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에 들어가고부터 하교 시간이 늦어지는 날이 잦았다. 지금 아이들처럼 방과 후에 이 학원, 저 교습소 옮겨 다니느라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영어암송대회다 웅변대회다 백일장이다 해서 걸핏하면 대표로 뽑혀 연습을 하다 보니 야심토록 학교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잠직하고 재주도 하찮았던 촌뜨기였건만, 어디가 그리 미쁘게 보여 선생님들의 분에 넘친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하루치 연습이 마쳐지고 뒷정리까지 끝나면, 서둘러 귀갓길에 오른다. 시계는 벌써 밤 열 시가 훌쩍 넘어 있기 일쑤다. 요사이야 열 시께면 아직 초저녁에 불과하지만, 그 때는 완전히 한밤중이었다. 기껏해야 몇 시간에 한 대씩 있는 시외버스마저 끊긴 지 오래다. 쌀에 뉘처럼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이라, 해만 빠지면 거리는 이내 적막강산이 된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신작로를 지나오려면 주뼛주뼛 머리끝이 곤두서면서 오싹 소름이 끼쳤다.
지난날엔 늑대와 여우, 개호주 같은 산짐승도 많았지만 도깨비며 귀신 이야기는 또 어찌 그리 흔했던지……. 어린 나는 자연 풀어낼 수 없는 두려움을 가슴에 들였다. 그런 잠재된 공포에의 기억이 무섬증을 불러와, 처녀귀신이 나타나서 사람을 호린다는 골짜기 앞에 다다르면 걸음아 날 살리라며 부리나케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정신없이 내달려 마을 앞까지 다 왔을 때는 식은땀으로 등줄기가 흥건히 젖어 있곤 했다.
동구 밖에 들어서면, 약속이나 한 듯 어머니가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와 계셨다. 저만치 어머니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무섬증과 고단함은 눈 녹듯 일시에 풀려나갔다. 아들의 모습을 확인한 어머니는 그제야 안심이 되시는지, 한 차례 깊은 눈 맞춤을 하고는 집을 향해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 침묵 속에 어리비치던 당신의 자애로운 눈빛을, 머리에 서리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지금 이 나이까지도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달이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당신의 아들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어 줄 달이기를, 그것도 보름달이기를 소망하셨을 것이다. 지금 헤아려 보니, 어머니가 꼭 달맞이꽃을 닮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터처럼 수선스럽고 살벌한 세상에서 내가 오늘 이 때까지 쓰러지지 아니하고 꿋꿋이 버티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달맞이꽃이 되어 지켜주신 어머니의 염려와 보살핌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지병으로 시난고난하다 생의 가을 녘에 훌홀히 저세상으로 떠나가 이제는 더 이상 달맞이꽃이 되어 주실 수 없는 어머니, 어쩌다 고향집을 찾을 때면 그때의 어머니가 동구 밖에 달맞이꽃으로 서 계시는 것 같은 환상에 젖어들곤 한다.
해바라기가 정열의 꽃이라면 달맞이꽃은 소박함의 꽃이다. 꼭 달이 뜨는 저녁을 기다려 피어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달맞이꽃, 그래서 기다림이라는 꽃말을 얻게 되었나 보다. 야심한 밤에 달팽이각시처럼 살그머니 찾아오는 꽃이라 하여 ‘야래향夜來香’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야래향, 미혹되지 않을 수 없는 향도 향이려니와, 무엇보다 꽃 이름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어쩐지 권력자를 치어다보며 간살을 떨고 있는 듯싶은 해바라기라는 이름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은근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이름이 나는 좋다.
일찌거니 저녁술을 놓고는 달 바라기라도 할 겸 동구 밖으로 산책을 나선다. 아니나 다를까, 달맞이꽃이 어느새 제가 먼저 달을 마중하고 섰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건만, 달 오시는 밤만 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얼굴을 내민다. 뒤란에서 말없이 나타나는 은근한 정인 같기도 하고, 멀리서 소식 없이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 같기도 하다. 새벽녘까지 이슬을 맞고서 함초롬히 피어 있다 아침 해가 부챗살을 펼치기 시작하면 다시 저녁을 기약하며 조용히 입을 오므린다.
대다수의 꽃들은 낮에 다투어 피건만, 이 달맞이꽃은 어찌하여 밤을 틈타 수줍은 새색시처럼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무슨 정이 그리 많아 남들 다 깊이 잠든 시간에도 저 홀로 잠들지 못하고 온 밤을 지새우는 것일까. 하얀 밤에 노란 꽃, 그 선명한 색채의 대비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달맞이꽃에 찬찬히 눈길을 주고 있노라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애달픈 전설 하나가 망막에 맺혀 온다.
오랜 옛적,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 틈에 유독 홀로 달을 사랑하는 요정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요정은, 별이 뜨면 달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조바심에 무심코 이런 모진 말을 하고 말았다.
“하늘나라의 별들이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럼 매일매일 달을 볼 수 있을 텐데……”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요정들이 곧바로 제우스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잔뜩 화가 난 제우스는 그만 달 없는 깜깜한 세상으로 그 요정을 유배시켜 버린다.
나중에야 사연을 알게 된 달의 신은 자기를 좋아했던 요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곳곳에서 제우스가 곁쐐기를 박는 바람에 둘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달을 사랑했던 요정은 너무 지친 나머지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요정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찾아올 수 있었던 달의 신은 눈물을 흘리며 그 요정을 땅에 묻어 주었다. 뒤늦게야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 제우스는, 그 미안한 마음을 자책하며 요정의 영혼을 달맞이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달맞이꽃은 일편단심 달을 따라 함초롬히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조용히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볼 때에도 이 슬픈 전설이 가슴을 적셔 오곤 한다. 그것은, 달의 신이 요정을 찾아 헤매듯 이제 이승에서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당신을 향한 그리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달 뜨는 시각이면 어김없이 달마중을 나오는 달맞이꽃처럼 아들이 돌아올 시간이면 여부없이 아들의 밤 마중을 나오셨던 어머니, 내가 해바라기 꽃보다 달맞이꽃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마 이런 까닭에서가 아닌가 싶다.
이제 그 때의 늑대도, 여우도, 개호주도, 도깨비도 그리고 처녀귀신도 죄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풀지 못한다. 유괴다 폭력이다 사기다 뭐다 해서 세상이 너무 어둡고 흉흉한 일들로 뒤덮여 가기 때문이다. 별의별 사건, 오만 사고들이 어느 하루도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지 아니하는 날이 없다. 이런 사회가 무섭고, 이런 세태가 두렵다. 이 무서움, 이 두려움을 지켜 줄 달맞이꽃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무엇으로 이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도 가시고 없는 이 풍진세계에서, 나는 얼마만큼 밝은 달이 되어 세상을 비추며 살아왔는지…….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 보면 그저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마음뿐이다.
해마다 선들바람이 불어오고 달맞이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시절이면, 달맞이꽃이 되어 아들의 귀갓길을 밝혀 주셨던 어머니가 그립다. 몹시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