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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소리들 / 안 량 제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20. 7. 8.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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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는 소리들 / 안 량 제

 

  새 생명 탄생을 알리는 고고지성(呱呱之聲)은 당당하고 위대하다. 세상에 나서면서 가장 먼저 소리로 알리고,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고, 소리를 들으며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런 소리들이 세월에 밀려서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골목길을 누비며 외치던 소리들이 있었다.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어둠을 뚫고 새벽을 깨우는 재첩국 소리가 여명과 함께 담을 넘었다. 딸랑딸랑 종소리를 앞세워 “두부사려!” 외치는 두부장수 소리도 뒤를 따랐다.

  잠에서 덜 깬 둔탁한 음성이 재첩국을 찾으면 언덕길도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왔다. 담 벽에 부딪치고 바람이 몰아치는 비탈진 골목에서 흥정이 이뤄졌다. 재첩국 한 사발 받아든 아낙은 가장의 아침상 걱정을 덜었고, 재첩국 동이가 가벼워지면, 아낙의 외치는 소리도 멎었다.

  6‧25전쟁 후에도 도시의 일상은 또 다른 삶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가난에 지친 서민들의 아우성이 전쟁에 진배없었다. 삶을 지탱하느라 뛰고 외쳐야 했다. 목이 쉬도록 ‘재첩국’이라 소리치고 손목이 붓도록 종을 흔들며 ‘두부사려’‘를 외쳤다. 돌부리에 차이고 발바닥이 터지도록 골목길 누비는 소리들이었다.

  재첩국 한 사발이 쓰린 속을 달래고 두부를 넣고 끓인 된장뚝배기는 밥상의 중심이 되었다. 두레상을 가운데로 온 가족이 모여 앉은 주인집 밥상이 한없이 부러웠다. 숨어서 멀찌감치 바라보면 어머니 소리가 귀를 울리고 눈은 뜨거워 왔다. 행여 눈이 마주칠까 얼굴을 돌리면 아련한 고향이 가물가물 나를 불렀다.

  공동수돗가에는 물동이가 줄을 서고 아낙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시 공동수도나 시골 우물이 다 같이 물 긷는 곳이어서 이웃들이 만난다. 비록 남남이지만 만나서 반갑고 궁금한 것 많으니 말들이 쏟아졌다. 혼자서 못한 소리, 물 따라 쏟아내는 소리의 샘과 같았다. 흉보고 자랑하고, 시샘하는 소리로 넘쳐났다. 공동수도 없어지고 마을 우물 사라지니 그 소리들도 사라져 버렸다..

  혼잡한 시장(市場)은 다양한 소리가 살아있는 곳이다. 소리 없는 시장은 의미가 없다. 북적대는 소리들이 생기를 돋우고 시장을 키웠었다. 자갈치 아주머니의 억센 목소리는 삶의 의지이고 외침이요, 시장을 키워온 원천의 소리이다. ‘싱싱한 고등어’라는 외침이 그렇고, 흥정을 하며 밀고 당기는 승강이가 그러했다. 삶에 감춰진 아픈 소리는 생선을 손질하는 도마 소리에 묻고, 얼부푼 손등과 골 깊은 주름살은 가족들 생계를 포개어 담은 듯했다.

  양철통 모닥불에 손발을 녹이면서 얼어붙은 속내를 가만히 녹여냈다. 지나는 사람들이 눈길만 보내도 소리로 답했다. 소리는 뜻의 전달이요 삶의 도구였다. 지게꾼들 가쁜 숨소리도 덜컹거리는 짐수레 소리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리였다. 그 소리들에 삶의 희비(喜悲)가 묻어났고 삶을 책임져야 할 소리이기도 했다.

  숨 가쁜 소리들이 하루를 마감하고 둥지를 찾아들면 낮 소리는 잦아들고 밤 소리가 시작된다. ‘찹쌀 떠-억! 망개떡이나 메밀묵이요!’ 소리는 어둠을 타고 밤을 울렸다. 이슥한 밤, 적막을 깨는 외침은 고달프고 애잔했다. 들어서 안 될 그 소리에 출출한 뱃속이 요동을 치고 멀어지는 소리는 꿈이 되었다.

  달동네 언덕배기의 허름한 곁방의 삶은 춥고 배고팠고 잠조차 서러웠다. 꿈에나 그려볼 망개떡, 찹쌀떡이 그림의 떡이 아닌 소리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귀를 막고 싶었다. 침이 꼴깍하면 뱃속은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나고, 귀는 소리를 따라가지만 가물가물 사라져 갔다.

  고향의 소리가 그립다. 잠결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새벽인 줄 알았고,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 소리 들리면 아침인 줄 알았다. 달 밝은 밤이면 개들도 외로워 달 불러 친구 하자고 짖었고, 풀벌레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던 고향 소리가 내 맘속 깊숙이 담겨 있다.

  부산은 전쟁에 밀려 고향을 뺏긴 응어리진 한의 소리들이 가득했던 곳이었다. 도시 전체가 마치 피난민 수용소 같았다. 밤을 새우면 외곽 산비탈에 판잣집이 주저리주저리 생겨났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밤을 새우며,, 몰래 짓는 둥지에 재첩국 소리는, 밤새 쓰린 속 풀어줄 구원의 소리였으리라.

  많은 소리들이 사라졌다. 시각을 알리던 오포 소리,, 통금을 해제하는 사이렌 소리도 사라졌다. 다듬이 소리, 개구리 소리, 풍금 소리, 기적 소리, 뱃고동 소리, 아이스케이크 사라는 소리도 사라져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숱한 소리 중에도 어머니 소리는 더없이 소중하다. 사라질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 어머니 뱃속을 떠나면서 몸은 비록 따로 이지만 소리만은 언제나 함께였다. 높고 낮고 길고 짧은 어머니의 소리는, 우리들 가슴 깊숙이 가르침을 담아 주고 가셨다. 아무리 많은 소리들이 사라지고 없어져도 서럽지 않다. 그러나 어머니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는 것은 뼈아프게 슬프다. 때로는 간섭으로 오해했고 잔소리로 들렸던 어머니의 소리가 오늘따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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