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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 / 김 지 영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0. 12. 23.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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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씨 / 김지영(홍익여고 교사)

 

  지난해 겨울, 학교 한 귀퉁이 조그만 교실에서 퇴임식이 있었다. 평생을 용인으로 청춘을 바친 송 씨 아저씨 퇴임식이었다. 스무 살 갓 넘어 부임해서 육십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퇴임하니 학교에서 젊은 시절을 다 보낸 셈이다. 송 씨 아저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출근해서 운동장을 쓸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선생님들의 잔심부름을 했다. 그러면서도 이틀에 한 번씩 숙직을 하며 학교를 지켜왔다. 선생님들 퇴임식과는 달리 그의 퇴임식장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학생들도 없고, 행정실 직원 서너 명과 몇몇 선생님들이 자리를 함께했을 뿐 그 흔한 플래카드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몇 해 전 일이다. 나는 우연히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행사가 있어 아이들을 인솔했다가 늦게 학교에 돌아왔는데 마침 그가 당번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나를 붙들고, 하소연하다시피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고,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 용인으로 들어와 평생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그가 근무하는 방에 남의 눈을 피해 음료수를 갖다 놓기도 하고, 때로는 소주라도 한 병씩 사들고 가서 그를 만나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가 나를 찾아와서는 한참 동안 주저주저하더니 "선생님 저 이번에 퇴임하는데요. 퇴임사 좀 써주세요." 하였다. "아니 퇴임이라뇨?" 그에게서 퇴임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당황이 되었다.

 

 나는 정성껏 퇴임사를 썼다. 그는 퇴임사를 받아들고는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또다시 망설이더니 "선생님 사실은 제가 글을 읽지 못하거든요" 그는 내가 써준 퇴임사를 품에 지니고 다니며 며칠을 고민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그가 근무하는 숙직실에서 비밀과외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퇴임사를 몇 번이고 읽어주고, 그는 그것을 들으며 외우고 또 외웠다. 그가 퇴임하는 날, 나는 오랜만에 양복을 꺼내 입고 출근을 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퇴임식을 지켜보았다. 썰렁한 퇴임식 자리였지만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었다. 교가제창에 이어 어디서 태어나 언제부터 근무했다는 그의 간단한 약력이 소개되고, 이제 퇴임사를 말할 순서가 되었다. 송 씨 아저씨는 준비한 퇴임사를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퇴임사를 잘 읽을까?' 입학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초조한 선생의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송 씨 아저씨가 퇴임사를 호주머니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고마워유"

 

 하면서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훌쩍이는 것이었다.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퇴임식은 더는 진행되지 못했다. 퇴임식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아무도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 거친 손을 한참 동안 잡았다. 그리고 퇴임식장을 나서는 그를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정들었을 교정을 떠나는 그의 손에는 내가 건네준 작은 꽃다발 하나만이 들려 있을 뿐이었다. 그는 교문 밖으로 나가면서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며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는 나대로 아이들 수시 입학원서 쓰랴 수업하랴 정신없이 지내는 동안 그에 관한 일은 내 머릿속에서 까마득하게 잊혀가고 있었다. 언젠가 아저씨들을 통해서 그가 고향에 내려가 남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짓는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백일장 인솔을 나갔다가 학교에 들어오는데 새로 온 사환 아이가 나를 급히 찾더니 어떤 아저씨가 한참 동안 기다리다 갔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이름도 말하지 않고 그저 운동장 가에 앉아서 한나절을 기다리다가는 뭘 건네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누굴까? 나를 찾아와서는……. 교무실로 들어오지도 않고' 궁금한 마음에 허겁지겁 내 자리로 돌아오니 책상 옆에 허름하게 종이상자로 포장된 물건이 놓여 있었다. 뜯어보니 채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누가 이런 걸?'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학교까지 찾아와서 나에게 이런 걸 건네줄 사람이 없는데…….' 나는 그 상자를 책상 한쪽 구석진 곳에다 치우려고 그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상자 아랫부분에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글자가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고마워유 - 송씨' 그곳에는 수없이 연습했을 서툰 글씨가 그의 따스한 마음과 함께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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