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뜨거운 날씨가 아니다. 한낮엔 활활 타는 불길 속같이 등줄기를 훅훅 볶아대더니 해가 져도 숙일 줄 모르는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후, 올 여름(2018)이 최악이라는데 아마도 유사 이래 가장 심한 폭염이 아닐까 싶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각, 지하철에서 내린 나는 땀범벅이 되어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날씨 탓인지 평소엔 사람들로 북적거릴 강남역 5번 출구가 차도 사람도 뜸한 채 한산했다. 큰길을 벗어나 작은 사거리에서 막 왼쪽 길로 접어드는데 길모퉁이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술에 취했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냥 갈까 싶었지만 이 모서리는 턱이 없어 차들이 수시로 넘나드는 곳이라 위험했다.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이렇게 앉아 있으면 큰일 나요. 어서 가던지 아니면 이 안쪽으로 들어앉아요." 나는 그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말을 건넸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나를 흘낏 쳐다보더니 무슨 상관이냐는 듯 눈길을 거둬 자신의 발부리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얼추 삼십 대 초반 쯤, 유난히 흰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듯 몹시 어두웠다. 술을 먹은 기색은 없었다. "종종 차들이 이곳을 밟고 지나가니 어서 일어나세요." 다시 권하는 내 말에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쓸데없는 오지랖을 탓하며 무연히 돌아섰다. 그때다. 맥없이 앉았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아저씨! 저 밥 좀…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난 황당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눈빛이 내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서둘러 밥집 서너 군데를 뒤졌으나 하는 곳이 없었다. 힘겹게 따라오는 그가 딱하고 염려스러웠다. "너무 늦어 문을 모두 닫았네요. 저 맥줏집에 가서 닭이라도 먹을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그는 의외로 멀쩡했다. 회색 바지에 줄무늬 티셔츠 그리고 검은색 뿔테 안경이 공무원이 아니면 선생님 같았다. 그러나 그의 화법話法은 거슬릴 정도로 독특했다. 똑부러지게 하는 말이 거의 없었다. 나이를 묻는 말엔 '보기 보다는 많아요.', 사는 곳을 물어도 '여기서 상당히 멀어요.' 심지어 가족은 있느냐는 질문에도 '있긴 한데 그게…'라며 말꼬리를 눙쳤다. 먹을 걸 구걸한 처지라 신문 노출이 싫었겠지만 뜨문뜨문 이어진 대화에서도 '했다'나 '그랬다'가 아니라 '했던 거 같다.'와 '그랬던 거 같다.'다. 그마저도 풀죽은 목소리로 우물쭈물 중얼댔다,
술은 못한다고 했다. 허겁지겁 닭을 먹는 그를 보며 이것저것 궁금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닭 한마리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더 먹겠냐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맙습니다. 이젠 좀 살 것 같아요." 허기가 가셨는지 훨씬 똘똘해진 눈으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거기 앉아 있었던 거요?"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듯 나는 정색을 하며 그에게 물었다. "실은 제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매번 떨어져 이 모양입니다. 며칠 전 또 낙방을 했거든요. 올해가 네 번째예요. 어렵사리 대학공부를 시킨 부모님께도 면목이 없고 살길도 막막해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앞이 캄캄하네요. 일반직장은 엄두가 나지 않고 그나마 공부밖엔 별다른 재주가 없어 죽어라 했는데…" 속엣말을 털어놓는 그의 표정엔 새까맣게 굳은 절망이 엉겨 있었다.
경제 불황의 파고가 어제오늘의 문제였던가. 특히 젊은이들의 취업난은 재앙에 가깝다. 회사마다 공채를 한다고 떠들어대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서너 명 채용이 고작인데 그마저 줄인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취업에 대한 기막힌 사연도 한둘이 아니다. 한 달 이상 애를 태우며 3차까지 합격했어도 또 다시 서너 달을 인턴으로 부리며 점수를 매긴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게다가 최종 순위에서 일등을 했어도 뽑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언제 나갈지 몰라 차라리 이등을 쓰겠다고 한다니, 잘나서 못 뽑고 못나서 안 뽑으니 그저 말문이 막힌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대학 졸업을 미루는 것이다. 졸업자는 채용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다반사라 졸업 예정자로 버텨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신세대'란 말도 있다. 실업失業과 신용불량에 허덕이는 청년들을 몰밀어 하는 말이다. 목을 죄는 학자금 상환과 생활비 부족으로 불법대출에 손을 댔다가 파산신청을 하는 일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보다 가난해질 그들의 멍에는 생각보다 무겁고 심각하다. 사방이 모두 절벽과 수렁인 게 그들의 현실이다.
어느덧 새벽 한 시가 넘었다. 나는 "죽고 싶어 길바닥에 앉아 있었던 거냐."고 되물었다. 그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부모님들이 모두 중증 장애인이세요. 평생 저 하나 믿고 사시는 분들입니다. 죽고 싶어도 맘대로 죽을 수도 없는 사람이에요. 지난 이맘때 시험에 떨어지고 죽을 만큼 힘들었거든요. 벽을 치고 울부짖으며 수없이 다짐했는데 올해 또 떨어진 겁니다. 솔직히 아까는 저를 용서하기 싫더라고요." 입술을 떨던 그의 눈엔 물기가 번졌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슬픈 건지 아픈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각기 꽃 피는 시기가 다르다지 않소? 낙담하면 안돼요. 힘내요!" 겨우 입을 연 난 흔해빠진 말로 그를 위로했다. "그래야지요 스스로 내린 벌을 다 받으면 집에 들어갈 거예요. 가서 또 책상에 앉아야지요. 별 도리가 없으니까요." 오늘밤은 어디서 잘 거냐고 물으니 강남역 지하에 가면 하룻밤 버틸 곳이 있다고 했다. 잠시 눈을 붙이면 새날이 밝을 거란 말도 담담히 덧붙였다.
우린 맥줏집을 나왔다. 늦은 밤에도 폭염의 기세는 조금도 꺾일 줄 몰랐다. 불가佛家에선 세상을 불난 집이라고 한다. 삼계三界의 번뇌가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는 말이다.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은 없어요. 비가 내려야 무지개가 뜨잖아요? 아무리 버거워도 꼭 살아내야 하는 겁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참기 힘든 열기가 여전히 밤하늘을 꽉 메우고 있었다.
별똥별 / 강 돈 묵 (0) | 2020.08.24 |
---|---|
여전 하십니다 / 권 현 옥 (0) | 2020.08.22 |
밥그릇 춤 / 하 재 열 (0) | 2020.08.18 |
달팽이의 꿈 / 박 금 아 (0) | 2020.08.16 |
花 水 木… 今 / 서 숙 (0) | 2020.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