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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Dia)를 따라 가는 길 / 줄 (이 방 주)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2. 12. 18.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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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아(Dia)를 따라 가는 길 / 이 방 주

 

여기 길이 있다. 길은 바로 내 발아래 있다. 나와 흙이 처음 만난 발자국이 모여 길이 되고, 내 걸음걸이를 따라 길 모양이 생겨난다. 공동체의 관습이 문화를 형성하듯이 걸음걸이에 따라 길이 이루어진다. 길은 우리네 삶의 흔적이고 곧 민족의 역사이다. 의미 있는 역사로 남은 길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그 길을 따라 간다.

힌두인들의 성지인 바라나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바라나시를 가보지 않고 인도 여행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바라나시 화장 가트를 보지 않고 죽음의 성스러움을 말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갠지스 강가 화장터인 다샤스와메드 가트(Dashashwamedh Ghat)에서 행하는 아르띠뿌자(Arti Pooja)를 참관했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르띠뿌자는 일출과 일몰 시간에 행해지는 힌두교의 종교 의식이다. 힌두교의 사제인 브라만이 계단의 맨 위에 일렬로 놓은 우산 모양의 차타리스(Chataris) 아래에서 대중을 신의 길로 인도한다. 브라만은 우주의 다섯 가지 요소인 공간, 바람, 불, 물, 땅을 종소리, 연기, 불, 부채를 이용해 상징적으로 형상화한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코브라 모양의 향로에 담은 불을 흔들면서 베다인지 주문인지를 외는 소리가 갠지스 강을 따라 허공으로 울려 퍼지면, 곧 신이 내려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경건하고 엄숙한 진언(眞言 mantra)에 신도가 아니라도 빠져들 것만 같았다.

몽롱한 불빛 속에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분위기에 취한 대중은 디아라고 하는 작은 꽃불을 강물에 띄운다. 자신도 감각하지 못하는 기원을 담아 보낸다. 디아는 피리 소리인지 날라리 소리인지 아물아물하는 갠지스 강을 따라 흘러간다. 나도 디아를 띄웠다. 디아(Dia)는 매리골드로 보이는 몇 송이 꽃으로 감싸 안은 촛불을 실은 배 모양의 작은 바구니이다. 작지만 아주 예쁘고 정성을 담아 만들었다. 디아를 물에 띄울 때는 신도도 아니면서 가지런한 마음이 된다. 그런 마음을 담아서 그런지 서두르지도 부딪치지도 않고 천천히 흘러간다. 어둠 속에 깜빡이는 꽃불은 질서랄 수도 무질서랄 수도 없이 갠지스 강을 따라 깜빡깜빡 흔들리며 떠내려간다. 히말라야에서 내려온 별이 떠가는 모습니다. 디아는 진리의 세계로 나를 건네주는 신의 불빛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행사는 매일 일상처럼 행해진다. 참여하는 대중이 엄청나다. 힌두인들은 평생 한 번만이라도 바라나시 다샤스와메드 가트의 아르띠뿌자에 참례해보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날마다 두 차례씩 아르띠뿌자에 참례하고 죽음의 호텔에서 죽음을 맞고 이곳 화장 가트에서 불에 태워져 우주로 날아가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선지 이곳으로 모여드는 힌두인들이 골목에 가득하게 도시를 메운다.

아르띠뿌자가 거행될 시간이 임박하면 가트로 가는 골목은 인파가 들끓는다. 도로는 차도인지 인도인지 구분할 수 없다. 좁고 꾸불꾸불한 길에 사람과 차가 뒤섞인다. 사람들, 릭샤, 툭툭이, 오토바이, 자전거, 삼륜차, 차량이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사람들 사이에 가끔 소도 느릿느릿 함께 한다. 모두가 같은 중생이다. 개도 따른다. 경적소리, 아우성으로 골목은 터질 것 같다. 꽉 막혀버릴 것 같지만, 잔잔한 모래 위에 물이 흐르듯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거대한 하나의 길짐승처럼 꿈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사람들도 오토바이도 릭샤도 갑자기 대드는 듯하다가 묘하게 멈칫 선다. 경적 소리도 떠드는 소리도 시끄럽긴 해도 신경질을 내지는 않는다. 가만히 보면 걷는 사람들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발 달린 중생이나 바퀴 달린 것들이나 얽혀서 한 몸이 된다. 그들의 가슴엔 방금 디아에 담아 신에게 보낸 소망만 가득하다. 그냥 꽃불만 따라간다. 나는 이 신비스런 모습에 연신 탄성을 올렸다. 길이 있기에 길 위의 질서가 있고 질서가 있기에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이것이 힌두인들이 진리를 찾아가는 문화이다. 나도 잠시 힌두인이 된다.

아스라이 먼 우주에서 바라나시를 내려다보면 그냥 하나의 유기체가 흘러가는 모양으로 보일 것이다. 갠지스 강물이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네 혈관에 피가 이렇게 흐를까. 빨갛게 한 줄기로 보이는 피도 따지고 보면 수많은 요소들이 뒤섞여 부딪치고 소리 지르며 흐를 것 같다. 그러나 혈관은 부딪치거나 멈추어 서지 않는다. 그냥 하나처럼 일상이 되어 흐른다.

힌두인들은 하나의 진리로 산다. 신에게 가는 길은 그들이 찾아낸 진리이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마하트마 간디도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신이다. (Truth is God)’라고 했다. 신에게 가는 길은 앞서려고 다툴 필요가 없다. 먼저 가는 이에게 소리쳐 멈추게 할 이유도 없다. 더 좋은 길을 찾으려 곁눈질 할 일은 더더욱 없다. 그냥 가면 되는 길이 진리의 길이다. 힌두인들은 생각 없는 중에 더 깊은 생각이 있고, 질서 너머에 질서가 있고, 교양을 초탈한 교양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마치 우리네 혈관에 흐르는 피가 한 번도 비틀거리지 않고 온몸을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듯이 문명 너머의 문명으로 길을 만들어 간다.

힌두인들은 한 마음으로 디아를 따라 길을 간다. 디아는 신의 말씀이고 진리의 세계로 나를 건네주는 불빛이다. 그것은 생각 없이 반복하여 사소한 일상이 되듯이 몰두하거나 곤두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실행되는 교양을 넘어선 교양이다. 그들이 작지만 큰 발자국으로 수천 년 동안 만들어온 지선(至善)의 길이다. 작지만 꽃이 에워싸고 있기에 큰 불빛인 디아는 그 길을 가고 힌두인이 그 길을 따라 강을 건넌다. 강 건너 새로운 길에 진리가 있고 결국 신을 만난다. 진리는 아름다운 질서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부딪침이 없다.

나도 잠시 작은 불빛을 따라본다. 길을 통하여 세계가 내게 다가오고 나는 다시 세계로 나아간다.

 

                                                                          줄 / 이 방 주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설 때는 밧줄을 타야 했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는 높이가 20cm는 족히 되어 보였다. 고맙게도 누군가 손아귀에 꽉 들어찰 만큼 굵은 밧줄을 늘여 놓았다. 이렇게 갈라진 바위틈을 이른바 '침니'라고 한다. 갈라진 틈이 너무 좁아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더구나 갈라진 바위틈에 발이 끼인 채 잘 빠지지 않아서 한 발 올려 디디기도 어렵다. 때로는 체중을 바위틈에 간신히 지탱하는 발끝에 싣고, 손아귀로 움켜쥔 밧줄을 있는 힘을 다하여 당기며 한 발씩 올라야 한다.

 

아차하면 바로 낭떠러지다. 밧줄을 놓치고 미끄러져 떨어진 다음에 낭떠러지가 의미하는 것은 뻔하다. 그건 죽음이다. 여기에 밧줄이 없다면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그러니 자주색 밧줄은 생명줄이다.

 

어깨가 빠지는 것 같다. 가슴이 터질 듯이 숨이 가쁘다. ​밧줄을 잡은 손에 불이 날 것만 같다. 그렇게 밧줄을 힘들게 당기면서 가까스로 침니로부터 벗어났다. 이런 순간에 생사를 달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긴장감으로 온몸이 땀에 젖었다. 이마에서 솟은 땀이 흘러 들어갔는지 눈이 쓰리고 따갑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머리띠를 풀어 땀을 닦으며 내려다보니, 바위틈에 늘어진 자주색 밧줄이 신비스럽다. 생각해 보니 지나온 황정산 암벽에 늘여놓은 밧줄은 모두 자주색이었다. 자줏빛이라 더 튼튼해 보였다. 자줏빛이라 더 믿음직스러웠다.

 

​ <삼국사기>의 <탈해 이사금조>에 게재된 ‘김알지 신화’을 보면, 탈해왕 때 경주의 서쪽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서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자줏빛 구름이 땅으로 뻗치고, 구름 속의 나뭇가지에 금궤가 걸려 있는데,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궤를 내려 열어보니 아기가 있었는데, 그 아기를 태자로 삼고 ‘김알지金閼智’라고 했다. 그가 바로 경주김씨의 시조이다.

 

이 이야기는 신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화가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허황한 이야기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화가 상징성을 지닌다면, 여기서 자줏빛 구름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구름은 생명의 원천인 하늘과 일상의 공간인 땅을 연결하는 탄생의 줄을 의미한다. 신화적 공간에서 일상적 공간으로 내려오는 생명의 줄이다.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들은 대게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줏빛일까? 사람들은 왜 구름을 자줏빛이었다고 생각했을까? 신화를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닌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이야기 마당이라고 한다면, 자줏빛은 생명의 줄을 상징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진천 김유신 장군 탄생지 부근에 있는 태령산 장상에 올라가면 장군의 태실이 있다. 태를 소중하게 보관하는 풍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우리나라만의 문화이다.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의 일면이다. 태는 모체와 신생아를 연결하는 생명의 통로이다. 태를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가 오늘날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생명공학의 저력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탯줄이 바로 자주색이다. 자줏빛은 생명줄의 색이기에 황정산 자주색 밧줄이 더 믿음직스럽다.

 

 줄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생명은 줄로 이어진다. 피는 핏줄을 통하여 돌고, 몸 구석구석의 정보는 신경 줄을 통해서 뇌로 전해진다. 줄이 없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사회생활의 식량인 정보도 줄에 의해서 전해진다. 전화나 인터넷이 그것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줄을 타고 내게로 온다. 나에 관한 모든 정보는 줄을 타고 세계로 간다. 모든 에너지도 줄을 통하여 필요한 곳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줄을 통해 받은 에너지로 삶의 세계를 밝히고 생활 터전을 확장하며 생명도 연장시킨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줄도 있다. 보이지 않는 줄이 나를 끌어주고, 내가 남을 이끌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줄이 있어서 내가 남에게 연결되고, 남이 나에게 이어진다. 나는 기대를 걸고 보이지 않는 줄에 서기도 한다. 내가 선 줄은 목련같이 미더운 우정이 되기도 하고, 백합같이 향기로운 연정이 되기도 한다. 줄은 때로 미움이 되기도 한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튼튼한 밧줄을 잡아 하늘에 올랐으나, 포악한 호랑이는 썩은 밧줄을 잡았다가 떨어져 수숫대를 피로 물들이고 죽었다는 옛날이야기도 있다. 내가 거는 기대는 포악한 호랑이의 뒤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줄은 길이다. 좋은 세상으로부터 내게 들어오는 길이고, 나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세상에는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로 가득하다. 나는 길을 타고 세상에 나아가 역사라는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은 의미를 드러내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방금 땀 흘리며 타고 올라온 자주색 밧줄을 또 한 번 바라본다. 저 줄을 타고 지금 이 세상에 올라 왔지만, 언젠가 저 줄을 타고 다시 내려가게 될 것이다. 평화와 안락이 깃든 세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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