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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수(訓手) / 김선화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0. 7. 28.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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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수(訓手) / 김선화

 

  몸을 한껏 구부려 고부장한 노인과 깊은 포옹을 했다. 아침부터 서둘러 열차를 타고 찾아간 조치원역 인근의 조용한 요양병원에서였다. 친정 동네 이웃의 어른으로 돌아가신 내 어머니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 분인데, 거동이 어려워져 요양기관에 모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근 1년 만이었다. 오래전 그 댁 아들 내외가 꽃나무를 재배해 살림을 불려, 마을에서는 그 안노인을 ‘꽃집할머니’라 불러왔다. 우리 집에 우환이 따라 어머니가 아버지 병실에 매여 계실 때는 사십 중반으로 늦둥이를 낳은 큰올케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그 댁에 맡기고 들일을 나가기도 했었다. 그러한 의리로 나도 그 댁 어른을 사람의 도리로서 대하게 되었다.

  노인 셋이 함께 쓰는 병실에는 구순을 넘긴 할머니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두 분은 이미 치매를 앓고 있다고 하지만, 꽃집할머니는 깡마른 체구에 총기가 그대로여서 이전의 정리(情理)를 회상하며 자꾸 눈물을 보였다. 회진 도는 원장 선생님은 침상마다 들여다보며 점심에 무얼 드셨는지 반찬 한 가지만을 대어보라 한다. 꽃집 할머니는 맛나게 나왔더라며 또랑또랑 헤아리고, 두 분의 노인은 물으나마나 눈이 퀭한 채 무표정이다.

 내가 요양병원이란 곳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암을 앓으신 시어머님은 직접 수발을 들었고, 친정어머니는 그럴 새도 없이 즐거이 웃다가 세상을 떠나신 까닭이다. 십여 년 전 서울서 수필강좌를 맡고 있을 때, 그곳 회장직을 오래 유지해온 칠순 남짓의 작가가 약간 치매증상을 보여 양평의 소규모 요양원에 머무르게 되었다. 자제 삼 형제를 모두 훌륭히 키워낸 점에 대해 자긍심이 컸던 분인데, 다들 맡은 일들이 있어 전문기간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주소를 들고 남편과 함께 찾아간 나는 조심스레 노작가를 모시고 나와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그는 한 발짝씩 떼어 옮길 때마다 중얼중얼 읊조리는 말이 있었다. “이러면 안 되지, 정신 놓으면 안 되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스스로에게 단단히 최면을 걸고 있었다. 평소 한시 3백수를 너끈히 암송하던 의식이, 시나브로 멀어지려는 정신 줄을 그나마 부여잡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 우수 어린 모습은 내게 전이되다시피 하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명료한 영상으로 남아 있다. 누구나가 맞이해야 하는 인생말로에 대해 상념을 깊게 했다.

  그처럼 다소 낯설었던 요양원 풍경이 이즈음엔 자연스러운 풍속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친구들이나 주변을 돌아보아도 요양기관에 어른을 모셔놓고 찾아다니는 예가 일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직접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가슴을 훑어내는 이들도 있다. 그러한 중에 이제야 발걸음 하여 노년의 삶에 새삼 눈떠가는 내가 좀 무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긴 포옹, 숙인 몸을 일으키며 두 분의 노인들께도 목례를 하였다. 그분들도 목을 까딱하며 인사를 받는다. 그리고 막 돌아서 나오려던 나는 갑자기 몸을 틀며 “손 한번 잡아드려야지.” 했다. 누군가가 병실에 나가고 나면 본능적으로 썰렁함을 느낄 것 같아 작은 위로나마 그리고 싶어서였다. 번갈아 다가가자 노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덥석덥석 내 손을 잡으신다. “편히 계셔요.” 힘주어 속삭이는 내 말속엔 잠시나마 딸이고 며느리 자리에 서 드리는 마음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간 문병객 한 명 없었다는, 게다가 말조차 잃었다는 한 할머니가 나를 와락 당겨 안는가 싶더니 귀에 대고 타이른다. “울지 말고 가~.” 중저음의 묵직한 음성이다. “아, 예. 울지 않고 갈게요.” 나는 이내 그분들의 말을 받으며 목이 메고 눈이 젖었다. 처음 대하는 노인의 인사말치고 너무도 깊게 가슴에 요동쳤다. 한 시간 넘게 꽃집할머니와 담소를 나누는 동안 꼿꼿이 앉아 무표정하게 입을 닫고 있던 분이 들려주는 딱 한 마디. 들이는 말이 그에겐 누구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는데…. 무엇이 노인의 입을 열게 했을까. 손이 도타웠다. 따습다 못해 뜨거웠다. 어쩌면 당신에겐 없을 것 같던 제3자의 손길이 반가워 순간 울컥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비친 나는 누구였을까. 조금 전 꽃집할머니의 흉금을 튼 대화에서 어머니와 작별할 때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두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면의 내 쓸쓸한 심중을 읽어낸 것일까.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가느다란 기억력 하나라도 확인해두려는 원장선생님 앞에서 입술 한 번 떼지 않은 분이, 날 안으며 그리도 다감하게 울지 말고 가란다. 여러 형제 속에서 어머니를 단 한 번도 팔 벌려 안아드리지 못한 내가, 외로움에 잠식될 수 있는 낯선 이들에게 어설픈 마음을 내었는데 그것이 잠시나마 서로의 가슴을 적셨던가 보다. 3인이 기거하는 방안이 후끈 달아올라 먹먹할 때 나는 서둘러 뒷걸음질 쳐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복도에 나와 서서 쿵덕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돌아오는 내내, 그 노인과의 포옹이 가슴을 울린다. 나는 그에게 딸일까, 며느리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평생 품어주고 싶은 애틋한 후학이었을까. 한 노인의 전직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사녀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한 채, 짧게 토해낸 묵직한 어조에서 천만금의 철학적 무게를 헤아린다. 수많은 표현이 생략된 가장 원초적이고 쉬운 말 한마디. 얼마나 많은 혈육들이 그 길을 오고가며 눈물바람일까. 느닷없이 안겨오는 누구나의 어머니처럼 익숙한 그 뜨끈함에, 일순 나는 그가 말을 잃은 치매 환자라는 사실을 망각했었다. 그랬기에 더욱더 지극히 일상적일 수 있는 그 할머니가 길게 따라붙는다. 돌아오는 철길 위에서도 철커덕~ 철커덕~. 울지 말고 가~. 울지 말고 가…. 이런저런 일로 행여 치일 수 있는 생의 길목에서, 선각자의 음성으로 진한 훈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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