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것들 / 이 은 희
"우리는 얼마나 흔들리는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이는 성 프란시스가 자신의 깨달음을 친구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하루는 하인이 우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하였다. 물을 가득 채운 후 끌어올릴 때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던져 넣는 것이었다. 이상히 생각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을 퍼 올릴 때 나무토막을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게 되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요. 나무토막을 넣지 않으면 물이 제 맘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는 반 통 밖에 안 될 때가 많거든요”
이 일화逸話를 떠올리면 나는 언제나 넘치는 생명감을 느낀다. 흔들리는 것들에는 생명이 있나 보다. 아니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흔들린다. 물 한 통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출렁거림이란 심한 고통을 수반한다. 통 안에서 저희들끼리 아귀다툼하듯 요동을 친다. 그 출렁거림을 잠재우는 중재자로 나무토막이 필요하다. 그로 인하여 온전한 물 한 통을 길어 올릴 수 있단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햇빛에 눈이 부시다. 평화로운 하늘도 변화무쌍한 얼굴을 갖고 있다. 하늘도 심기가 불편할 때엔 먹구름을 보내고 이내 바람이 불며 서서히 비를 뿌린다. 그러다 성이 나면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집채만 한 폭풍우도 보낸다. 흔들림의 정도에 따라 그의 표정과 몸짓, 모습이 다르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거리에 바람이 세게 분다. 키가 멀쑥한 미루나무가 몸 전체를 흔들리고 있다. 구름과 닿아 있는 나무 꽂지를 올려다본다. 우듬지가 제일 둔한 것 같다. 그러나 나무는 바람이 시키는 대로, 하나인 것처럼 순하게 몸을 맡긴다. 지금 미루나무는 어떤 이와 함께 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 중 먼지일까. 아니 제 몸을 함께 나눈 형제, 가지와 잎사귀와 함께 한다. 그들도 제 나름의 고유한 이름과 성격이 있건만 분분하지 않고 하나로 움직이고 있다.
또 있다. 마치 바람의 정부인 양 굼실굼실 너울거리는 은빛 갈대이다. 그는 바람이 일면 머리를 마구 풀어 헤치고 풀밭에 드러눕는다. 그에겐 그 흔한 자존심도 정절도 없어 보인다. 형체가 없는 바람, 그가 시키는 대로 날카로운 잎새의 날을 세우고 제 살에 생채기를 내면서도 수걱수걱 비위를 맞춘다.
어디 흔들리는 것이 나무와 갈대뿐이랴. 사람들도 시시각각 흔들린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의 얼굴에선 이를 알아내기 힘들다. 하지만 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자신만은 속일 순 없으리라. 애써 숨기려 해도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눈빛,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 절망으로 절규하는 양심…….
거기에 인간의 욕심은 어떠한가. 아마도 흔들리는 것 중 단연 으뜸일 게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몇 년 전 직장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에 아파트 분양을 할 때다.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실수요자들이 아닌 차명을 빌어 계약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 빚을 내는 한이 있어도 아파트 분양을 받겠다고 유혹을 하였다.
"이 00, 참으로 바보야. 남는 장사야. 지금이 기회라니까." 옆에 있는 직원이 내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집이 한 채면 되지, 무얼 두 채씩이나 갖고 있어요." 나는 그의 솔깃한 유혹을 보기 좋게 거절했다. 그러나 어찌 나라고 아니 흔들리랴. 올곧은 가치관까지 흔들리게 만드는 사회, 유행병처럼 번지는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시대인 게 분명하다.
문득, 루오의 판화가 떠오른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고 하였다. 판화의 주제는 향나무 자신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고, 상처를 입힌 도끼날에 독을 묻히지 않고, 오히려 향을 묻혀준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은혜로운 보답이다.
우리의 인생길에는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할 강이 너무도 많다.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좌절과 아픔, 때론 분노와 절망으로 흔들린다. 그러나 욕심에서 일어난 파동을 잠재운다면, 마음은 어느새 고요해지고 희망이 움트리라.
그래, 하루하루를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으랴.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게 향을 묻혀 주는 향나무처럼 온전하고 순정한 삶의 증거인 나무와 갈대의 흔들림처럼 욕심을 버린다면 차라리 마음은 편하리라. 남은 생애를 좀 더 의미 있는 흔들림으로, 세상에 꼭 필요한 조력자로 거듭나기 위해 마음이 바쁘다.
무 / 이 은 희
역시나 녀석을 찾고자 뒤적인다. 나는 생선 조림을 먹을 때면 으레 녀석을 제일 먼저 찾는다. 날것의 싱싱함을 찾아볼 순 없지만, 그의 남다른 맛을 나의 혀는 여전히 기억한다. 누군가는 씹는 맛도 없는데 무에 그리 좋아 찾느냐고 말할지도 모르리라. 그것은 무의 맛을 진정 모르는 사람의 소리이다.
무란 녀석은 한마디로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든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전부를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맛도 확연히 달라진다.
생선 조림의 무는 생선의 자양분과 바다의 향기를 그대로 끌어안아 짭짤한 맛으로 변신한다. 또 김장 김치의 속에 박은 무는 어떠한가. 결이 삭은 무의 맛은 시원하고 새큼달큼하다. 무를 직접 먹어봐야 알지, 어찌 그 맛을 문자로 형용할 수 있으랴. 어디 그뿐이랴. 겨울날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속 납작하게 썬 무는 곰삭은 고추의 맛을 더하여 깨끗하다. 참으로 무는 변신의 귀재이다.
무를 예찬하고자 운을 뗀 것이 아니다. 남의 자양분을 자신의 것인 양 뽐내는 녀석의 이기심을 알리고 싶어서다. 무의 생장기를 살펴봐도 자신밖에 모르는 녀석임을 알 수 있다. 밭의 두둑을 차지하고 자라면서 푸른 얼굴을 세상에 내밀어 자신의 굵기를 자랑한다. 농부는 그 녀석이 잘 자라도록 가으내 거름을 주며 떡잎과 겉잎을 따주며 정성을 다한다. 마침내 햇볕을 가려주던 싱싱한 푸른 잎은 단칼에 제거되고 뿌리인 무가 인간의 손안에 들지 않던가.
어찌 보면 무는 인간 세상에 자식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나 또한 맏이로 태어나 땅에 닿을세라, 젖은 자리에 누울세라 애지중지 부모님의 품 안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당신의 육신이 망가져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식을 돌보는 것이 부모가 아니던가. 그런 부모님의 모습은 무가 자라던 밭이며, 푸른 잎과 같다. 자식의 걱정은 결혼해서도 끝이 나지를 않는다. 혹여 당신처럼 딸만 낳을까봐 정화수를 떠놓고 비손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 않던가. 그렇게 부모의 끝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자식은 성장한다.
그러나 자식은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 아니 모른척하는지도 모른다. 무가 식탁에 올라 인간의 뱃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녀석은 분명히 자아도취 상태였으리라. 남의 자양분을 빼앗아 지금의 자리를 차지했건만, 혼자 잘난 양 우쭐대다 인분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알겠는가. 자식 또한 마찬가지리라. 자신이 누구의 음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부모님을 모시길 꺼린다는 언짢은 기사를 보았다. 부모 봉양하기를 십이 년 새에 54%가 줄었다고 한다. 자식 봉양을 받지 못하는 홀로 사는 노인의 삶은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단다. 이 땅에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은 어디에도 없잖은가. 시쳇말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맞는 것이 성싶다. 무가 아무리 잘났어도 ‘무’ 일 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자식이 아무리 지위와 명성이 높다 해도, 혼자 태어나 장성할 순 없지 않은가.
이에 맞닿아 지인에게서 들은 서글픈 이야기가 떠오른다. 명성 높은 분의 어머님이 중병에 걸려 투명 중이란다. 그런데 잘난 아들은 업무가 바빠서 병원에 한 달에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고 한다. 아들은 두어 달에 한 번 얼굴 보이는 것이 무에 자랑이라고 여기저기 말하여 내 귀에까지 들리게 하는가. 자식을 그리워하며 홀로 투병할 그분의 어머님을 생각하니 이 땅에 자식으로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무가 싫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부엌에 들어가 간이 짭짤하게 밴 무를 달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시간이 꽤 흘렀건만, 무에 얽힌 나의 유년시절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는 무를 넣은 고등어조림을 만들어 아버지의 밥상에 자주 올렸다. 요리할 때 눈도장만 찍었지 생선에는 감히 젓가락을 델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난 그 빚을 갚으려고 무만 찾는지도 모른다.
나를 식물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무와 닮았으리라. 무가 이기적이라고 했지만, 그 이기심이 내 모습과 닮아 있어 싫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음식의 맛을 맛깔나게 돋우는 무처럼 잘나지도 못하다. 그러나 인간이 무와 다른 점인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현재의 삶은 자신이 매순간 행한 선택의 결과이다. 내가 부모님께 알게 모르게 저지른 행위나, 많은 사람이 부모 봉양을 꺼리는 일 또한 당신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법정의 “과거도 없다.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라는 문장은 지금 이 자리,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과거를 지울 순 없다. 그러나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며, 또 다른 과거에 후회를 줄이는 일이다. 그러기에 무에게 바치는 나의 애증은 지속되리라.
흠흠 / 이 은 희
촛불이 파르르 떨린다. 이어 너울거린다.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도 눈앞에 움직이는 이도 없다. 어떤 기류가 불꽃을 흔드는가. 분명히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정적이 감도는 공간에 무언가 저 혼자 살아 움직인다는 생각에 이르자 두 눈을 딱 감는다.
명상 중에는 후각이 대장이다. 두 눈을 감았으니 보이는 게 없고, 정적이 감도니 두 귀 또한 들을 게 없다. 촛불이 어느 정도 타오르니 아로마 향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이제 복식호흡이다. "흠" 숨을 길게 마셔 배를 동그랗게 불리고, "흠" 천천히 배가 복벽에 붙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숨을 길게 내쉰다. 몸 안에 향이 드나들자 긴장이 풀어진다. 참으로 편안하다. 향기 하나로 복잡한 일상을 지낸 나의 심신을 간단히 어루만지니 코는 대단한 능력자다.
얼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코. 그의 역할은 여럿이나,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감각 부분이다. 후각은 기체 상태의 자극물이 코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여 생기는 감각이라는 걸 모르는 이 없으리라. 명상 중인 나의 육체는 기부 ㄴ좋은 향기에 젖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나의 감각을 깨운다. 시각, 미각, 촉각, 청각, 후각 중에 냄새 감각인 후각만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코가 감각 전부인 양 유세를 부린다 해도 그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나는 신체 감각 중 후각이 뛰어나다. 아니 월등하리라. 일단 안경을 벗고 책을 보라면 어려우니 시각은 애초 승부 대열에 끼지 못한다. 청각 또한 젊은 날 이어폰을 끼고 학문에 열중하다 보니 왼쪽 귀가 낮은 소리에 약하다. 그러니 아쉽게도 청각도 탈락이다. 미각도 내세울 게 없다. 음식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즐기니 이 또한 남다른 매력이 없는 게 맞다. 촉감은 조금 유별나기는 하다. 통증을 못 참고 엄살을 부리니 오감 중 촉각을 순위로 정하라면, 아마도 이 순위에 들리라.
그러니 후각이 일 순위인 셈이다. 후각은 잊고 있던 과거의 시간을 불러 내 앞에 앉힌다. 과거의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냄새 맡은 것 자체가 싫던 유년시절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 놓는다. 옛집 마당은 돼지 축사고 그러니 좋은 냄새가 날 리가 없다. 축사 안 배설물 청소를 하고 나면, 분뇨 냄새가 온몸에 밴다. 몸을 씻어도 퀴퀴한 냄새는 코끝에서 오래 맴돌아 기분이 우울해진다.
집안에 축사가 있는 한 냄새를 말끔히 털어낼 수가 없다. 비위가 거슬리고 구릿한 냄새는 분신처럼 따라다닌다. 그놈의 향기도 내 집에선 그나마 참을 만하다. 불쾌한 냄새가 친구들에게 알려질까보 몸과 옷가지를 매번 '흠흠'거리며 확인한다. 기와집과 축사가 헐리고 아파트가 세워질 때까지 그 냄새는 나를 따라다녔다. 중학교에 입학하며 마침내 그 행위도 끝이 난 것이다.
후각은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능력까지 있는가 보다. 시간이 흐르니 과거의 기억을 어린 시절의 향수로 변화시켜 놓는다. 냄새 감각, 소리도 형태도 없는 것이 참으로 끈질기지 않은가. 옛 시절의 기억을 퍼올려 아직도 코끝에 냄새가 돌지만, 그 시절처럼 냄새가 지겹지도 싫지도 않다.
아마도 그 냄새와 더불어 그리운 것들이 밀려와 그런 것일까. 학교 가는 좁은 골목길에서 느꼈던 구수한 된장국 냄새와 마른 땅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풀풀 날리던 흙내, 아버지와 산길을 걷다가 느낀 쌉싸래한 낙엽 냄새…. 깊은 감성을 일으키는 향기가 후각을 스쳐 오랜 추억을 불러낸다. 이내 내 가슴을 봄비처럼 촉촉이 적신다. 아니 나의 메마른 정서를 순화한다.
요즘 향기마케팅이 대세이다. 사람들은 좋은 향기를 떠올리며 향을 좇아 장소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요가에서 명상을 즐기는 것인지, 향기를 즐기는 것이지를 똑 부러지게 분간할 수가 없다. 단 하나,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에게 냄새 감각은 살아 움직여 나의 지친 일상을 어루만진다. 그 덕분에 자연스레 새로운 날의 기운을 얻는다. 그리 보면 후각은 살아갈 힘을 주는 대단한 조력자가 아닌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오늘도 향기로 침묵의 감각을 깨운다. 아니 지친 육체를 냄새감각에 맡긴다. "흠" 향기로운 공기를 코로 길게 들이마시고, "흠" 내 몸 안에 불온한 공기를 코로 길게 내쉰다. 눈을 가만히 뜨니 촛불이 심지의 바닥까지 태우고 있다. 점차 향기도 촛불처럼 사위어 가리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상생과 소멸,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주 만물은 정녕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도는가 보다.
빗살 / 이 은 희
비가 온종일 추적거린다. 차창으로 번지는 빗물이 함박눈이라면 경치가 얼마나 좋으랴.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은 슬프다. 온난화로 정녕 눈을 보기 어려운 겨울인가. 여하튼 노박비가 산사로 가는 길을 막을 순 없다. 비 때문에 이래저래 인간의 마음만 뒤숭숭하다. 지인들은 찬비를 피하여 전각의 처마 밑에 서 있으나 각자 침묵에 든 모습이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웅장하던 고목도 고아하던 삼층석탑도 왜소하고 쓸쓸하게 보인다. 감상에 젖어 들 즈음 ‘비도 상처를 입힌다.’는 지인의 혼잣말이 귓전을 울린다. 순간 얼어붙은 사유에 비수를 꽂는다.
비가 상처를 준다는 말이 아이러니하다. 인간은 오늘 내린 비가 메마른 땅을 해갈하는 단비라고 부른다. 곧은 단비가 처마 밑 자갈돌을 무심히 부딪고 있다. 인정사정없이 한 곳을 파고든다. 보통의 단어로 알고 지냈던 비의 모습이 아니다. 빗살은 공중에서 떨어지며 상처를 예감한 것일까. 빗줄기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즐기던 감상주의자는 이제야 비의 실체를 확인한다.
극락보전을 서성이다 빗살의 현장을 목도한다. 빗살은 땅에 떨어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빗줄기는 누군가의 등을 두드리고 살점을 도려내며 서서히 스며든다. 오죽하면, 인간은 땅이 움푹 파이는 걸 대비하여 빗살이 닿는 지점에 자갈을 깔아 놓았으랴. 어디 그뿐인가. 찬비를 피하지 않는 사람도 위험하다. 대부분 빗살을 피하고자 하늘을 향하여 보란 듯 우산을 펼친다.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아야만 한다.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른다면, 온몸을 적시고 추위에 떨리라. 그러다 빗살이 비수가 되어 동사로 세상을 등질지도 모른다. 우주 만물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가는 빗살은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생채기와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빗살도 태양의 빛살처럼 이중성을 지닌다. 빗살은 대지에 상처도 주지만, 대지가 품은 풀꽃들에 생명수가 되기도 한다. 오늘만큼은 법당 앞 기와로 꾸민 아귀밥통도 행복하리라. 늘 허기가 진 아귀도 배가 부를 정도로 밥통에 빗물이 가득 고인다. 아귀(餓鬼)는 생전에 탐욕과 질투가 많아 아귀도(餓鬼道)에 이른 죽은 사람의 영혼이다. 목구멍이 바늘구멍 같아 음식을 삼킬 수 없어 늘 굶주리며 음식물을 구한다. 어찌하여 음식을 먹으려면 불이 되어 목으로 넘기지를 못한다. 그런데도 먹을 것 앞에선 서로 먹으려고 다투고 싸워 ‘아귀다툼’을 부른다. 아귀가 오직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부처님 전에 올린 청정수란다. 부디 오늘 내린 빗물로 그의 마음속 허기라도 달래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귀다툼을 벌이는 족속이 어디 아귀뿐이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난투극을 벌이거나 분노를 밥 먹듯 표출하는 사람이다. 도로에서 인정사정없이 모질고 쌀쌀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운전자가 떠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소리의 언어. 남자의 사나운 말은 정녕코 말살(抹殺)의 행위이다. 시간이 흘러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인간의 말도 빗살처럼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
말은 생물이다. 입에서 떠난 언어는 상대의 가슴에 남아 삶을 흔들리라. 살다 보면, 어떤 상황에선 진실이 왜곡되어 억울함을 침묵하고 지내야 할 때가 있다. ‘어찌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아가느냐’는 암묵적 말이 떠올라 입을 다문 적이 여러 번이다. 차라리 묵언수행이 감당하기 쉬울 때가 있다. 말을 많이 한 날은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낀다. 이런 날은 내가 쏟아놓은 말들이 허풍선이가 되어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의 혀는 뼈가 없어도 사람의 뼈를 부순다.’라는 속담이 있다. 말랑한 혀에서 내뱉은 말이 다른 사람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말살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는 마음의 허기가 다분한 사람이리라. 자신의 허기를 채우고자 생각 없이 내뱉은 가시 돋은 말에는 빗살과는 다르게 생명의 기운을 찾아볼 수가 없다. 평소에 알게 모르게 떠벌린 말속에 살(殺)이 돋은 적 있는지 조용히 돌아볼 일이다.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언어가 입에 감돌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곧은 빗살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빗줄기가 바닥을 치는 소리와 빗물이 바닥에 퍼지는 이미지가 어느 때보다 여운을 남긴다. 생명수가 된 단비가 숭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비꽃은 대지의 흙먼지를 잠재우고, 빗물은 목이 마른 계곡을 적시며 흘러가리라. 문득 나도 빗살처럼 누군가의 상처를 딛고 서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허물없이 지낸 가족이나 지인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며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빗살은 수수한 내 마음을 다독이듯 파고든다. 어디선가 비를 바라보고 있을 그대의 부질없는 욕망도 어루만져주길 원한다. 손바닥을 공중에 펼쳐 빗살을 받는다. 빗물은 손을 간질이며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린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빗살의 말씀이다.
폐타이어/이 은 희
폐타이어가 보기 좋게 버려졌다. 아니 그의 재탄생인가. 그 말의 뉘앙스를 수긍할 수 없는지 타이어는 반기를 든다. '버려진 듯 집 지키는 노구로 전락했거늘, 무엇이 재탄생이냐,'고 빈정거린다. 하지만 난 '제 눈에 안경 아니냐.'고 얼버무리며 말꼬리를 흐린다. 홀로 집을 지키는 칠순이 넘은 친정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다.
아무튼 난 폐타이어가 연출된 한 상점 앞에서 시선이 고정되었다. 상점과 보도를 가르는 경계지점, 그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얼기설기 엮어 놓은 울타리다. 담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적어도 속도를 잊은 채 구석에 버려진 폐타이어의 모습은 아니었다.
타이어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다. 소중한 생명인 속도를 잃어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팔과 다리격인 돌기도 닳고 닳아 없어지고 굵게 패인 빗살무늬도 흔적 없이 지워졌다. 구르고 구르다 남은 건 밋밋해져 번들거리는 몸통, 검은 원형일 뿐이다. 폐타이어의 심중에 묻어 두었던 말이 터져 나온다. '난 거침없이 내동댕이쳐졌어. 하지만 그대, 기억하는가? 영악한 인간의 삶과 역사를 함께했던 사실을 부인할 순 없을 걸. 내게도 화려한 시절은 있었지. 손수레의 바퀴로, 혼신을 다해 온몸을 바쳤던 자동차의 바퀴로. 그리고 모두 내 곁을 미련 없이 떠나버렸어…….' - 나의 주인은 생명의 영속성과 질주란 이름아래 매번 새롭고 싱싱한 것들을 찾아 나섰다.
인간이나 타이어나 별반 무엇이 다르랴. 무생물인 타이어가 어디 처음부터 무생물로 태어났으랴. 태초를 따진다면 생물이 아닌 게 어디 있을까. 인간의 편리를 위해 수없이 환골탈태의 과정을 거듭하였음을 모를 리 없다.
나도 타이어의 상처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모체의 자궁을 빌려 열 달 동안 호의호식하다 태어날 즈음, 내 어머니에게 찢어지는 고통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유아기를 지나 청년이 되어 자립하기까지 또 얼마나 부모 속으 태우며 성장하였던가. 타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모체인 파라고무나무는 따가운 볕에서 수년을 키워진다. 그리곤 어느 쯤에서 예고 없이 난도질을 당한다. 진집을 낸 그 자리에서 젖 같은 수액이 흐른다. 바로 탄성고무의 유액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의 몸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 여러 약품을 넣어 침전시킨다. 굳어지면 유황을 섞어 탄성이 좋은 고무를 만든다. 바로 그의 탄생이다.
모체의 곁을 떠나자 날개를 단 듯 둘 다 앞만 보고 달렸다. 타이어가 도로를 질주하듯, 나 또한 성공을 위한 길 위에서 멈출 수가 없었다. 질주가 목표이며 꿈인 양, 거침없이 내달렸다. 젊은 혈기로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자신만만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불혹을 넘긴 지금 내게 남는 게 무엇인가. 또 다른 나의 분신, 엄연히 개인 '나'는 아니다. 인간은 어차피 홀로 서서 고독하게 걸어가야 한다는 걸 익히 알잖는가. 현재의 직분과 명성,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없어질 칭호가 아닌가. 힘의 원리로 상징되는 돈, 이 또한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빈손으로 떠나가잖은가.
앞만 보고 억척스레 지내온 삶의 결과로, 여기 저기 부스럼처럼 일어나는 육체의 적신호. 내 몸을 돌보라는 신호이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물 불 가리지 않는 질주의 삶은 역시 부질없는 짓이다. 평범한 진리를 곁에 두고 그걸 깨우치는데 내게는 적잖은 세월이 필요했다.
아마도 폐타이어가 초장에 반기를 든 이유일 게다. 내 삶처럼 제 육신이 마모되는 줄 모르고 도로를 활보하였다. 까칠한 주이의 성정에 맞추느라 얼마나 애를 태웠을 것인가. 결국 목숨 줄인 '속도'를 잃어 버려진 자신의 모습, 바라던 종말은 아니었으리. 거기 울타리로 버티며 화려한 거리를 바라보다 '한 때는 나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겠지. 내가 추억을 회상하듯 폐타이어도 종종 거칠게 속도를 내던 그 시절이 그리울 것이다.
만약 타이어가 궤도를 이탈한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주인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겠지. 아니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주인의 생명이 제 목숨인 양 숙명처럼 여겼으니까. 그런데 난 내가 주인인데, 지금 무엇이 두려워 주춤거리고 있는 것인가. 시행착오를 반복해도 별 지장이 없잖은가. 설령 낯선 길로 들어선다 해도 이내 제자리를 찾아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과 직장을 위해 헌신하는 길만이 나를 위한 길인 줄 알았다. 정도의 길이라 믿으며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질주할수록 가슴은 늘 헛헛하게 느껴질 뿐, 내 삶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다 '질주'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우쳐 준 것이 문학이었다. 한유한 궤도이탈, 전업 외에 한눈팔기가 시작된 것이다. 문학의 길로 깊어질수록 그 묘미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나의 미래는 마냥 외롭지는 않으리라.
폐타이어로 엮은 울담, 아무리 둘러봐도 썩 괜찮은 울타리다. 검은 원형의 모습으로 스치는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일부에선 폐타이어는 환경의 적이라고 말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니 멋진 담으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가. 어느 찻집에선 탁자로도 사용되고 있다. 모든 만물은 흙에서 나고 자라고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걸 타이어는 암시하는 성싶다. 매일 이용하는 운동장의 바닥 또한 그대의 무릎 보호를 위해 기꺼이 가루가 되어 희생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나에게 심취해 서성이는 여자여, 아낌없이 주는 타이어를 들어본 적 있긴 한가?' 말풍선 터지는 소리에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타이어는 변신의 귀재였다. 하지만 난 불혹을 넘긴 후 기운 잃은 듯, 주춤주춤 되짚어가는 양 모든 일이 망설여졌다. 나도 화려한 변신을 꿈꾸고 있잖은가. 주춤거릴 순 없다. 다시 세상 속으로 거침없이 하이킥이다.
뿌리 깊은 나무 / 이 은 희
세 남자와 소나무 숲길을 걷고 있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약수터에서 오르는 이 길을 참 좋아한다. 오르막이 이어져 등줄기에 땀이 흐르면, 무거웠던 몸도 가벼워지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스치는 풍경도 일품이고, 아버지에게 힘들다며 쉬어가자는 엄살을 부려도 애교로 보이기 딱 좋은 코스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좁은 산길을 가로막고 드러누운 소나무를 발견한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낱낱이 지켜보던 소나무가 아닌가. 솔잎들이 성성한 걸 보니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싶다. 세월의 풍상에 꺾임 없이 청청하게 서 있을 나무라 여겼는데… 이럴 때 무엇이 문제인지 나무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뿌리째 뽑힌 소나무에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그 주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다.
엊그제 내린 폭설 탓인가 보다. 소나무가 어찌 허깨비처럼 뿌리째 뽑힐 수가 있을까? 겨울의 정취를 물씬 느끼고, 시련을 겪고 나서도 변치 않음을 상징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가 대나무와 매화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아니던가. 그런데 저렇게 가볍게 쓰러지다니……. 뿌리 깊은 나무라면 저리되지도 않았을 거다. 사람들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듯, 무에 그리 바쁜지 쓰러진 나무를 무심히 스쳐간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다.
며칠 전 진눈깨비가 내려 도로가 질척이더니, 저녁에 함박눈으로 바뀌어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다음 날 출근길엔 눈꽃 세상이 펼쳐져 환호성을 지르며, 마지막 눈꽃을 볼 기회라고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그림의 떡, 산으로 달려가는 자유인을 동경하며 구속된 처지를 한탄으로 끝이 났다. 폭설이 소나무 숲에 드리운 불길함을 소인이 어찌 알 수 있으랴.
산 위로 갈수록 소나무 잔가지들이 부러져 여기저기에 나뒹군다. 산중에서 살아본 적 없어 폭설이 내리거나, 폭우가 훑고 간 뒤에 산의 참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진정 그 말이 맞는 듯싶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이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산중의 정적이 무너진다는 소리를, 그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지인의 말을 말이다.
폭설로 산의 모습은 정녕 여느 때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난 후에 잔해처럼 널브러진 성성한 어린 가지를 보며 자연은 참으로 냉정하다고 느낀다. 절기상 해토머리인 점도 있지만, 나무를 저만큼 키우려면 수많은 세월이 흘러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무들의 발밑을 살피니 소나무는 낙엽송과 다르게 뿌리가 땅 위로 돌출되어 있다. 사람들의 수없는 발길질도 문제지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이니 어찌 많은 적설량을 견디겠는가? 무거운 눈을 이기지 못한 잔가지와 줄기를 단단히 채우지 못한 나무 또한 허리에서 뚝 부러져 있어, 자연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다시금 깨우친다. 이 모두가 우리가 편안하자고 만든 문명 때문이란다. 나날이 남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바다의 수온이 높아져 이상 기온 현상이 이어진다니 깊게 자성할 일이다.
사계절이 뚜렷하던 우리나라도 온난화로 봄과 가을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한다. 아름다운 두 계절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흘러간다고 여기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 모두가 과욕을 부린 탓이다. 다가올 미래의 환경을 예감하면서 그를 외면한 결과다. 심한 몸살을 앓고 있으면서도 말없이 가지 끝에 새움을 준비하는 나무들. 긴 겨울을 이기고 고개 내민 꽃망울의 낯빛은 맑기만 하다. 인간은 작은 상처에도 불편해하며 포기를 생각할 텐데 말이다.
오르막에서 유난히 숨 가빠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지난봄에는 청년처럼 오르내리던 산길인데, 당신이 먼저 ㅂ닥에 앉아 쉬고 있다. 얼마 전 갑자기 쓰러진 후유증인 듯싶다. 앞으로 아버지와 이런 멋진 산행을 몇 번 더 할 수 있을까? 진정 바쁘다는 핑계 달지 말고 아버지랑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다.
산길을 걸으며 잃어버린 초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다. 힘없이 쓰러진 나무는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 지금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인지 주위를 둘러보라고 하는 것 같다. 부질없는 일에 목숨을 내놓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우쳐 순간순간을 잘 살아내는 일이다. 부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내 삶도 사유가 깊어졌으면 한다.
뒤늦게 목표지점에 다다르니, 쉼터 의자에 안장 미소 짓는 세 남자가 보인다. 나를 세상 빛을 보게 한 아버지와 힘겨울 때 어깨를 내주는 남편, 모처럼 산행에 따라나선 아들이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내 곁에 있으니 든든하다. 하지만 물기 잃은 고목처럼 야위어 가는 아버지, 흔들림 없이 당신의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품개 / 이 은 희
어르신을 뵈러 가는 중이다. 아파트에서 꽃집으로 옮겨간 지 두어 달이 되어간다. 그동안에 품은 늘었는지, 벼슬은 올랐는지 궁금하다. 동생이 보내온 사진과 문자에는 약동감이 없어 아쉽다. 그래서 주말마다 알현하러 간다고 하니 ‘어르신’이라는 별명까지 붙는다. 어느새 날개가 돋아 가로막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린단다. 그 소식을 접하니 더욱 그들의 날갯짓이 보고 싶다. 날개를 편 듬직한 모습을 상상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는 “날개는 날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둥지 속에서 알을 품고 있는 날개는 날개가 아니라 품개이기 때문이다.”라며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품개’라는 단어를 짓는다. 더불어 “날개보다 더 소중한 날개인 품개”라는 문장을 만들어 타임캡슐에 넣어 젊은이들에게 남기고자 했다. 그 문장이 ‘너희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학이 아무리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하지만, 의아한 단어와 해석이다. 날개는 자유의 상징이 아니던가. 자유로이 날지 못하는 날개는 날개가 아니다. 그런데 날개의 본질을 떠나 ‘품개’가 더 소중하다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러다 뇌리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다. 날지 못하는 병아리가 식구를 품은 장면이다.
병아리를 갖고 싶다는 손녀의 갈망하는 눈빛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어렵게 주문한 병아리가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머나먼 길을 달려온 날이다. 딸이 병아리를 주저하여 우리 집으로 데려온다. 종이박스를 열어보니 다섯 마리 병아리는 기이하게 서로의 목을 감아 한 몸처럼 엉겨 있는 게 아닌가. 마치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라는 표어의 상징처럼. 내 상상으로는 낯선 곳에 도착한 병아리들이라 긴장하여 삐악거리며 뿔뿔이 나댈 줄 알았다. 그렇게 상상을 뛰어넘는 생경한 모습에 놀라고, 병아리의 형제애를 새삼 알게 된 것이다.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독후한 자매들의 모습만 같다.
나는 칠 남매의 맏이, 맏이 같지 않은 나이만 많은 사람이다. 꽃집 동생을 떠올리면 자주 그런 생각이 들어 무람하다. 친정 형제가 거의 2년 터울로 여동생 다섯에 막내로 남동생 하나이다. 식구가 많아 바람 잘 날 없었던 시절이다. 부모님은 무슨 일이 생기면 맏이를 불러 걱정을 나누니 어깨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걱정을 끼치는 여동생에게 다정하게 다가서지 못하고, ‘자신의 앞길은 스스로 헤쳐 나가라.’고 나무란 적이 여러 번이다. 그리 불편한 감정으로 돌아서 서로 자신의 가정을 챙기느라 속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도 못하고 지낸 것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꽃집 동생은 변함없이 친정 가족을 품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스치지 못하듯 동생들이 꽃집을 찾아가는 것이 그 증거이다. 동생은 사람을 편안하게 대하는 재주가 있다. 동생들의 고민거리도 들어주고 많지도 않은 자신의 것을 나누기도 한다. 그렇다고 꽃집 동생이 재물을 넉넉히 가진 건 아니다. 형제들과 정답게 지내는 모습은 보기가 좋으나 그 집 살림을 축내는 것 같아 오지랖 넓은 동생의 날갯짓을 걱정하며 “네 것 좀 챙기며 살라.”고 군소리하게 된다. 큰언니로서 동생들의 형편이 고만고만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꽃집 동생이 아니면 병아리의 보금자리도 해결되지 않았으리라. 병아리는 두 달 만에 중닭으로 변신한다. 아파트에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작아 걱정이다. 고민 끝에 꽃집 여동생에게 ‘족보 있는 병아리고, 20년을 산다.’고 구구절절 얘기하니 마지못하여 허락한다. 동생은 고맙게도 이틀 후에 손수 보금자리를 만들어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이러구러 미물인 중닭도 여동생이 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꽃집에 갈 때마다 눈여겨보니 매일 들락거리는 이웃사촌이 한둘이 아니다. 옆집 상가 주인도 내 집처럼 들락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폐지를 가져가는 노인에게도 매일 따스한 커피를 대접하는 동생이다. 더욱이 할아버지의 후일담을 듣고는 동생이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 만나게 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가 보다. 여동생이 미장원에 파마하러 갔다가 꽃집을 한다고 하니 손님 중의 한 분이 묻더란다. 자신의 아버님에게 폐지를 모아주신 분이냐고. 당신의 아버님이 말기 암환자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아버님이 병실에 누워 고마운 꽃집 여사장님이 자신을 기다릴 거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단다. 여동생 또한 할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아 궁금하던 터에 어르신의 근황을 들었다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성공의 날개를 달길 원한다. 하지만 대부분 성공을 구가하다 성공에 미혹되고 취하여 자신의 본모습을 잃어버린다. 아니 가장 빛나던 순간에 이카로스처럼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돌아보니 나의 날개는 힘이 잔뜩 들어가 무거워서 날 수 없는 날개이다. 동생의 보이지 않는 날개는 인정(人情)을 품는 날개, 자신의 품안에 든 사람은 누구든 품고 있다. 이어령 교수가 말한 ‘품개’가 아닌가 싶다. 어린이집을 오가는 손녀에게 병아리를 키우며 생명 존중의 의미를 알게 하려다 도리어 날개의 새로운 의미를 깨우친다.
꽃집을 나서며 아쉬움에 닭장으로 다가선다. 닭장을 살며시 열어보니 어르신들이 날개와 날개를 포개어 주무시는 중이다. 세상에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평온한 모습으로.
드러누운 나무 / 이 은 희
눈이 쌓인 저수지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먼저 다녀간 이들이 많다는 소리이다. 나무와 가을에 보자는 약속을 까마득히 잊고 지낸 것이다. 그러다 문득 드러누운 나무가 떠올라 방죽골을 한겨울에 찾았다. 그것도 코끝이 찡하고 얼굴에 반점이 피어오르는 추운 날 말이다.
혹여 물에 빠질까 봐 몸을 바싹 움츠리고 발자국을 따라 나무 곁으로 다가간다. 여름날 잎이 무성했던 나무의 모습은 흔적 없고, 무수한 잔가지만 하늘을 향하여 삐죽삐죽 솟아 있다. 반쯤 드러난 나목의 굵은 줄기는 물기를 털기 위함인지 햇볕을 쐬고 있다.
저수지가 꽝꽝 얼어 왕버드나무를 자유자재로 담을 수 있어 좋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매얼음 속에서 '나, 여기 있어요.'라고 나무가 수런거리는 듯하다. 그래, 내 발밑 물속에선 버드나무와 물고기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으리라.
순간 도산서원 앞마당에 누운 왕버드나무가 떠올랐다. 그 나무와의 첫 만남도 신록이 무성한 초여름, 사람들은 대지에 드러누운 버드나무 곁을 무심히 빠르게 스쳐지나 화려한 모란 무더기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나무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향기로운 꽃향기에 취하여 사진을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강줄기를 향해 길게 드러누운 신기한 나무에 마음이 꽂혀 움직일 수가 없엇다.
버드나무가 물가나 습지에서 자란다 하지만, 동안에 내가 본 버드나무는 가늘고 긴 가지를 치렁치렁 물가로 내려트린 꼿꼿이 선 나무였다. 오래된 나무가 대지에 드러누워 자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기햇다. 나무에 관하여 더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여러 각도에서 그의 자태를 사진에 담아 폴더에 가둬 두었던 터였다.
방죽골 저수지에서 담아온 사진 카페에 올린다. 눈 위에 몸이 반쯤 드러난 나무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땅속에 묻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폭설에 고목이 쓰러진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내가 나무의 이력을 말하지 않으면 그가 누운 자리가 얼음 속이라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숨탄것들은 사계절을 지켜봐야 그의 모습을 제대로 안다고 했던가. 사람도 마찬가지일 성싶다. 생면부지인 사람의 속내를 어찌 첫 대면에 알 수 있으랴. 수십 년간 곁에 둔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여름 한 철 본 나무의 생애를 어찌 안다고 보았다고 말할 수 있던가.
저수지 왕버드나무를 찾지 않았다면, 나도 나무를 무심히 스쳤으리라. 나와 나무 사이에 흘렀던 애잔한 마음도 영영 잊히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원의 나무와 방죽골 나무와 다른 점을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속에 드러누운 방죽골 나무와 다르게, 도산서원 나무는 대지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무의 우듬지가 강가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햇다.
예전 서원의 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 강물이 흘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 자리를 대지로 만드느라 성을 쌓듯 흙으로 매웠다고 한다. 땅속에 묻힌 버드나무 일부분까지 상상한다면, 아마도 거목일 게 분명하다. 아마도 나무의 바람은 귀향이지 싶다. 나무의 우듬지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이 도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과 흙은 토양이 전혀 다른 물성이다. 대지에 발을 묻고, 머리를 강가로 향한 나무는 귀향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확인한 셈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한다.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종종 있잖은가. 조금만 관심을 둔다면 알고도 남을 일이었다.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세계, 그 세계를 알려면 적어도 나무의 이력과 그 자리에 역사를 어느 정도 파악해야만 했다.
세상은 모든 일은 드러누운 나무처럼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내가 다를 수 있다. 물론 비슷한 부분도 있으리라. 그러나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듯, 그의 마음을 읽는 일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나 또한 곰곰이 뜯어보면, 가면을 쓰고 있을 때가 있다. 남들이 나를 말할 때 카리스마 넘치고 당당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지만, 내가 보는 나는 소심하고 가녀린 갈대처럼 흔들릴 때가 잦으니까. 강한 척 나를 포장한 것은 변명 같지만,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다.
그래,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 보호쯤으로 해두자. 내면은 이해타산을 초월한 자연에 은거한 선비다운 면모가 되고 싶어 애쓰고 있잖은가. 내면의 차이를 어찌 눈에 보이는 자태로 표현할 수 있으랴. 내 깜냥으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차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지구만큼의 크기, 아니 우주의 넓이만큼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 드러내는 일, 그리고 시각 차이를 줄이는 일, 아마도 그건 내가 죽도록 해야 하는 작업, 글쓰기이리라. 정녕 그 일을 사명처럼 해야 한다면,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엄청나다. 그러려면 우선 겉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내면의 도를 닦아 심안과 혜안을 넓혀야 하리라.
왕버드나무는 아마도 세상일을 달관한 자, 아니면 모든 걸 비우고 자연으로 귀향한 자일 것 같다. 그리 생각하니 나무가 그리워진다. 땅풀림머리 전, 매얼음 속 수런거리는 버드나무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번에는 눈보다 마음을 먼저 활짝 열고 보련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무는 나에게 말을 걸리라. 소리 없는 수런거림에 내 가슴은 벅차리라.
몸시詩 / 이 은 희
아이들이 후미에서 와글거렸다. 달려가 보니 말라죽은 나무 앞이다. 뭉툭하게 잘린 표면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한 아이가 다가가 손가락으로 왼쪽 구멍을 후벼댄다. 마치 자신의 콧구멍을 후비는 양 얼굴을 찌푸린다. 지켜보던 애들이 까르르거린다. 나무에 돌기가 돼지코를 쏙 빼닮았다. 사진기를 들여대는 내게도 콧김을 내뿜을 태세다. 나무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일으키며 자지러질 수밖에 없는 동물의 형상이었다.
방금 내가 아무 의식 없이 그 옆을 스쳐간 고사목이다. 평생 난쟁이로 키운 몸피가 한 아름이나 될까. 그 흔한 푸른 바늘잎 한 잎도 없다. 몸채가 미끈하게 뻗은 나무도 아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듯 허옇게 메말라 길목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무가 뿌리내린 곳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이니 거치적거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지를 어느 정도 잘라낸 모양이다. 뭉뚝하게 드러난 표면이 돼지의 들창코와 흡사해 아이들의 시선을 잡았던가 보다.
무주 설천봉 주위에는 말라죽은 주목이 군데군데 서 있다. 생명이 없다고 해서 밑동이 뚝 꺾어져 누워있는 나무는 아니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고 하였던가. 몸통은 여러 갈래로 터져 갈라졌지만, 잔가지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힘이 있어 보인다. 봄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가지를 살랑이며 산바람을 실어 날 것 같다. 나무에 여기저기 박인 옹이가 대변하듯 지나온 역사를 기억하여 내 앞에 토해낼 것만 같다.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였다. 죽어서 천 년을 사는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삶이란 이런 거다' 이렇게 살아내면 된다.'라고 나무에서 나는 어떤 해답이라도 얻고 싶었다. 천 년을 살고, 또 천 년을 산다고 하니, '삶'에 관해선 도통하고도 남을 것이 아닌가. 나이가 들수록 사리를 분별하는 일이 어려워지니, 그가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면 탄탄대로겠지. 나무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싶다. 그러나 그런 내 상념에 헛웃음 터진다. 일전에 본 거목, 전나무가 밑동이 문드러져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오대산 전나무 숲길을 걷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사진 속에서 본 그 길이었다. 올곧게 쭉쭉 뻗은 나무들을 보면서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늘 상상 속에서만 걸어본 길이었다. '나무들이 어쩜 이리 유려할 수 있을까?'라며 감탄을 거듭하였다. 숲길이 끝나는 약수터까지 어찌 그길을 걸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였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였다. 방아다리 약수터에서 약수로 입가심하고 위쪽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산으로 더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나무로 방책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아래에는 크나큰 전나무가 맥없이 누런 속살을 내놓고 쓰러져 있었다. 살펴보아도 누군가 나무를 가해한 흔적은 없었다.
나에게 쓰러진 나무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곳을 벗어나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내 모습을 꼭 보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주위에 사, 오십대 돌연사가 유행병처럼 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악바리처럼 고생하여 가정도 안정되었고, 여유가 생겨 햇빛을 볼 즈음인데…. 가뭇없이 쓰러져 사회활동을 못하거나 세상을 등지는 이들이 종종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질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가 보다. 어느 쯤에선 멈춰 서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재충전할 기회를 만들며, 생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했지. '늦었다고 느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람의 외양과 속내가 다르듯 나무들도 마찬가지인 성싶다. 내가 보았던 고사목도 쓰러진 전나무와 비슷한 환경인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물론 자라다가 비바람에 쓰러지는 나무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내력을 읽어내듯, 나무의 몸피를 둘러보며 생의 내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목은 모든 것을 안으로 품어 감내하는 부류처럼, 볼썽사납게 툭툭 불거져 나온 옹이들과 어른 허벅지만큼 굵은 곁가지를 달고 있다. 그리고 죽어서도 숨김없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전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 중 하나이다. 내가 본 나무는 사람으로 치면 부유층, 자싯물에 손 한 번 담그지 않고 곱게만 자라온 생처럼 보인다. 줄기에 군더더기가 없듯 곁가지는 작거나 많지 않고, 굵기도 얇디얇다. 상처 한번 입지 않은 사람으로 키운 듯 움푹 박힌 옹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고요하고 그윽한 풍경을 자아내는 사찰 등지에서 풍치수로 흔히 심는다니 과히 그럴 만하다. 남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으며 웃자란 나무라서 그런지, 생을 다할 때도 가뭇없이 쓰러지고 마는가.
향적봉을 내려와 다시 그 자리에서 서성인다. 내가 던졌던 질문의 답은 얻을 수가 없다. 아마도 고사목은 묵언 수행 중인가 보다. 나무는 아무리 봐도 들창코다. 이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아이들의 장난이 떠올라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 온몸으로 자신의 생을 보여주는 고목이다. 나무의 몸은 바람의 집인 양 구멍이 뚫린 곳으로 바람이 무시로 통하고, 작은 동물들이 더부살이해도 말이 없다. 그 품성은 꼭 몸으로 시詩를 쓰는 나무를 닮았다.
주위에 나무처럼 치열하게 몸시詩를 쓰며 사는 이들이 많다. 그 시를 세상에 발표하지 않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난 그들에게서 알게 모르게 자극을 받는다. 밥 먹는 일에만 쫓겨 종종대며 살았다고 남기고 싶진 않다. 얼마 전 고인이 되신 박경리 선생께서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남길 수 있으면 좋으리라. 내 남은 생애엔 외양이 화려하거나 미끈한 시詩보단 울퉁불퉁하지만, 잎품이 넉넉한 나무를 닮은 몸시詩를 쓰며 흘러간다면 더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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