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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렇게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 장생주​

수필작법 도움 글

by 장대명화 2021. 2. 1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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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이렇게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 장생주

  名作은 多作에서 나온다-

 

 <1. 문학 수업>

  미치고 싶었다. 정말 세상 일 모든 것 다 잊고 히죽히죽 웃으며 살아가는 미친 사람 차라리 부러웠다. 그러나 미치는 것도 맘대로 되진 않았다.

스물을 갓 넘어 몹쓸 병에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젊은 목숨 하나.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차라리 죽고 싶고 차라리 미치고 싶었던 것이다.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차츰 기력을 잃어만 가는데, 내 영혼은 어찌 그리 맑아 오던가. 영육이 하나가_아니던가. 유난히 맑아져만 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소설을 생각해 냈다.

  '내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 글로 쓰면 그게 소설일 게다. 아니 희곡으로 써야지.' 그로부터 나는 엉뚱하게 소설과 희곡에 미쳤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 건강을 잃고서야 어찌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난 죽기 전에 글을 한 편이라도 남겨야겠다며 소설을 쓰고 희곡을 썼다. 소설 작법을 읽고 희곡 작법을 탐독하고 문장독본을 섭렵하면서 아무리 써 보아도 명작은커녕 졸작조차 써 내지 못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문학적 재질이 없는 성싶었다. 하기야 어려서부터 책은 많이 읽어왔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엔 일기나 겨우 쓰는 처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넘보기 어려운 작업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범 학교 시절엔 어찌어찌 하여 문예반에 들어가 동인지도 만들고 교지도 만드는 일에 끼어 들었던 걸 보면 문학, 그 마력에 심취해 사는 것도 결코 무가치한 일은 아닌 것도 같았다.

  그래서 참으로 무모한(?) 도전을 시도했다. '쓰자, 쓰다 보면 글이라는 게 써질 게다. '

  그때부터 나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죽음 직전에서도, 차라리 글이라도 쓰다가 죽으리라는 객기를 부리며 한 자 한 자 원고지를 메워 나갔다. 소설을 포기했다. 희곡도 포기했다. 당시의 내 건강 상태로써는 긴 글들 쓰는 건 무리였다. 결국 15장 짜리 수필 쓰기에 도전장을 냈다.

「 수필은 한시한필(閑時閑筆)이요,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써도 한 편의 수필을 써 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수필이 무엇인가? 어떻게 쓰는 것인가?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은 터에 무모하게 대들었으니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겠는가.

  그때부터 나는 수필에 미쳤다. 수필집을 읽고 수필 작법을 탐독하고 수필가들을 찾아 뵙고…….그러나 파고들면 파고 들 수록 수필의 정체가 아리송해졌다. 아무리 애써 찾아보아도 정답은 따로 없었다.

 결국 난 송나라의 구양수가 말한 삼다(三多) 곧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多想)을 통하여 문장 수련을 하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수필에 심취해 졸문이나마 습작을 계속하는 사이 죽음 직전에 있던 내 건강이 차츰 차도가 생긴 것이다.

 천우신조였던가,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녕 습작을 하는 사이 인생을 관조하고,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오로지 경건한 산 제사 드리듯, 기도하듯, 자아 성찰과 자기 고백적인 영혼의 소리들을 들으려 노력했던 때문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려나 나는 우선 많이 써 보기로 했다. 「명작(名作)은 다작(多作)에서 나온다」지 않던가. 많이 엄청나게 많이 써 보기로 했다.

 나는 내 신변 이야기부터 써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변 이야기는 자칫 신변잡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나무, 논, 새, 풀 등 자연 속의 소재들을 다 글로 형상해 보았다.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 물건들, 잊혀져 가는 세시풍속 등.

 온갖 소재들을 다 끌어 모아 수필이라는 틀 속에 넣어 보았다. 그러나 써 놓고 보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건 작품이 아니었다. 글이라는 게 문자로 표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이젠 많이 쓰되 많은 편수보다 한 편의 글을 더 많이 손질하기로 했다. 도공이 명품을 빚듯 자신의 혼과 정열을 다 바쳐서 작품에 몰입해 가는 장인 정신이 필요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데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박살을 내 버리고 다시 빚고 또 빚어 보는 그러한 장인 정신과 탁마의 수련 없이는 좋은 글을 쓸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 명품(名品)은 명인(名人)의 손에서>

 내 고향 강진에는 고려자기를 구워내던 가마가 있다. 그곳에서는 600여 년 전 국보급 고려청자를 빚어냈다. 국보로 지정된 청자를 보면 실로 단아하고 섬세하고 정교한 도공의 솜씨에 감탄을 한다. 명품, 그것은 수천 년을 지나도 명품으로 남는다. 그런데 그런 명품은 명인의 손에서 빚어졌다. 수십 년을 거친 숙달된 기능, 그것은 아무리 모방을 하려 해도 모방할 수 없는 예술적인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예술, 창작, 그게 어느 장르가 되었건 명작을 빚기 위해선 탁마의 수련이 필요하지 않던가. 15장 내외의 수필 한 편, 그까짓 게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 라고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 짧은 글 속에 인생의 심오한 경륜과 철학이, 도도히 흐르는 인간애가 녹아들어 있으면 얼마나 감명 깊던가.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선비처럼 고매한 인품을 지닌 것처럼 의식적으로 써 보았다. 그러냐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고매한 것처럼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것처럼 써 본들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수필은 결코 위선으로 써지는 글이 아니다. 수필은 결코 교과서적인 공식에 맞춰 품격 높은 것처럼 써지는 게 아니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선 우선 철저한 자기 수련이 필요한 것 같다. 자기 수련, 그건 문장 수련과 인격 수양이 동반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우선 「명품(名品)은 명인(名人)의 손에서 빚어진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이 참사람이 되기를 갈망했다. 날마다 교회에서, 집에서, 직장에서 기도하는 삶 속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쓰는 글. 그게 마음에 들어 참으로 욕심부리지 않고 자기 고백적인, 양심적인, 심연 깊숙이 내재해 있는 인식의 보물들을 하나 둘 꿰매기로 했다. 그러나 그게 어찌 맘대로 잘 되던가. 인격의 수양. 그건 일조 일석에 이루어지는 게 아닌 법. 세월이 지나갈수록 차츰차츰 완숙해져 가는 사람다움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3 수필 창작을 위한 노력>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거나 한 가지 일에 열심히 몰두하다 보면 되는 수가 있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난 30여 년을 수필 공부를 해왔으면서도 아직도 좋은 수필을 빚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게 수필이 아닌가 싶다. 때문에 나는 수필 한 편을 쓰자면 몸살을 심히 앓는다.

 한 편의 수필을 쓰려면 나는 우선 글감을 고른다. 글감은 언제 어디서나 고를 수가 있다. 그러나 모든 글감이 다 좋은 수필감은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좋은 수필 소재를 찾노라 애쓰다 보면 욕심이 앞서 한 편의 잡문도 쓸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평상시에 매일매일 대학 노트에 제목 일기를 쓴다. '이게 수필감이 되겠다'하고 정하고 쓴 게 아니라 그 날 있었던 생각했던, 들었던 일 중에서 감동적인 걸로 골라 밤이 깊어 잠이 쏟아지는데도 말이 되건 문장이 안 되건 제목을 붙여 일단락 시켜 놓고 본다.

 그렇게 써 놓은 잡문들. 그것은 아직 작품이 아니라 하나도 맘에 들지 않지만 가끔은 '이걸 잘 다듬어 놓으면 글이 되겠구나' 싶은 글감을 선택해 이젠 원고지에 일단 적어 본다. 물론 적어 가면서 고치고 또 고친다.

 15장 짜리 수필 한 편, 써야겠는데 때로는 20매, 30매가 되는가 하면 때로는 10매도 채 안 되는 수가 많다. 그렇다해도 일단 내 작품 구성은 이제부터다. 제목, 주제, 문체, 문단, 일화 등 요모조모를 따져 가며 이제는 컴퓨터에서 워드 프로세서로 글을 쳐본다. 컴퓨터로 작업을 하면 교정보는 일이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어서다. 컴퓨터로 원고 한 편을 쳐 놓고 몇 번이고 틈나는 대로 첨삭도 하고 삭제도 하고 맞춤법도 고쳐 가면서 고치고 또 고친다. 그러다 보면 다소 글 같은 모양새가 갖춰진다. 그럴 때에야 나는 원고를 정서해서 내 가족들에게 윤독을 시킨다. 모두들 바쁜 세상. 바쁘다며 건성건성 읽어 가는 글, 왠지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눈치가 틀렸다 싶으면 원고가 불합격이다. 글을 읽고도 아무 말이 없으면 또 불합격이다. 결국 나는 글을 읽고 "아쉬운 대로 보내 보셔요" 하는 소리가 나을 때까지 글 한 편을 고치고 또 고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문학적 소양도 재능도 없으면서 글을 써오고 있지나 않는가라는 의구심이 들고 부끄럽다 .

 그러나 나는 오늘도 수필을 쓴다. 수필이 좋아서다. 수필을 쓰고 있으면 왠지 사는 것 같다. 힘이 난다. 1977년대 초반부터 써오기 시작한 수필. 내 인생을 반추하고 자아를 성찰하고 날마다 기도하듯 써 나가는 수필 창작. 그게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조금 부족하면 어떠랴. 조금 부끄러우면 어떠랴. 그게 내 분신이라면, 맘속에 오래오래 곰삭이다가 끙끙 앓아가며 몇 번이고 고치고 또 고쳐서 써 놓은 글이라면 조금은 정이 가지 않겠는가.

 정이 가는 글, 사랑이 넘치는 글, 그런 글을 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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