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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무엇인가 / 스티븐 킹

수필작법 도움 글

by 장대명화 2020. 12. 1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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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란 무엇인가 / 스티븐 킹

 

  물론 정신 감응이다.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그런 것이 정말 존재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거듭했고, J.B. 라인(Joseph Banks Rhine:1895~1980, 미국 초심리학자)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정확하게 검증하는 방법을 고안하느라고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현상은 옛날부터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처럼 눈에 잘 띄는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모든 예술은 제각기 어느 정도는 정신 감응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문학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신 감응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것이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냥 문학을 옹호하기로 하자.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애당초 문학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내 이름은 스티븐 킹이다. 내가 이 장의 초고를 쓰고 있는 곳은 내 책상이고(처마 밑에 있는 바로 그 책상이다), 지금은 1997년 12월의 어느 눈 내리는 아침이다. 내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스쳐간다. 그 중에는 더러 걱정거리도 있고(눈이 나빠졌고, 크리스마스 쇼핑을 아직 시작도 못한데다 아내가 감기에 걸려 몸이 안 좋다), 또 더러는 기쁜 일도 있지만(대학에 가 있던 둘째아들이 예고도 없이 집에 왔고, 나는 어느 콘서트에서 월 플라워스와 함께 클래시의 <새 캐딜락>을 연주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은 그 모든 일이 머리속에서만 오락가락할 뿐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전혀 다른 곳이다. 지하에 자리잡은 그곳에는 밝은 빛과 선명한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이곳은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만들어낸 곳이며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곳이 하필이면 지하에 있다니 조금 이상하고 모순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그것이 사실이다. 여러분이 멀리 볼 수 있는 곳을 만들 때는 나무 우듬지를 선택해도 좋고 세계 무역 센터 꼭대기나 그랜드캐니언의 낭떠러지 위를 선택해도 좋다. 로버트 매캐먼의 소설에 나왔던 표현을 빌리자면 그곳은 바로 여러분의 ‘놀이터’이니까 말이다.

 

  예정에 의하면 이 책은 2000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출판하기로 되어 있다.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더라도 여러분은 나보다 상당히 뒤늦게 이 글을 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 저마다 멀리 볼 수 있는 곳, 즉 정신 감응으로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장소에 있을 것이다. 물론 ‘몸소’그런 곳에 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이란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는 마술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개 차 안에서 오디오북을 듣고(축약본은 형편없다고 생각하므로 반드시 원본 그대로인 것을 고른다) 어디에 가든지 책 한 권을 들고 다닌다. 언제 어느 때 탈출구가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 자동차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을 때도 있고, 수강 취소 신청서에 지도 교수의 서명을 받으려고 어느 따분한 대학 건물의 복도에서 (어떤 망할 자식이 ‘개판치기 입문’ 과목에서 낙제점을 주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15분쯤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그밖에도 공항 대합실에서, 비오는 오후에 빨래방에서, 그리고 귀중한 신체 일부를 난도질당하려고 최악의 장소인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가 지각하는 바람에 꼬박 30분을 허비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책은 필수품이 아닐 수 없다. 만약에 내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더라도 그곳에 대출 도서관 하나만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이다(설령 도서관이 있더라도 책이라고는 다니엘 스틸의 소설이나《닭고기 스프》시리즈가 전부일 텐데, 하하, 약오르지, 스티브?).

 

  나는 이렇게 기회만 있으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나에게도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것처럼,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조명이 밝고 분위기도 아늑한 장소 말이다. 내 경우에는 내 서재에 있는 파란 의자가 그런 곳이다. 여러분은 일광욕실의 소파나 부엌의 흔들의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침대에 비스듬히 눕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침대에서 책을 읽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물론 책장을 비추는 조명이 적당해야 하고 이불에 커피나 코냑을 엎지르는 일이 별로 없어야겠지만.

 

  자, 그렇다면 이제 내가 신호를 전송하기에 제일 좋은 장소에 와 있듯이 여러분도 각자 마음에 드는 수신 장소에 있다고 치자. 지금부터 우리는 정신력을 이용하여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뛰어넘어야 한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도 디킨스나 셰익스피어는 물론이고 헤로도토스의 책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을 보면 1997년과 2000년 사이의 간격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지금부터 시작이다. 진짜 정신 감응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옷소매에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고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보라. 여기 붉은 천을 덮은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는 작은 수족관만한 토끼장 하나가 있다. 토끼장 속에는 코도 분홍색이고 눈가도 분홍색인 하얀 토끼 한 마리가 있다. 토끼는 앞발로 당근 한 토막을 쥐고 흐뭇한 표정으로 갉아먹는 중이다. 토끼의 등에는 파란 잉크로 8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똑같은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각자가 본 것을 비교해봐야 되겠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약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수신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테이블에 덮인 천이 진홍색으로 보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다홍색, 또 다른 이들에게는 또다른 색조로 보인다.(색맹인 사람들에게는 붉은 테이블보가 시가 담뱃재 같은 암회색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에게는 테이블보의 가장자리가 동글동글하게 다듬어져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밋밋한 직선으로 되어 있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레이스를 붙여도 좋다. 내 것이 곧 여러분의 것이니까 마음대로 주물러보시라.

 

  마찬가지로 토끼장도 개개인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여지가 많다. 이 토끼장은 ‘간단한 비유’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런 비유는 여러분과 내가 세상과 그 속의 사물들을 비슷한 눈으로 바라봐야만 쓸모가 있다. 간단한 비유를 사용할 때는 세부적인 내용을 소홀히 하기 쉽다. 그렇다고 사소한 특징들을 일일이 나열해야 한다면 글쓰기의 재미가 몽땅 사라지고 만다. 과연 이런 설명이 필요할까? ‘테이블 위에는 가로 106cm, 세로 61cm, 높아 35cm인 토끼장 하나가 있다.’ 이런 것은 산문이 아니고 사용 설명서일 뿐이다. 위의 문단은 그 토끼장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철망? 쇠막대? 유리?-과연 그런 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일까? 어쨌든 우리 모두는 이 토끼장의 내부가 훤히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만 알면 충분하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토끼장도 아니고, 그 속에서 당근을 먹고 있는 토끼도 아니고, 다만 그 토끼의 등에 찍힌 숫자이다. 6도 아니고, 4도 아니고, 19.5도 아니다. 숫자는 8이다. 우리는 모두 그 숫자를 보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러분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나도 입을 연 적이 없고 여러분도 입을 연 적이 없다. 더욱이 우리는 같은 방안에 있기는커녕, 같은 연도에 있는 것조차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함께 있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다.

 

  지금 우리는 정신의 만남을 갖는 중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붉은 천이 덮인 테이블 하나와 토끼장 하나와 토끼 한 마리와 파란 잉크로 찍힌 8이라는 숫자를 전송했다. 여러분은 그 모든 것, 특히 글 파란 8자를 무사히 수신했다. 우리는 정신 감응을 경험한 것이다. 무슨 전설 속의 산 따위가 아니라 진짜 정신 감응이다. 여기서 내 말의 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여러분은 지금 내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알아주기 바란다. 방금했던 이야기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글쓰기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은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고 흥분이나 희망을 느낄 수도 있다. 심지어는 절망감을 가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결코 완벽하게 종이에 옮겨적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여러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때려눕힐 태세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서 글쓰기를 시작할 수도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시작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경박한 자세는 곤란하다. 다시 말하겠다.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경외감을 가지라는 뜻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말만 쓰라는 것도 아니고 유머 감각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유머 감각은 꼭 필요하다) 글쓰기는 인기투표도 아니고 도덕의 올림픽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그러나 글쓰기란 세차를 하거나 눈화장을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일이다. 여러분이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진지해질 수 없거나 진지해지기 싫다면 당장 이 책을 덮어버리고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를테면 차를 닦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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