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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시대 / 민 명 자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2. 5. 1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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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 시대 / 민 명 자

 

  숨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봄날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갔다가 들어온 엄마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뒤꼍으로 나가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리니 되레 나가보라는 말처럼 들려 더 궁금했어요. 그때 영숙 언니네 집 쪽에서 갑자기 고함치는 소리가 났어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살던 집은 초가였습니다. 우리 집을 한가운데 두고, 왼쪽으로는 영숙 언니네, 오른쪽으로는 순희 언니네 집이 낮은 돌담을 경계로 둘러싸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양쪽 집 대청까지 훤히 보였지요. 두 집은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기와집이었지만 돌담 사이로는 가끔 부침개나 푸성귀 같은 음식들이 건네지곤 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안달이 날 지경이었어요. 아, 드디어 엄마가 자리를 비웠어요. 나는 얼른 뒷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뒤뜰엔 나비 몇 마리가 꽃잎처럼 날 뿐, 적막하기 그지없었어요. 설핏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낮은 돌담 키보다 웃자란 찔레나무엔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 꽃가지 옆에서 영숙 언니네 집 쪽을 보던 나는 그만, 헉, 너무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어요.

 마치 죄수가 포승줄에 묶인 것처럼, 영숙 언니의 두 손과 몸이 굵은 밧줄로 묶여 있었거든요. 몸을 묶은 줄은 대청 기둥에 매어 있었어요. 고삐를 풀려는 짐승처럼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언니 얼굴에는 원망과 절망의 표정이 가득했습니다. 놀라서 망연히 바라보고 서 있던 나는 그만 언니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어요. 얼른 찔레나무 옆에 쪼그리고 앉았어요. 꽃향기에 숨이 탁 막힐 것만 같았어요.

 ‘큰일 났다. 앞으로는 연극을 못 볼지도 모른다.’ 영숙 언니 처지가 걱정되었지만, 그보다 더 먼저 떠오른 건 언니가 연극 놀이할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묶여 있는 모습이 연극의 한 장면 같아서였지요. 당시 동네처녀들은 마루가 넓은 집을 빌려 연극무대로 꾸미곤 했습니다. 멍석을 펴놓은 안마당에는 주로 동네 조무래기들이 관객으로 앉아 있었지만 어른들도 간혹 끼어 있었어요.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에선 순희 언니가 이수일 역을 맡았고, 영숙 언니가 심순애 역을 맡았어요. 남장을 한 순희 언니가 “놓아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고 할 때, 영숙 언니가 순희 언니의 바짓단을 잡고 흐느낄 때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거나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습니다.

 동네 처녀들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이층으로 올라가면 방석이 놓여있는 마룻바닥, 그 좁은 예배당에 쪼그리고 앉아 우리는 기도를 했습니다. 왼쪽에는 풍금이, 가운데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과 낮은 제단이, 오른쪽에는 긴 가로막대에 넓고 하얀 종이가 걸쳐진 걸개가 놓여 있었어요. 누군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면 우리는 거기 적힌 가사를 따라 풍금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불렀지요.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꽈리풀이 많았어요. 주홍빛으로 잘 익은 꽈리 열매를 따서 꼭지를 살살 돌려 씨앗을 빼낸 다음에 입안에서 요리조리 굴리며 뽀드득 소리를 내는 것도 영숙 언니가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데 영숙 언니가 저렇게 묶여 있으면 같이 다닐 수 없을 텐데, 어쩌지?’ 난감하게 앉았다가 찔레나무 아래서 막 일어서려는데 언니네 집에서 분기탱천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시 또 연앨 했단 봐라. 그땐 다리몽둥일 분질러 집안에 앉혀 놓고 머릴 빡빡 깎아 버릴 테니까.”

 영숙 언니 아버지는 동네사람들이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무섭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그렇긴 해도 연애를 한다고 밧줄로 묶어놓다니. 있어선 안 될 일이었지요. 그 벽력같은 불호령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아, 연애라는 건 하면 안 되는 거구나.’

 그날 엄마도 호랑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말로 엄포를 놓았습니다.

 “너도 이담에 커서 멋대로 연애하면 영숙 언니처럼 꽁꽁 묶어 놓을 거야.”

 영숙 언니의 연애 소문은 찔레꽃 향기가 퍼지듯 바람 따라 솔솔 동네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영숙이가 연애를 한다네. 집안도 가난하고 직업도 변변찮은 녀석이랑 만난다고 호랑이 할아비가 길길이 뛴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긴 머리를 숭덩숭덩 가위질당한 언니가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호랑이 할아버지 몰래 집 밖엘 나왔다 들어가는 게 눈에 띄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아버지라도 딸의 “다리몽둥이”만은 차마 분지르지 못했나봅니다.

 언니는 결국 연애를 하던 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대한 믿음과 한결같은 순정의 승리였지요.

내가 조금 더 자라 중학생이 되었을 때 언니가 결혼해서 사는 집엘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탐스럽고 몽실몽실한 사내아이를 안고 있는 언니는 세상 모든 걸 다 얻은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어요.. 봄날의 열병을 치르면서 꽃이 피어나듯, 언니가 사랑의 열병으로 피워낸 생명의 꽃이었지요. 대청 기둥에 묶여 있을 때 하얀 찔레꽃 사이로 보였던 언니의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어요.

 언니가 연애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준 걸까요. 나도 커서 연애를 했습니다. 그 남자와 결혼도 했어요. 그이도 별로 부유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꽁꽁 묶이는 일 같은 건 없었어요. 그때 만일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나를 묶어놓으셨을까요.

 봄이 기울어가는 산등성이에 하얀 찔레꽃이 마구 피었습니다. 찔레꽃에서는 영숙 언니가 바르던 분내가 납니다. 일찍 핀 꽃은 이미 한쪽에서 이울고 있네요. 순수했던 시절은 져버린 꽃잎처럼 회복할 수 없는 동화 속 세계로 사라져 버리고,, 가난했지만 인정과 사랑이 살아있던 시절도 멀어져 가네요.. 이제 순수는 바보나 미성숙으로 치부되는 시대, 순결이나 순정이라는 단어도 화석화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럴수록, 영악하고 타산적인 사랑이 활개 칠수록, 한물 간 유행가 같은 사랑 불러내고 싶네요. 연극무대 뒤로 사라진 사랑, 하얀 찔레꽃처럼 순박한 사랑, 치열하면서 향기 짙은 순수 시대의 사랑, 커튼콜, 커튼콜.

 실종신고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실종된 시간을 찾습니다. 잃어버린 동심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영숙 언니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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