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 장미숙
자전거가 푹 주저앉아 버렸다. 공사현장 옆 도로를 구르고 난 뒤였다. 뒷바퀴 타이어에서 쉭쉭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자전거가 묵직해졌다. 자전거를 타는 게 아니라, 땅을 숫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날카로운 뭔가 바퀴에 구멍을 낸 게 분명했다. 타이어는 벌써 바람이 다 빠져 버렸는지 납작하게 땅에 붙어 있었다.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수리점을 찾았다. 굴러갈 때는 한없이 가볍던 바퀴가 끌고 가려니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수리점 아저씨는 손쉽게 자전거에서 바퀴를 분리했다. 바퀴가 분리되자 자전거는 순간 기능을 잃고 기우뚱댔다. 바닥에 널브러진 바퀴를 보고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찼다.
“아따, 요놈도 엔간히 힘들게 살아왔네. 너덜너덜한 게 어지간히 굴러 다녔는갑소. 웬만하면 새 타이어로 바꾸는 게 좋겠소.”
아저씨는 대수롭잖게 타이어를 툭툭 쳤다. 쪼그려 앉은 내 시야에 타이어가 가득 들어왔다. 처음에 선명하고 단단했던 무늬는 닳아서 매끄럽게 변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못에 뚫려 땜질한 자국, 껌 딱지가 붙었다 떨어진 흔적도 남아 있었다. 수직으로 있을 때는 질주의 본능으로 야생 같던 바퀴가 수평으로 누워 있으니 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등으로 받쳤던 세상이 힘겨웠던 것일까. 바퀴는 이쯤에서 쉬고 싶다는 듯, 바닥에 등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바퀴에서 화석을 보았다. 바퀴가 지나온 세상의 온갖 길들이 타이어에 거친 무늬로 남아 있었다.
세월을 거스를 수도 운명을 피해갈 수도 없는 건 사람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인 것 일까. 조금 느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요즘 들어서다. 탱탱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늘 긴장과 조급함으로 달려왔던 날들이 내 등을 후려치는 일이 많아진 것도 요즈음이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면 그대로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잦아졌다. 시간의 그늘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을 때도 여러 번 찾아왔다.
지난 날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들 속에는 희망이랄지, 보상이랄지 이런 단어들도 함께 했었다.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서 손을 내밀지도 모를 행운 같은 것도 기대했다. 거친 길을 구르다 보면 언젠가는 탄탄대로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다소의 자긍심도 있었다.
기대는 단지 기대에 불과하고,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실체이지만, 생의 바퀴를 끊임없이 구르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 힘에 나사가 풀리듯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에 대한 불안은 거대한 블랙홀인 갱년기의 늪에 날 가두어 버렸다. 풀리지 않는 경제난은 이미 포화상태인 내 등에 노동의 시간을 덤으로 얹어 주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해독이 어려운 남편의 성격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있는 덫처럼 다가왔다. 그 모든 것들의 시초는 달려온 길보다 달려갈 길이 더 짧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전거 바퀴는 구르는 게 본능이다. 곧은 길, 거친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언틀먼틀한 길, 질척질척한 길이라고 뒷걸음치지 않는다. 질주의 본능은 몸에 수많은 상처를 새긴다. 불쑥 튀어나온 가달썩에 긁히고, 심지어는 날카로운 못에 찔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곧은길에 서면 비거스렁이를 만난 듯, 바람의 방향마저 바꿀 기세로 달려 나간다. 꽃길에서는 낭만을 온몸에 걸치고 휘파람소리로 계절을 유혹한다. 그럴 때 자전거 바퀴는 지나온 거친 길에서 몸에 새겼던 상처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꽃향기에 마냥 신이 나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다. 굴러가는 본능은 나쁜 기억을 지우는 힘이 있다.
인생의 바퀴도 자전거의 바퀴처럼 쉴 새 없이 굴러간다. 내 삶의 바퀴도 주어진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자전거 바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누구나 같은 시간을 부여받지만, 각자 가는 길은 다르다. 가는 길이 다르니 잃는 것도 얻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질척한 길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 바퀴가 있는가 하면, 매끄럽게 다져진 길을 장애물 없이 달려가는 생도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흘러가는 한 절대 멈출 수 없는 게 삶이다. 하지만, 삶이 팍팍해질수록 인생의 바퀴는 숨이 차다. 주저앉고 싶은 오르막길이 있는가 하면, 안간힘을 쓸수록 헤어 나오기 힘든 수렁도 있다.
자전거 바퀴의 선명했던 무늬가 닳아버린 건, 그만큼 거친 길을 굴러왔다는 증거다. 구를 수밖에 없는 숙명 앞에 그래도 당당했던 한 생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바퀴는 몸의 무늬를 지우면서까지 달리고 또 달리는 데 충실했다. 내 삶의 바퀴는 어떤 그림으로 남게 될 것인가. 누군가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아름답진 못하더라도, 숙연함을 줄 수 있는 삽화(揷話)하나 쯤 새겨 넣었을까.
내려놓을 수 없는 삶의 무게는 내 얼굴에 거부할 수 없는 그늘로 남았다. 아무리 표정을 밝게 해도 감출 수 없는 그늘 앞에 나는 가끔 가슴이 무너진다. 우유부단한 성격과 순응적인 삶에 길들여진 나약한 마음은 스스로 내 등에 짐을 올려놓은 결과가 되었다. 사명감으로 시작한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자갈밭을 구르는 바퀴였다. 구르면 구를수록 짐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나는 짐을 끌다시피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몸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 없었다. 피가 흐르면 쓱 닦아버리고 치료도 못한 채 또다시 굴러야 했다.
어느 날은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길이었다. 굽도 젖도 할 수 없는 아득함 속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온몸의 무늬를 지우면서라도 앞으로 굴러가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불합리한 삶에 대항하지도 못한 채, 스스로 상처를 냈다. 가슴을 쥐어뜯을 때마다 상처는 점점 크게 번졌다. 누군가에게 드러내놓을 수도 없는 상처 앞에서 꺽꺽 울음을 삼키는 사이, 내 몸의 푸른 기운은 점점 엷어져 갔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 내가 못나서 선택한 길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견딜 만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마지막 힘이었다. 그렇게 이십년이라는 세월을 쉬지 않고 굴러왔다. 돌이켜 보면 아득하기만 한 날들이었다. 내가 지나온 길인데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길들일 만큼 험난하고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았다. 자전거 바퀴의 흔적처럼 상처로 얼룩진 내 가슴이 요즈음 아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달리고 싶다. 잠자리에 누워 영원한 잠에 빠져들고 싶던 마음도 아침이 되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늘진 시간 속에 웅크리고 싶던 못난 마음도 단련된 일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기에는 가야할 길이 너무 짧은 탓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강한 채찍질 앞에 나는 다시 주먹을 불끈 쥔다.
삶의 바퀴는 닳을 대로 닳아 너덜거리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한 희망이 있기에 몸을 일으켜 세운다. 다행인 것은 수많은 길을 굴러온 탓에 넘어지면 일어서는 힘을 길렀고, 상처를 싸매는 법도 알아냈다는 것이다. 오르막길에서는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배웠고, 두려우면 뒷걸음질 치기보다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마, 구를 힘이 남아있는 한 내 삶의 바퀴는 멈추지 않으리라. 내가 굴러가야 할 길이 저만치서 손짓한다. 지친 시간을 다독거리며 인생바퀴의 페달에 나는 한 발을 힘차게 올려놓는다. 다시 시작이다.
의자 / 장 미 숙
매장 앞 도로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노인의 등이 낯설지 않다. 근처 마트 앞에서 자주 마주치는 노인이다. 낡은 파란색 조끼와 구부정한 등에 쌓인 세월의 그림자가 짙다. 노인은 인도와 차도 경계에 앉아 있다. 오늘은 햇볕이 달라붙은 시멘트 바닥이 그의 휴식천가 보다. 폐지가 가득 실린 손수레를 옆에 두고 노인은 미동이 없다. 노인의 존재에 아랑곳없이 차들은 매연을 뿜으며 지나간다. 차 안에 있는 사람들도, 길가는 사람들도 무심하다. 노인 또한, 매연이나 소음에 반응하지 않는다. 휴식이 필요해 보이지만, 폐지를 줍는 그에겐 정해진 자리도, 정해진 시간도 있을 턱이 없다. 앉는 곳이 그의 삶이고, 다리를 뻗는 곳이 그의 쉼터다.
도로 건너편에도 두 사람이 쪼그려 앉아 있다. 그곳은 건설자재 회사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회사 인부들이다. 두세 명이 매일 그렇게 앉아 담배를 물고 있거나, 일회용 종이컵을 들고 있다. 쉴 곳이 따로 없는 그들에게는 작업장이 쉼터로 보인다. 간이의자 하나 없이 천막과 트럭이 있는 그곳에서 인부들은 피로를 푼다. 그런데 왜 그들은 꼭 쪼그려 앉아야만 하는 걸까. 늘 같은 자세를 고수하는 걸 보면 환경은 불편함마저 무디게 만드는가 보다. 바로 옆에 사무실이 있지만, 그들이 출입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여름에도 그들은 천막 밑에 옹색하게 앉아 있다. 시원한 사무실에서 의자에 앉아 일하는 사람들과의 괴리만큼이나 그들에게 의자는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일까.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면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거리에 나는 서 있다. 내가 가끔 그들을 바라보듯, 간간이 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쪽을 향해 빤한 시선을 두고 있을 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빵집 직원과 건설자재 회사 인부가 가진 공통점이라면 누군가에게 고용(雇傭)된 사람이고,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공통점이 있다. 서 있는 자도, 쪼그려 앉은 자도 의자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부들도,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도, 프랜차이즈 가맹점에서 일하는 나도 모두 의자가 없다.
사회라는 큰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의자를 갖지 못한다는 건, 열악한 환경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의자가 없다는 건 부리는 자가 아닌 부림을 받는 자일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의자는 노동의 강도를 개별화시키고, 심리적 열등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의자가 가진 힘을 몰랐을 때, 의자란 언제든지 앉고 싶을 때 앉을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자는 그런 게 아니었다.
맨 처음 의자는 내게 열등감으로 다가왔다. 스물 몇 살 때, 간절히 의자가 갖고 싶은 적이 있었다. 가난과 가정환경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열일곱 살에 공장에 들어갔다. 의류 포장지를 제조하는 공장은 대기업 하청이었다. 공장 환경은 열악했다. 온종일 돌아가는 기계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손은 기름때로 새카매졌다. 벤젠(benzene)을 다루다 보니 손끝이 갈라지기도 했다. 가장 힘든 건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일이었다.
순수와 두려움만이 나를 지배했을 때, 도시는 내게 거대한 세상이었다. 촌아이에게 일을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사회 구조의 속성을 알아가면서 욕망과 노력이 때로 힘을 발휘한다는 걸 깨우치게 되었다. 큰 작업장 안에는 작은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현장 사무를 보는 곳이었고 내게는 별천지 같았다.
나는 사무실 직원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여직원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폭신한 의자에 앉아 벤젠 대신 펜을 들었다. 작업장의 소음에 시달리지 않아도, 먼지를 마시지 않아도, 손이 거칠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추위와 더위로부터 온전히 보호받았다. 그녀는 현장 직원들 위에 군림했고, 커피라는 귀한 음료를 마시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를 동경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기계에서 나오는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비닐을 간추리며 사무실을 힐끔거렸다. 몇 년이 지난 뒤, 기회가 왔다. 누군가의 입에서 사무실 여직원이 그만둘 것이며 현장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말이 나왔다. 틈틈이 책을 읽고 작업 집계를 하던 내가 적임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폭신한 사무실 의자에 앉은 나를 상상하며 더 열심히 회사 일에 매달렸다.
하지만, 나는 배제(排除)되었다. 다른 사람이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녀는 현장 여직원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침이 마르도록 날 칭찬하던 관리자들도, 글씨를 잘 쓴다고 추켜세우던 사람들도 등을 돌렸다. 중졸 학력은 의자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가르쳐주었다. 그 후, 나는 스스로를 하향(下向)시켰다. 구인광고를 볼 때도 의자는 애써 피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지레 겁먹었다. 차단당하기 싫어 미리 포기해 버리는 거로 얇은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결혼 후, 오 년 정도 의자에 앉아 본 적은 있다. 마을문고에 도서대여 봉사활동을 지원했을 때, 아무도 내게 학력을 묻지 않았다. 지원자들의 수준을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봉사 내내 고졸 행세를 했다. 돈을 받고 일하는 게 아니어서 양심의 가책은 덜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의자의 무게에 짓눌렸고 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먼 길을 돌아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지만 학교에서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자세로 앉을 수 있었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의자에 대한 설움을 털어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나는 의자에서 밀려났다. 학생의 신분이 아닌 직업인이 되었을 때, 나이는 걸림돌이었다. 중년의 아줌마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흔치 않았다. 내가 빵집에서 일하게 된 이유였다.
온종일 서서 두 다리로 삶을 지탱한 지, 칠 년이 되어간다. 해가 바뀔 때마다 몸이 조금씩 기우는 걸 느낀다. 한 평 남짓한 나의 작업공간에 의자는 없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데다, 앉을 시간도 없어서다. 내 의자가 없을 뿐, 매장에는 의자가 많다. 손님들이 편히 차를 마시며 쉬어갈 수 있도록 은은한 조명 아래서 의자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의자가 비어 있어도 내가 앉을 수 없는 곳, 직원인 나는 의자의 주인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열 발자국 거리에 있는 의자가 심리적으로는 한없이 멀다. 건설자재 회사 인부들이 굳이 쪼그려 앉는 것도 심리적인 거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끔 본분을 잊고 의자의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다. 몸이 아프거나 밥벌이가 유난히 힘든 날이다. 그럴 때면 어딘가에 있을 내 의자를 생각한다. 주인을 만나지 못해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을 의자, 학력도 나이도 다 떨치고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그 의자를 생각하며 무너진 다리를 곧추세운다.
창밖을 보니 노인이 없다. 건너편 인부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휴식처가 되었던 자리에 나무 그림자만이 꾸벅꾸벅, 피곤한 오후를 갈무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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