인 엘로우들은 지배계급의 후예이며, 지하인인 몰로크들은 무산계급의 후예이다. 그런데 이 몰로코들은 엘로이를 육식용으로 사육하고 있다. 이것이 인류의 ‘진화’에 대한 웰즈의 이미지였다.
우리들은 불가사의한 생각에 엄습되어 그저 다만 놀랄 뿐이다. 타임 트래블러는 돌아올 것인가? 그는 과거로 돌아가서 구석기 시대의 피를 빨아먹는 털투성이의 야만인 속에 내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백악기(白堊紀)의 깊은 바다에 떨어졌거나, 쥐라기의 그로테스크한 도마뱀이며 거대한 파충류 가운데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바로 지금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플레시오사오루스가 떼지어 모인, 물고기 알 모양의 산호초 위나 삼첩기의 쓸쓸한 염호(鹽湖) 가를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래로 가서 전보다도 더 가까운 미래 세계에 내린 것일까. 거기서는 인간은 여전히 인간임이 틀림없지만, 현대의 수수께끼는 모두 풀리고 골치 아픈 문제는 전부 해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를테면 성년기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적어도 나는 불충분한 실험, 단편적인 이론, 서로 일치하지 않는 현대가 인류 문화의 최성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임 트래블러가 ‘인류의 진보’에 대하여 지극히 비관적이고, 문명의 증대는 어리석음의 증대에 지나지 않으며 얼마 후에는 그 영향이 되돌아와서 인류를 파멸케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타임머신이 생기기 훨씬 전에 우리들은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했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 결미 부분, 금성출판사, 97쪽
더욱 가공적인 이야기가 바로 헉슬리의 『훌륭한 신세계(新世界)』다. 이 작품은 20세기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금세기를 상징적으로 포착하고 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마찬가지로 유토피아를 그리고는 있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지옥도를 그렸다는 데에 초점을 모아야 할 것이다.
겨우 34층밖에 안 되는 납작한 회색 빌딩, 정면 현관 위에는 ‘중앙 런던 인공 부화(人工孵化)·조건 반사 육성소(條件反射育成所)’라는 명칭. 그리고 방패 모양의 바탕에는 세계 국가의 ‘공유·균등·안정’이라고 하는 표어.
―삼성출판사, 『훌륭한 신세계』, 189쪽
여기서 인간이 배양되고 자유자재로 출생된다. “표준형의 감마 계급, 차이가 없는 델타 계급, 균등한 엡실론 계급의 경우는 이미 해결되어 있다. 몇 백만의 일란성 쌍생아가 태어난다. 대량 생산의 원칙이 마침내 생물학에 응용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계급을 예정하고 조건반사를 심어 준다. 그리하여 각 계급에게 맞는 역할을 부여한다. ‘소마’라는 비약은 사람들을 항상 도원경(桃源境)의 생활에 만족하게 한다. 인간이 태생(胎生)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가족관계도 있을 리 없다. 또 부부 관계도 없으며, 모든 사람은 각자의 것일 뿐이다. 극단적 자유연애와 완전한 난혼(亂婚)이 장려된다. 모든 인간은 밤낮으로 화창한 봄 날씨처럼 쾌적한 상태이다. 치인(痴人)들의 천국이었다.
그러나 이 바보들의 천국인 미래에도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는 반역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배양(培養) 병에서 태아로 있던 시기에 실수로 알코올을 지나치게 많이 넣어 상류계급에 속하면서도 하층계급의 열등한 육체를 부여받은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과 열등감에 고민하며 몰래 반사회적인 사상을 품는다. 둘째의 반역자는 육체적으로나 지능으로도 우수한 소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주의국의 정책에 회의적인 사상을 품고 있는 윗슨이라는 청년이다.
이들보다 더 정면에서 반항적 자세를 나타내는 것은 우연히 미개야만인 촌에서 이 별세계를 방문한 존이라는 청년이다. 미래국 편에서 보면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인 청년이다. 그는 병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배에 통증을 주고 태어났다. 그의 눈으로 보면 1년 내내 영혼의 휴식을 즐기고 있는 문명국의 행복을 긍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바보들의 낙원에서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어 인가에서 떨어진 전원으로 고독을 찾아 도피한다. 그러나 문명국 주민들은 그의 고독을 방치하지 않는다. 급기야 야만인 청년 존은 자살하고 만다.
하지만 나는 안락하고 기분 좋은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합니다. 나는 시를 원합니다. 나는 참다운 위험을 원하고요, 나는 자유를 원합니다. 나는 선량을 원합니다. 나는 죄를 원합니다.
존과 무스타파 몬드의 이런 대화는 인간적 가치의 보존을 위해 오히려 원시 사회의 불편을 감수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낙천적 진보주의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이 경묘한 희화를 통해 현대 문명의 심각한 위험성을 과정적으로 제시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가 그린 세계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지 아니한가. 1932년에 발표한 헉슬리의 상상은 이제 배아줄기 세포의 발견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베르베르는 이런 헉슬리의 문학적 상상력을 이어받았다고 하겠다.
5
다시,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로 돌아가 보자.
엉뚱한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대단했던 소년. 이미 일곱 살 나이에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만화와 시나리오에 탐닉하면서 올더스 헉슬리와 H.G. 웰즈를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 그의 삶에 개미가 들어온 것은 열한 살 무렵으로 그는 아예 집 안에 개미의 도시를 들여왔다. 2천 마리의 개미가 사는 어항. 그는 「개미」를 탈고하고 나서야 그의 개미들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책을 내 줄 출판사를 찾아 다닌 지 6년 만인 1991년, 120여 회의 개작을 거쳐 발표된 것이 『개미』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개미』가 발표되고 프랑스에서는 단순히 공상과학소설이나 대중소설로만 인식했다. 그러나 기성문단의 ‘따분함’에 질린 젊은 독자들에게 그의 소설은 참신한 감동을 주었고, 과학자나 교사들에게 먼저 어필하였다. 뒤늦게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소설은 프랑스 문학이 곧 세계문학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진 채 정작 다른 나라의 독자들에게는 읽힐 만한 이야기가 없었던 기존 문단의 자만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의 뛰어난 상상력과 기막힌 서스펜스는 전세계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가 만들어낸 세계가 너무도 엉뚱하고 환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개미』에서는 독특한 세계가 그려진다. 그는 인간의 관점으로 개미를 보지 않았다. 그 스스로 개미가 되어 독자들을 개미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그의 의하면, 개미들은 인간보다 더 앞선 문명을 갖고 있었다. 인류 문명의 태동기, 호모사피엔스들이 부싯돌을 겨우 갖고 있을 때, 개미들은 이미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지하터널에 균류를 재배하고 작은 날벌레를 심부름꾼으로 썼다. 그 작은 벌레들은 무엇이든 갖고 있었다. 사회보장 제도, 노예제도, 농업과 목축, 도시계획, 마약, 의사소통, 화학무기 게다가 알코올 중독까지……. 그의 소설은 과학과 문학의 접맥, 이른바 이종결합의 퓨전이다. 컴퓨터 매니아로 비디오게임을 공격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그의 꿈꾸기는 바로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18세기 초, 잠수함과 로켓과 비행기를 묘사함으로써 미래를 예언했던 쥘 베른이나 『별들의 전쟁』의 조지 웰즈는 타임머신이나 투명인간과 같은 터무니없는 예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지 아니한가. 그랬다. 프랑스의 쥘 베른이나 영국의 조지 웰즈, 미국의 아이작 이시모프는 바로 베르베르에게 이런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 작가들일 게다.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나를 재우기 전에 언제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 나는 밤에 그 이야기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 뒤로 나는 세상살이가 너무 어려운 것으로 보일 때마다 짤막한 이야기를 짓곤 했다. 내가 겪는 문제의 요소들을 무대에 등장시켜 이야기를 짓고 나면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무』의 머리글에서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허를 찌르는 반전은 우리들의 일상적 상식을 뒤엎는 놀라운 시각이다. 그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뤽은 프라이팬의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 때문에 몽상에서 깨어났다. 프라이팬은 관절이 있는 팔을 움직여 계란 하나를 집더니 그것을 깨서 기름에 던졌다. 프리이팬 뒤에서는 커피 머신이 잔에 따뜻한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자아 맛있는 콜롬비아 커피를 대령했습니다!”
커피 잔이 하는 소리였다. 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안데스 지방의 팬파이프 선율까지 흘러 나왔다.
“계란 프라이는 누가 먹을 거지?”
접시가 묻자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양 옆에 자리를 잡으면서 대답했다.
“뤽이 먹을 거야.”
냅킨이 뤽의 목 주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뤽은 얼굴을 찡그렸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이 빌어먹을 놈의 냅킨이 내 목을 조를 날이 오고 말 거야. 그는 냅킨에 일부러 얼룩을 묻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냅킨은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열린책들, 『나무』, 15-16쪽
작중화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 내용을 속속들이 듣고 있다. 의인체의 수법을 사용한 이 소설은 우주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자동화의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는 별도로 이미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기계들의 자동화된 임무는 뇌의 기능을 대신해 준다. 그러나 이런 자동화된 뇌의 기능에 화자는 염증을 느낀다. 결미를 보자.
나 역시 당신 심장과 똑같은 것을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어. 지구상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야. 우리는 모두 기계야.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환상을 품도록 우리 뇌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야. 땅콩 자동판매기와 당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뿐이야. 꿈에서 깨어나야 해.
―『나무』, 29쪽
베르나르의 소설은 이렇듯 기상천외하다. 그의 세계는 죽음 저 너머의 삶과 피안의 신비 그리고 최후의 심판, 최후의 대륙, 영혼과 환생의 세계를 담론으로 하고 있다. 『타나토노트』는 바로 이런 경향의 소설이다. 여기 타나토노트(thanatonaute)는 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항해자를 뜻하는 ‘나우테스(nautes)’의 합성어로 ‘영계 탐험사’를 말한다. 이 소설은 역사 교과서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연도로 네 가지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즉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딤(1492년), 달에 첫발을 내디딤(1969년), 사자(死者)들의 대륙에 첫발을 내디딤(2062년), 영계에 첫 상품 광고 등장(2068년)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 2068년에는 최초의 영계 여행단이 구성될 것임을 상상하고 있다. 각 나라의 신화와 여러 종교에서 발췌한 죽음과 관련한 부분들이 스토리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정치우화이자 추리소설이며, 과학 자료라 할 수 있다. 앞의 『개미』를 통해 보듯,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보아 왔던 지식의 세계를 ‘다르게 생각하기’로 보는 세계라고 하겠다.
이런 베르나르의 경향성은 일견, 컴퓨터와의 대국에서 세계 챔피언이 된 신경과 의사의 죽음과 관련한 비밀을 풀어 가는 『뇌』, 고대 생물학자의 돌연한 변사와 관련하여 과학과 모험의 이야기인 『아버지들의 이야기』, 최초로 저승을 탐사했던 타나토노트 중 한 사람인 미카엘 팽송이 사고로 죽어 영계에 올라 심판을 받는 『천사들의 제국』, 새로운 자기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는 『여행의 책』 등의 소설들을 통해 기발한 상상과 반전을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 왔던 소설 담론, 이른바 통속적인 담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과 기발한 착상으로 미래를 사유하는 독창적 담론이 전개된다. 이는 전통적 소설 담론에 대한 충격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력이 소설 쓰기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물론 아니다. 오늘의 수필은 일상성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 천편일률적인 조합과 답습이 계속된다. 그게 그 얼굴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른 얼굴이나 신기함이 없다. 처음 보는 듯한 낯섦에서 충격의 묘미를 체험해야 하련만, 오늘의 수필은 너무 진부하다. 그게 수필의 태생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화하고 사유도 변화한다. 그렇다면 이런 추세에 발맞춰 수필의 내용도 변화해야 할 것이며 그 창작 기법 또한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무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시나 소설이 그러하듯 변화와 충격, 반전의 묘미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문학의 위기라는 함의(含意)를 극복하기 위한 길이 될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기’가 바로 그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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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월간문학』2003년 3월호에 발표된 이건표의 수필 「한여름 밤의 꿈」의 한 대목이다. 제목과 같이 이 수필은 일상성에서 간격을 지닌 꿈 곧 판타지다.
1.
광활한 우주 공간에 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든 말든 나의 관심사는 될 수 없다. 빛과 바람이 서로 섞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와 그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만나 교감할 수 있는 확률은 제로 상태이기 때문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선을 디자인해 보는 것은 종이비행기를 접듯 순전히 재미삼아서다. 만화나 상상도 속의 우주선들은 금속성의 매끈한 표면을 가지고 있으며 원반형이나 유선형의 날렵한 몸체를 자랑한다. 내가 보기에 기존의 이러한 우주선들로는 거칠고 광활한 우주를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이하 중간 생략)
3.
태초에 지구로 날아온 생명이 있었다. 수십 명의 어린이들과 이들을 인솔하는 성인 남녀를 태운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하였다.
우주 저편의 어느 행성이 환경오염과 사막화 현상이 심화되어 종래에는 불모의 땅이 되었다. 지하수에 의지해 마지막 생명을 유지하던 사람들은 시한부 역사를 인정하고 최후의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아이들은 생명의 별로 보내자.”
과학자들은 자기네 행성 주변을 돌고 있는 가장 작은 위성을 궤도에서 떼어내 생존의 시설을 만들었고 이름짓기를 ‘빅버즈(큰새)’라고 하였다. 행성에서 ‘빅버즈’까지 아이들을 옮겨 실은 것은 ‘스몰버즈(작은새)’로 불리는 작은 연락 우주선이었다.
그들은 천체 과학자가 발견한 머나먼 생명의 별 지구로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실어 보냈다.
‘빅버즈’의 긴긴 항해 끝에 지구가 있는 태양계에 진입하였다. 당시 지구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혜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는 그것을 관찰하고 이름지을 생명체가 살고 있지 않았다.
오랜 여행 끝에 이미 덩치가 커진 아이들의 잠자리를 돌보고 나서 남자는 여자에게로 왔다. 20대 초반에 여행을 시작한 그들 남자와 여자는 어느새 중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여자는 그들의 목적지인 지구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저것 좀 봐!”
남자는 여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에메랄드 빛 아름다운 행성이 화면 가득 빛나고 있었다. 보석처럼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에메랄드 빛이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고정되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는 것, 이것이 생명이 가장 아름다워야 할 이유였다. 남자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황홀경에 취하여 꿈쩍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최면과 같은 황홀경에서 풀려나 환호성을 지른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남자는 배율을 높여 생명의 별 지구를 관찰하였다. 그들이 정착하기에 예상하지 못한 점을 찾아내어 미리 위험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기온 · 습도 · 세균 · 공기 분포 · 압력 등 모든 조건은 생존에 적합하였다. 그야말로 지구는 완벽한 생명의 모태였던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문제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공존의 대상으로 분류되었던 생명체 파일에서 나왔다. 컴퓨터는 생명체의 크기를 문제 삼아 빨간 불을 깜빡거렸다.
“거의 파충류다!”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것들은 인간을 씹지도 않고 한입에 꿀꺽 삼킬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사나웠다.
(이하 생략)
처음에 그들이 낳은 아이와 이미 청년이 되어 버린 ‘빅버즈’의 아이들과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어른이 되고 늙어 갈수록, 아이를 낳아 세대가 유전될수록 그 차이는 커졌다. 하나는 인간으로 다른 하나는 유인원으로 진화를 시작하였다.
수백만 년이 지났다. 오랜 세월일 것 같기도 하지만 우주의 시간으로 봤을 때 찰나의 시간이기도 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구 표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종은 그 옛날 인간의 모습으로 유전한 종들이었다. 그들은 부모가 물려준 지식을 한껏 사용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우주 저편을 열광케 하던 에메랄드 빛은 많이 퇴색되었다. 이 현상은 서서히 진행되었으므로 지구인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 아이들 중에는 새로운 생명의 별을 찾아갈 꿈을 꾸는 이가 등장하고 있었다.
―『월간문학』, 2003년 3월호, 222-226쪽
이 수필은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수필문학이 인간의 삶에 근거한다는 인간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 수필은 그저 꿈을 꾸듯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창작 의도가 분명하지 않으며, 삶의 진통과 고뇌라는 문제와는 별개의 컴퓨터가 그려내는 사유의 세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간 배아세포를 찾아내어 인간을 기계적으로 합성해 내거나 유비쿼터스, 아니면 크로스오버 즉 장벽 허물기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수필 쓰기와는 ‘다르게 쓰기’에 맞춰진 문학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필자의 이 글에 대한 견해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언술로 재단되었던 바 있다.
이건표의 「한여름 밤의 꿈」은 구성이나 간결한 문장 쓰기, 사유의 깊이가 있다. 전개되는 내용도 낯설다. 그러나 꿈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이드 방식으로 말하자면, 꿈은 잠재하고 있거나 억압되어 있는 욕망의 무의식적 발현이다. 이 경우 자칫 리얼리티가 결여되기 십상이며 지속적 효율성 또한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문학 환경이, 권위주의적 담론이 약화되면서 작가의 고유한 목소리가 다양하게 표출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일종의 환상문학이 초현실적, 초자연적 가상의 세계를 그럴듯하게 형상화하면서도, 현실 극복의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수필문학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삶의 문제를 떠난 낯선 허구적 공간의 실험이 미래수필을 위한 하나의 시금석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월간문학』 2003년 4월호 필자의 월평에서
그러나 한 발 더 물러나 이 작품을 관찰한다면, 이는 앞서의 베르나르의 소설의 유형에서 살펴보았듯, 소재주의에서 이탈하여 사물을 새롭게 보려는 태도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 점은 우리가 그저 간과해선 안 될 문제이겠다. 다시 말하면 문학적 상상력이 이렇듯 ‘다르게 쓰기’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