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흔들리는 나뭇잎 / 강 석 호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0. 8. 26. 06:56

본문

                                            흔들리는 나뭇잎 / 강 석 호

 

  나뭇잎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은 나뭇잎만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흔들린다. 생명체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세월도 흔들리고 마음도 흔들린다. 세상 모두가 흔들리고 나아가서는 우주공간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과 움직이는 것은 동의어다. 다만 흔들리는 것은 타력에 의한 흔들림이요. 움직이는 것은 자력에 의한 몸짓이다. 움직임과 흔들림의 결과는 변화이며 변화의 힘은 위대하다.
  인간과 동물이 걸어 다니지 않고 새들이 날아다니지 않고 물고기가 헤엄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이다. 여린 새싹이 지각을 뚫고 올라오는 것이든, 구더기가 사체에 우글거리든, 지렁이가 땅속을 파고 꿈틀거리든, 바이러스가 시험관에서 꼬무락거리는 것은 작고 가냘프며 징그럽지만 그것은 위대한 움직임이요 성장이며 정화작용이다.
  우리는 한 번 먹은 마음을 절대 변치 말자고 초지일관을 원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런 비극이 없을 것이다. 후회나 결심은 마음의 변화에서 오는 것, 더러는 자신에게 불리한 타인의 변심을 배신이라 욕하지만 그것은 용서와 재기의 전기이자 발전의 단초이기도 하다.
  젊은 날 나와 굳게 사랑을 맹세한 여인이 나의 친한 친구와 눈이 맞아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수없이 밀려오는 밤의 고뇌에 몸을 뒤척였다. 그렇게 쉬이 변할 수가 있을까. 하필이면 자주 함께 만나 신의와 우정을 쌓던 나의 친구와 눈을 맞추다니 그녀의 배신은 너무도 큰 상처요 충격이었다.
  그러나 고뇌의 아픈 터널을 용케 빠져나와 마음의 자세를 다시 추슬렀을 때 찬란한 재생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폭풍과 천둥이 뒤얽힌 폭우가 지난 후 햇빛 찬란히 빛나는 밝고 맑은 하늘을 보는 기쁨을 얻는 크나큰 변심이었다. 그래서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 했던가.
  사상적 변화는 정치 사회적으로 전쟁이나 혁명을 불러오고 세월의 변화는 역사의 물길을 바꾼다. 유사 이래 흑인 대통령의 이변을 일으킨 오바마 미대통령은 선거유세 연설 중 변화라는 말을 많이 써서 당선되었다. 변화는 신선한 발전의 동력이며 모두들 변화를 원한다. 발상의 전환을 기대한다.
  나는 아침마다 출근길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의 여러 모습에 마음을 흠뻑 빼앗긴다.
아파트 샛길을 빠져나와 찻길 건널목에 다다르면 벚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버드나무가 듬성듬성 뒤섞여 긴 숲을 이룬 가로수 앞에 서게 된다. 햇볕을 가로막으며 잔잔히 나풀거리는 나뭇잎은 밤새 안녕을 묻는 반가운 인사의 몸짓이다. 후줄근히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뭇잎은 자신에게 우산이라도 씌워 주기를 바라는 구원의 몸짓이다. 바람에 가지가 찢어지도록 크게 흔들리는 몸짓은 위험을 경고하는 몸부림이다.
  흔들리는 나뭇잎은 계절에 따라서도 그 모습과 정감이 다르다. 새봄을 맞아 작은 새싹의 봉우리들을 잔뜩 달고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소생의 꿈을 불러일으키고, 5월의 신록으로 곱게 치장한 나뭇가지는 보기만 해도 풋풋한 신록의 향기를 발산한다. 여름의 짙은 녹음은 왕성한 생의 의욕을 샘솟게 하며 곱게 물든 가을의 단풍잎은 결실과 완성의 미학이요, 겨울날 눈비를 맞고 서서 흔들리는 나목은 무소유와 인고와 시련의 사유를 되뇌게 한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면 뿌리가 흔들린다. 나무가 굳게 서는 것은 뿌리의 흔들림 때문이다. 굳게 선 나무는 비바람이 불어도 폭우가 쏟아져도 끄떡없이 성장한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고난과 역경이다. 가난과 질병과 실패와 좌절, 인간의 삶은 그것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 겪을수록 인간의 의지는 강해지고 진실의 강은 맑아진다. 성경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달게 받으며 ‘모든 고통을 참고 이긴 후 정금같이 되리라’고 노래했다.
  나뭇잎이 흔들림으로 거목이 성장하듯 나의 작은 시련의 흔들림은 끝내 나를 깨달음의 거목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나뭇잎과 바람은 상생의 숙명, 흔들리는 것은 삶의 원천이자 보람이다.
  나는 큰 흔들림보다 작은 흔들림을 좋아한다. 가냘픈 입새가 햇볕과 구름과 바람을 가르며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미스 김은 나와 같이 전철을 타고 가다 헤어질 때 창밖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작은 손가락을 활짝 펴고 흔드는 모습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아름답다.
  나의 언어도 작은 나뭇잎의 흔들림이고 싶다. 웅변이나 거대 담론이 아니고 난해한 긴장이나 함축도 아니고 그저 들릴락 말락 속삭이는 작은 언어이고 싶다.
  고대광실 높은 집도 작은 열쇠 하나로 드나들고 큰 벽면도 창문 하나로 생명을 얻는다.
  우리의 슬픔과 기쁨은 결코 큰 충격이나 경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마음의 불씨, 그것이 좌우한다. 우리 몸을 수술하는데도 큰 칼이 아니라 작은 메스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반가운 친구를 만나면 산해진미보다 우선 경치 좋고 운치 있는 찻집에서 커피 한 잔부터 마시는 것이 더 정겨울 것 같다.

'추천우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닮음에 대한 아이러니 / 박 영 란  (0) 2020.08.30
연잎 밥 / 조 경 숙  (0) 2020.08.29
별똥별 / 강 돈 묵  (0) 2020.08.24
여전 하십니다 / 권 현 옥  (0) 2020.08.22
세상은 불난 집 / 조 헌  (0) 2020.08.2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