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거실을 건너 부엌 쪽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환한 빛 그림자에 맑은 기운이 감도는 듯 기분도 밝아진다. 탁자에 앉아 기린초의 흰 꽃을 바라보다 그 위로 부유하는 미세한 먼지들을 발견한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먼지들은 나붓나붓, 마치 자유의 날개를 단 듯 몸짓이 가볍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위로 사뿐 그네를 타듯 날아오른다. 먼지는 자유로운 행위를 거듭하고 있다. 먼지의 유영에 잠시 잠깐 누군가의 구속도 방해도 없이, 인간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나를 매료시킨 상像은 부유하는 먼지이다. 맑은 햇살이 거실에 비치지 않았다면, 나의 시선이 머물지 않았을 대상이다. 무엇이 나를 먼지까지 닿게 한 것일까. 평소 눈에 보이지 않던 먼지가 갑자기 나의 심상을 건드린 건, 아마도 무량한 빗살 속에 감각을 풀어놓은 탓이리라.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먼지의 소굴에서 생활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그 환경을 애써 모른 척 지내고 있을 뿐이다. 일상에서 공기를 통한 미세한 먼지를 얼마나 마시고 사는 것일까. 먼지 분야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는 사람이니 알 수도 없고, 그보다 생활에서 일어나는 작고 가벼운 티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니 더욱 모르리라.
시선에 든 먼지를 문자나 그림으로 그리려면, 먼저 먼지가 일어난 배경을 살펴야 할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이라고, 나의 감각을 자극하였다고 모두 글이 되는 건 아니다. 감정을 건드렸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한다. 숙고 없이 글로 옮긴다는 건 대상에 대한 예의도 아니리라. 나는 글을 쓸 때 머릿속에서 구성과 뼈대가 올바로 서야만 컴퓨터 앞에 앉는다. 눈앞에 생선의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먼지의 형상을 드러나게 한 배경은 바로 무량한 햇살이다. 빛살을 생각하며 대상을 그려나간다. 무엇보다 대상이 감춘 숨은 그림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런데 예비 작가들의 글을 교정하다 보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사실적으로 그리기에 급급하다. 그렇다 보니 대상의 비유 없이 이미지만 서술하니, 삶의 철학이 녹아든 문장을 찾기도 쉽지 않다.
문학은 인간을 다루는 인간학이다. 대상에 삶의 희로애락이 투영되어 그대만의 인생 철학이 표현되어야만 한다. 감성을 뒤흔든 대상對象을 표현할 땐 풍경이나 사물의 이미지像만 그릴 것이 아니라, 추상抽象의 개념처럼 ‘개별의 사물이나 표상의 공통된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진정성 있게 뽑아내야만 한다. 매번 글을 쓰며 경전처럼 되뇌는 건, 소재의 지독한 관찰과 주제를 향한 깊은 사유에서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는 굳은 믿음이다.
우리는 생활하며 수많은 상像을 마주한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은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삶과 죽음에 놓이리라. 수정체에 상像이 맺히는 즉시 생명의 숨을 부여받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사장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일단 시선을 부여잡은 대상은 생명의 기운이 돌 것이며, 나아가 가슴으로 삭여 새로운 상象으로 그만의 작품으로 피어나리라. 이성복 시인은 “철저히 사물은 기억 덩어리다. 기억의 압축으로 두부모처럼 생겨난 기적의 덩어리, 아무도 사물의 압축파일을 풀 수 없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나의 글감이 될 사물들이다. 초점이 된 ‘사물은 기억 덩어리’란 말에 백배 공감을 한다. 그러나 ‘사물의 압축파일을 풀 수 없다.’라는 말에선 생각이 다르다. 눈앞에 어떤 상이 맺히면, 서서히 사물(만물)과 관련한 잊힌 과거의 기억들이 ‘줄사탕’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압축파일을 풀 수 있는 열쇠를 품고 있다. 작가든 화가든 관찰자는 대상이 문자로 피어나기까지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감각을 열고 자연에 들어야 한다. 마주한 대상이 자신의 안에 들어오도록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만 한다. 더불어 내 공간에 들어온 상에 자기만의 삶의 무늬를 진정성 있게 그려가야만 하리라.
작품의 주제화에선 글과 그림이 다를 바 없다. 강요배 화백은 “성공적인 그림은 참신해야 하고, 풍부해야 하고, 간결하며, 생동해야 한다.”라고 그림에서 ‘기운생동’을 주장한다. 화백도 처음에는 풍경을 사실적으로만 그렸단다. 이제는 대상의 배경을 흔드는 바람을 그리고 싶단다. 그의 그림 속에서 바람을 맞고 서 있다. 사물마다 바람의 강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작가는 자신만의 결과 무늬로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모든 대상은 본질에서 은유로 뛰어넘어야 문학이 된다. 본래의 자리에서 낯선 시공간으로 이탈해야만 그 이면도 보이리라. 강 화백은 “먼저 창작자 자신을 놀라게 해야 하고, 다시 감상자의 마음을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라고 화집에 적고 있다. 만약 들녘에 핀 유채꽃 군락을 표현하고 싶다면, 노란 유채꽃이 ‘아름답다’고 사실적으로 적을 것이 아니다. ‘물물物物의 세계’, 노랑의 빛깔이 더 강렬하게 주위에 사물까지 반사되도록 그려야만 하리라. 유채꽃은 이방인으로 더욱 노랗고, 주위를 걸어가는 사람까지 노랗게 물들어야만 그 빛깔이 선명해지리라.
화자는 부단히 상을 좇고 있다. 매번 시선의 혁명이 필요하다. 미래에 나에게 올 상은 부디 날 것 그대로의 ‘상像’이 아닌 ‘보석 같은 명상의 순간’을 포착한 ‘상象’으로 다가왔으면 한다. 먼지가 새로운 상으로 무딘 감각을 흔들 듯이.
노년의색/ 이 은 희
길쭉한 표면에 얼룩얼룩한 점이 늘어나 있다.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곱지 않다. 촉감 또한 무르다. 껍질을 보니 순간 먹고 싶은 마음이 가신다. 식물의 갈변은 폴리페놀이라는 유기화합물의 작용 때문이다. 하지만, 과육의 단맛은 보기와 다르게 최고이다. 그래선가 하루살이가 과일 언저리를 날아다닌다. 머지않아 바나나는 온통 갈색으로 변하리라.
갈색으로 변하는 것이 어디 바나나뿐이랴. 하늘정원에는 바람결에 마른 꽃송이가 버석거린다. 꽃 앞에 바투 앉아 들여다보니 참으로 신비롭다. 잎은 모두 떨어지고 가지 끝에 매달린 갈색의 꽃송이들. 언제 고운 시절이 있었느냐는 듯 색은 발하고 형태는 그대로 말라 있다. 꽃송이는 칼바람 맞으며 색은 점점 바래지리라. 동토에서 새순이 돋을 때까지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리라. 버석거리는 속울음은 마치 '나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어.'라며 시간의 속성을 뼈저리게 되새김하는 성싶다.
소멸에 이르는 인간의 노년 색이 궁금하다. 아기와 노인의 피부는 확연히 다르다. 아기의 피부는 선홍빛으로 태어나 성장하며 우윳빛으로 뽀얘진다. 반면에 상노인의 피부는 날이 갈수록 늘어지고, 얼굴은 자디잔 주름살에 검버섯까지 돋아 누레진다. 우주 만물은 어떤 식으로든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색도 색이지만, 수국처럼 형태가 변하지 않고 곱게 늙느냐, 목련처럼 추레하게 흩어지느냐이다. 꽃의 삶을 살지 않아 그 속내는 잘 모르나, 저들의 노년의 모습은 시간에 따른 순리라는 걸 깨우친다.
이 모든 걸 신이 내린 음료가 대변하지 싶다. 가을날 수확한 포도는 무수한 여정을 거쳐 인간의 식탁 위에 오른다. 와인은 보통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두 가지로 알고 있다. 둘 다 오래 묵히면 하나의 색인 갈색으로 응축된단다. 어두운 통 속에서 많은 과정을 거쳤으리라. 인간이 만약 백수를 한다면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등 무수한 감정의 산을 넘고 넘었으리라. 모든 만물은 영생불멸을 원하고 원하나, 삶의 곁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노을이 그렇고 꽃이 그렇다. 시시각각 아름다운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년의 과정을 거쳐 덧없이 사라지는 데 우리만 보지 못할 뿐이다.
갈색의 종착역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만물은 세월의 빛에 발하여 색의 원점인 흰색으로 돌아갈 것 같다. 인간은 생을 다하면 한 줌의 재로 돌아가지 않던가. 좋아하는 꽃문살이나 목어도 오래 묵으면 무채색으로 발한다. 나는 엷은 갈색의 나무색이 좋아 그 곁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누런 갈색이든 흰색이든 바래진 겉모습이 무엇이 중요하랴. 노년에 달하기까지 대상이 품은 고유한 결이 중요하지 싶다. 내면의 결은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따라 바뀌고, 그 형상은 온몸에 조각한 것처럼 새겨지기 때문이다.
눈앞에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를 손사래를 쳐 내몬다. 이어 갈변한 바나나를 들고 껍질을 벗긴다. 속살도 거무스름하다. 과육을 한입 베어 물며 신통치 않은 사유 속에서 빠져나온다. 뇌리에서 툭 불거진 음성, 손녀가 '할머니'를 부른다. 사랑스러운 음성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미 난 호칭으로 노년의 길에 서 있다. 현재 나의 입안은 과즙으로 달다. 노년의 색이 달고나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붉은 돌탑 / 이 은 희
새벽길을 나서는데 가을비가 추적거린다. ‘가을’을 말하면, 누구라도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고 어디론가 가고 싶은 심정이리라. 울긋불긋한 단풍을 떠올리니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리고, 백지에 무엇인가 적고 싶어 안달이다. 누구보다 먼저 가을을 만나고 싶어 산수 좋은 사찰을 찾는다. 하지만, 빗길에 우리가 가고 싶었던 드높은 산정은 미루고, 산청의 호젓한 산사, 대원사로 든다.
단아하고 정갈하게 가꾼 비구니 사찰이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아기자기한 멋이 깃든 곳이다. ‘산청’이란 지명처럼 청정한 계곡 물소리로 귀를 씻으며 산길을 오른다. 고목의 나뭇잎으로 하늘을 에워싼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법당에 다다른다. 대웅전 앞 전경이 희뿌염 안개가 흐르고 빗물로 씻긴 전각들의 기와지붕이 말끔하다. 기왓장으로 세운 앙증맞은 담에는 다육식물이 오종종하다. 산왕각 아래 장독대도 역시 비구니 스님들의 살뜰한 마음을 보는 듯하다.
산신각 길목에 감잎이 떨어져 있다. 감성 깊은 지인은 주홍빛으로 물든 감잎 한 장을 얼른 손에 쥐어 보여준다. 올해의 첫 단풍인 감잎을 사진에 담으며 정녕 ‘가을’임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산청의 가을은 감나무가 먼저 알리고 있다. 단풍이 든 감나무는 잠시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는다. 먹구름이 잔뜩 퍼진 공중에 주홍빛 감이 감꽃으로 다문다문 물들고, 발치에는 감나무 잎이 떨어져 붉은 꽃처럼 피어난다. 가을비에 젖은 감잎이 꽃처럼 아름다운 날이다.
배롱나무 옆 나무문에 다다른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소박한 쪽문이다. 키가 큰 내가 작은 문을 지나려면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야만 머리가 부딪지 않고 들어가리라. 아마도 귀중한 분이 기다린다는 표식의 좁은 문이 아니랴. 세속에서 꼿꼿이 세우던 등허리를 숙여야만 하리라. 내가 누구인지를 돌아보고 예를 갖추고 문턱을 넘으라는 소리만 같다.
작은 문에 들어 층계를 오르니 단풍 든 나무처럼 우뚝 선 붉은 돌탑이 보인다.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다층석탑(보물 제1112호)이다. 석탑은 신라시대 자장 율사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자 세운 탑이다. 임진왜란에 파괴되었다가 복원하다 58과 사리와 사리함이 발견되었단다. 받침돌 면석에는 팔부중상이, 모서리에는 사람 모습의 사천왕상 조각이 독특하다. 퉁방울만 한 눈동자와 길쭉한 두 귀, 매부리코와 앙다문 입. 동자석처럼 새긴 사천왕상이다. 대부분 일주문 뒤에 사천왕상이 배치되는데, 이곳은 석탑에 수호석으로 자리하여 흥미롭다.
돌탑을 바라보고 있으니 들뜬 마음이 차츰 누그러진다. 탑 앞에서 합장하고 먼저 지구상에 전쟁이 멈추길 염원한다. 더불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길인 분노나 원망, 덧없는 욕망이 출렁이지 않기를. 부디 그대도 이 가을에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나날이길 원하며 작은 문을 나선다.
침자리 / 이 은 희
책장(冊張)의 침자리가 동서양이 같단다. 나라마다 책의 크기나 모양, 글씨를 쓰는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는 지점에서 하나가 된 것처럼 정(精)이 흐른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속도는 달라도 침자리에선 쉼표처럼 한 호흡을 했으리라. 예전에는 종이의 질도 좋지 않았고 책장에 꽂은 소품도 흔하지 않았다. 책이 귀하여 한 권의 책을 여러 사람이 돌려보았으리라. 책에 메모나 장서인을 남기지 않으면, 그 책을 누가 소유하고 독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먼 훗날 책장의 타액은 독자의 이력으로 남으리라. 과학의 발전은 침을 분석하여 수백 년 전 독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책은 인류의 보고이자 기록 유산이다. 고전을 읽다가 '침자리'란 단어에 사로잡혀 선인의 생각 궤적을 따라간다. 동양의 책에는 침자리에 투명한 기름종이를 덧붙인 생활의 지혜도 번뜩인다. 책장을 넘기는 지점에 침이 잔뜩 묻어 헤어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선인들이 책을 얼마나 애지중지하였는지 알 수 있는 증거이다.
타인의 침을 더럽게만 볼 일이 아니다. 문사는 역시 예리하다. 일명 타액이 묻은 책장의 '침자리'를 의미화하여 유명해진 작가도 있다. 이탈리아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중세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다. 특별한 책을 사람들이 읽지 못하게 하려고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자리에 독약을 묻힌다. 책을 몰래 읽은 사람들은 죽임을 당한다. 과연 침자리에 독약만 묻혀있었을까. 이 책의 공간인 거룩한 수도원은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과 암투의 장이다.
서재에 꽂힌 수많은 책이 나를 향한다. 책의 첫 장부터 읽다가 놓아버린 책도 있고, 두서없이 한 부분만 읽고 접어놓은 책도 있다.
책장의 모서리를 접으며 강아지의 귀로 표현한 시(詩)가 떠오른다. 마경덕 시인의 ‘책들의 귀’에서 "책의 귀는 삼각형, / 귀퉁이가 접히는 순간 책의 귀가 태어나네" "순순히 귀를 내주고/ 충견처럼 그 페이지를 지켰지만 해가 가도 / 끊어진 독서는 이어지지 않고 책의 심장에 먼지만 끼었네"라고 읊는다. 인생이란 '책의 귀'처럼 어느 한 페이지를 접어놓고, 수많은 갈등과 고민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무수하리라.
책장(冊張)의 침자리는 무량의 궤적을 품고 있다. 그 표면에는 저자가 수없이 숙고한 생각들이 활자로 적나라하다. 또한, 책장마다 독자의 무언의 언어가 침의 흔적으로 살아 있다. 그러니 책은 시공간을 초월한 혜안의 산물이다. 삶의 질주에서 잠깐 멈춰 여유로운 독서를 권한다. 책 속에서 예리한 통찰을 엿보고, 삶의 지혜를 만나는 즐거움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