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 김이랑
어느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일까. 플랫폼에 내리자 옛 성문城門같은 역사驛舍가 나그네를 맞는다. 문을 지나면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빛바랜 간판에 허름한 건물이 펼쳐진다. 떡집, 양복점, 상회, 토속이 묻어나는 건물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높이를 다투지 않는 나지막한 건물, 바쁠 것 없다는 듯 느릿한 몸짓들, 관성에 브레이크가 걸리자 도시인의 걸음이 잠시 어색하다. 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풍경 속을 걷다보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키가 몇 뼘쯤 커지는 느낌이다. 갈색 이정표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자 마을 중심에 오랜 상형문자 하나가 우뚝 서있다.
흙土 위에 돌 여럿合, 지붕에 풀草 몇 포기, 塔이다.
탑만 휑하니 있다면 풍경이 심심했을 것이다. 야트막한 둔덕이 탑을 받들고 그 경사면에 돌과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기반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는 물리적인 구조지만,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탑의 선이 면이 이루는 각을 상쇄하고 있어 인공미와 자연미가 조화를 이룬다.
둔덕 아래에서 탑을 돌면서 올려다본다. 하늘도화지 위에 다차원 공간미가 펼쳐지는데,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一' 자에서 '人' 자로 펼쳐지다가 하늘에 자를 대고 그은 양 각 층의 지붕 끝이 직선을 이룬다. 단층 기단과 배흘림기둥이 옥개석을 떠받치는 구조가 추상적이다. 모서리에서 탑을 올려다보면 마름모로 각 층이 꼬리를 문다. 기하학적인 선형미에 살짝 들어 올린 추녀가 상승감을 더해 탑이 마치 층층이 연처럼 날아오르는 듯하다.
암록 · 암적 · 암갈색 탑에서 우러나는 무게감과 하얀 구름이 발산하는 가벼움이 이루는 심리적 대비가 편안한데, 주변의 건물이 낮기에 느낄 수 있는 심미안이다. 만약 마을에 개발 바람이 불어 높고 모난 건물이 들어서고 높다란 스카이라인이 배경을 점령한다면 저 공간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탑리오층석탑은 탑리의 랜드마크이다. 거대한 빌딩이 번영을 노래하고 전망 타워(Tower)가 최고를 자랑해도, 탑리 사람들은 오래 간직한 보물인 양 탑을 말한다. 탑에서 키를 재고 탑을 보며 마음을 키우던 그들은 지금도 눈이 오나 벼락이 치나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살아간다.
탑리오층석탑은 내가 본 탑 가운데 가장 인문학적인 탑이다. 많은 탑을 대면했지만, 뫼도 절도 없는 마을 한가운데에서 세속의 때를 함께 묻히는 탑은 거의 없었다. 역사와 시공을 아울러 진리를 말없이 설법하는데다가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의 중심에 있으니, 어찌 그 공간미에 끌리지 않을까.
인간은 두 발로 서면서 비약적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척추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몇십 년이었다. 그 유한한 직립에 인간은 삶에서 얻은 진리를 오래 전할 상징을 세웠으니, 그것이 탑이다.
탑은 본디 부처님의 무덤이라 처음에는 진신사리를 모셨다. 그러나 수가 한정되어 나중에는 법신사리라고 하여 경전이나 불상, 보석 같은 상징물을 탑 속에 넣었고, 이 후 보관기능이 사라진 탑은 진리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탑은 인간의 정신세계가 이룬 역사다. 바벨탑, 피라미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단이나 길가에 있는 돌탑까지, 인간의 꿈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첨탑은 이상이 추구하는 방향이었고 탑신은 문명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마음속에도 문명이 있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정신세계다.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앎의 조각과 사고들은 충돌과 비산을 거듭하며 한동안 혼돈에 빠졌다가 본질이 같은 것들이 모인다. 태초 우주가 차츰 질서를 잡고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 듯, 마음의 문명 또한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진리를 중심으로 순행한다.
자본주의는 돈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물질문명의 소용돌이에 지치고 마천루처럼 치솟기만 하는 빌딩 아래에서 눌리다보면 나는 점점 작아진다. 거짓 정보와 유혹에 홀리다보면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문명의 미아가 되기도 한다.
탑리는 존재론적 위기를 느끼는 방랑자들을 위해 피난처로 남겨두고 싶은 곳이다. 나지막하고 고즈넉한 풍경이 이대로 남아있기를 바라는데, 이것이 온갖 공해에 찌든 도시인의 이기심이라면, 나 또한 마음속에 탑을 들여야 하지 않겠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탑을 도는 까닭을 알 것 같다. 삶을 다해 희로애락까지 태우고 나면 깨우침을 증명할 사리 하나라도 남길 수 있을까만, 살면서 건진 진신사리가 있다면 그것을 오래오래 보관할 탑 하나쯤 마음의 문명 그 중심에 우뚝 세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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