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의 본질과 형식 /게오르그 루카치
에세이가 도대체 무엇이고,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이며, 또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그러한 표현을 하는가 하는 등의 본질적 문제는 아직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를 논하면서 우리는 에세이의 '잘 쓰여진 글의 상태'를 너무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그래서 에세이는 문체적인 면에서 하나의 문학작품과 동일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 에세이와 문학작품 사이의 가치의 차이를 운위한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한 생각은 과히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세이를 하나의 예술형식이라고 할 때 나는 그것을 하나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세이가 하나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엄격한 법칙을 가지고 다른 예술형식과는 구분된다는 느낌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나는 에세이를 지금부터 일단 예술형식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다른 예술형식으로부터 그것을 가능한 한 분리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교훈을 주기 때문에 읽기도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에 이끌려서 읽는 사람들도 있다.
학문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내용이라면 예술에서는 형식이다. 학문은 우리에게 실증적 사실과 그것의 상관관계를 제시하지만, 예술은 영혼과 운명을 제시한다.
바로 여기에 학문과 예술이 맞바꿀 수 있는 분기점이 있다.
예술과 학문 사이에는 양자를 서로 맞바꿀 수 있는 대체물이나 양자 사이의 중간단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학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질을 표현하는 전혀 다른 방식도 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질을 표현하는 수단이 대부분의 경우 예술이라는 대상을 두고 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위대한 에세이스트의 글이란 바로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 신비주의자의 글, 몽테뉴의 에세이, 키에르케고르의 상상력에 가득 찬 일기와 노벨레 등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글들이다.
그리고 하우프트만의 대화에서 보는 미카엘 크라머의 마지막 장면이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대목인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 혹은 단테나 반얀을 한번 생각해 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영혼이라는 현실적 실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하나는 삶이라는 보편적인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감이라는 그 체계적인 현실이다.
이러한 이원성은 표현수단마저도 둘로 갈라놓았다. 그래서 한쪽은 이미지(Bild)로서, 다른 한쪽은 의미(Bedeutung)로 갈라서 생각함으로써 이 양자 사이에 대립이 생겨나게 하였다.
이로써 한쪽의 원칙은 이미지를 창출하는 원칙이 되고 다른 한쪽은 의미를 설정하는 원칙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단지 개별적 사물만이 존재한다며 다른 한쪽에서는 이러한 사물들의 사상관계, 즉 개념과 가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문학 그 자체는 사물의 피안에 놓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문학에서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진지한 것이고 유일무이한 것이고 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이 의문을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에서 시인이란 영혼의 진정한 삶을 한 번도 제대로 노래 부르지 못했고 앞으로도 부르지 못하게 될 위인들이라고 비웃고 경멸하는 투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영혼의 불멸의 부분이 한때 삶을 영위하였던 위대한 존재는 이제 아무런 색깔이나 형상도 없게 되어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오로지 영혼의 길잡이인 정신만이 그러한 위대한 존재를 바라다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배열하고 정리하는 행위 없이는 문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마츄 아놀드는 언젠가 문학을 '삶의 비평'이라고 부른 바 있다. 문학은 인간과 운명 및 세계 사이의 궁극적 상관관계를 나타내고 또 문학은 그러한 상관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태도로부터(그것의 근원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생겨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이미지와 의미는 그것들의 적나라한 순수성에서 보면 인간적 느낌의 두 극단을 말해 주는 추상에 불과하다.
이미지를 가장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러면서도 또 가장 열정적으로 이미지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글이 곧 비평가나 플라톤주의자,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이 쓰는 글이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형식 상호간을 갈라놓는 기본원칙이고, 전체가 구축되고 있는 질료이며, 전체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입장과 세계관이다.
위에서 거론한 것을 간단히 줄여서 말해 보자. 문학의 여러 상이한 형식을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는 태양 광선과 비교해서 말한다면 에세이스트가 쓰는 글은 자외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세이는 조용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체의 단편적인 성격을 학문적 정확성의 사소한 완결성과 인상주의적인 신선함에 대립시킨다.
그렇지만 에세이의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실현과 가장 강력한 도달마저도 위대한 미학이 도래하면 무력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에세이가 형상화한 모든 것은 마지막에 가서는 부인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미학적 기준의 적용에 지나지 않게 되고, 에세이 자체는 잠정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에세이의 결과는 미학이라는 체계의 가능성 앞에서 더 이상 자기 내부에서 정당성을 끌어내지 못한다.
바로 이 점에서 에세이는 진정으로 또 완전히 단순한 선행자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럼으로써 에세이는 어떠한 독립적 가치도 창조해 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치와 형식, 척도와 질서 및 목표를 향한 이러한 동경은 도달되어져야만 할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서두에서 말한 말을 다시 쓸 수 있겠다.
에세이는 하나의 예술형식이고 하나의 독자적이고 완전한 삶에 대해 독자적이고도 완벽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에세이를 예술작품이라고 불러도 모순이 되거나 이중적이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에세이가 예술과 구별되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차이란 곧 에세이 역시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해 동일한 몸짓을 하지만, 삶에 대한 태도의 독립성과 그 몸짓만이 예술작품과 동일할 따름이다.
그밖에는 에세이와 예술작품 사이에는 아무런 접합점이 없다. (1910)
===========================================
헝가리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의 명저 ≪영혼과 형식≫(1911)의 권두를 장식한 이 글은 블로호 또 아도르노로 이어지는 20세기의 일대 수필 논쟁의 발단이고 또 그 백미이다.(반성완·심희섭 번역의 尋雪堂 간행 1988년 한글판에서 발췌)
훈수(訓手) / 김선화 (0) | 2020.07.28 |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장 자크 루소 (0) | 2020.07.26 |
향기로운 꽃엔 가시가 있다/ 정목일 (0) | 2020.07.23 |
법정스님의 여자 / 서 경 희 (0) | 2020.07.21 |
수필과 나무 / 신 현 식 (0) | 2020.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