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생활 / 김 홍 은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에게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행복해지기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나는 슬프지 않기 위해서 산다고 말하고 싶다.
행복한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누구나 명예, 돈, 권력, 사랑을 모두 지니고 싶어 한다. 이를 얻으려고 평생을 두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행복이란 저마다 생각하고 있는 잣대는 서로가 다르다. 지나친 행복을 욕심 부리며 정의, 진실, 도의를 어기고 얻어낸 삶은 언젠가는 불행하다. 무엇을 이뤄 놓았다 해도 그것이 진실로 행복함인 줄을 모른다. 바르고 순수하게 이루어 낼 때 그 가치를 알게 된다.
그러나 슬프지 않기 위해서 사는 삶은 언제고 여유롭다. 슬픔이란 큰 차이를 갖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는 슬픔이 다하고 났을 때 기쁨도 행복도 느끼게 된다. 슬프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소박한 삶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을 알고 안분지족을 느끼게 된다.
삶이란 하나의 생명의 시작에서 비롯되어 상생에서부터 이루어지게 되며, 반복의 변화에서 생활은 연속된다. 이와 같이 삶이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최선을 다하여 살아감이 아니던가.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위하여 보다 나은 사람이 되게 함이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을 참된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난 이후 이었다. ‘왜 사는 가’ 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되었다. 오랜 기간을 두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여 보았다.
“태어났으니 산다.” “먹기 위해 산다.” “행복하려고 산다.” “죽기위해 산다.” 등으로 흡족한 답이 아니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펴 읽어도 마음에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다. ‘65년 가을 조선일보' 사회면에 기사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영등포 건널목에서 5살 된 어린아이가 철길을 건너는 순간 기차가 달려와서 여간수(女看守)는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은 기차에 목숨을 잃었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때 산다는 것은 바로 ‘희생’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는 늘 희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내가 바쁘고, 때로는 어렵고 힘들게 살다보면 ‘왜 사는 가’를 잊고 살아갈 때가 많았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을 딱하고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위험한 물가에 있으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위태롭지 않게 도와주는 사람의 마음이란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는 사단(四端)을 지녔다고 가르쳤다.
사람은 네 가지의 어질음(仁)을 지닌 심성을 담고 있다고 한다.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점점 인성을 잃어가게 됨에서 삭막하게 변해져 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임에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살아온 삶의 평가는 관 뚜껑을 덥고 난 후에 알 수 있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교관에서 죽음을 부활로 연결시키고 있다. 윤회설을 말하기도 하고, 착하게 살아온 사람은 천당을 가게 되며 악하게 살아온 사람은 지옥을 간다고 한다.
우리는 이집트의 역사에서 그들이 살아온 삶의 세계를 신화의 그림으로 직접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도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부활로 연결하였으며 영원과 불멸을 갈망하였음을 안다.
‘사자(死者)의 서(書)’에 나오는 심장의 무게를 달기위한 의식에서 느낄 수 있다. 저울의 한쪽에는 죽은 사람의 심장을 올려놓고 다른 한쪽은 마트(Maat)여신인 자신의 깃털을 올려놓아 그 무게로 측정을 하였다. 또한 이를 감독하며 42명의 배심원과 사자의 서에 적힌 부정에 대한 고해를 한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나는 강도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물건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곡물을 훔치지 않았다……’ 등에 이른다.
이때 심장의 무게와 법과 정의, 진리의 깃털이 형평을 이루어야만 죽음과 부활의 오시리스 신에게 인도되어 부활할 수 있다.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괴물에게 잡혀 먹게 된다. 이를 보더라도 고대의 사람들도 삶의 가치평가는 착하게 살아감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살아서 자신의 심장의 무게를 정의, 진리의 깃털과 평형을 이루려면 악하지 않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였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삶을 정의와 진리에 벗어나지 않도록 참되게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즉 깃털은 사람이 죄를 지었는지 짓지 않았는지, 저울에 놓고 심장의 무게를 달아 판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착함의 무게를 상징한다.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죄를 많이 지었다는 뜻으로서, 마트의 깃털은 선과 양심을 의미함이다. 고대시대도 성스러운 삶으로 살아가도록 교화시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는 “삶이란 아름다움이며 슬픔이자, 곧 기쁨이며 혼란함이다. 또 삶이란 나무며, 새며, 물위에 비친 달빛이기도 하다.
삶이란 일이며, 고통이자 희망인 것이다. 삶이란 죽음이며, 미명(未明)을 부인하거나 내세(來世)를 믿는 것이기도 하다. 삶이 바로 선(善)이며, 미움이며, 시기인 것이다. 삶이란 야망이자 탐욕이며, 사랑이자 사랑이 부족 된 것이 바로 삶의 모습이다. 삶이란 창조력이 있어서 능력을 생산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철학자가 표현에서 말했듯이 삶이란 생활이 문학임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인생은 문학이다.
우리의 삶이 바로 시이고, 수필이며, 소설이다.
인류가 탄생하면서 문학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럼 문학은 언제부터 이루어졌을까.
언어가 생긴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사전에 의하면 문학의 발생은 문자의 발명보다 훨씬 전의 일로 생각하고 있다. 인류의 문화는 동굴에 그려져 있는 동물벽화가 기원이 된 것처럼, 문학도 풍요를 기원하고 손, 발장단을 치면서 주문을 외우는 데서 음악이나 춤과 함께 발생했다고 하였다. 문학은 문자가 생겨난 뒤에도 글로 표현하게 됨은 그것을 사용한 훨씬 뒤의 일로 추측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70년대 이전만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연유로 교육문화의 계층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로써 문학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부 사람들만의 공유물처럼 생각해 왔었다.
우선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수준 높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일반 서민층은 배움보다는 우선 먹고사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교육문화도 평준화가 되었으며, 모든 사회의 문화층이 좁아지게 되면서 문학은 아무나 접할 수 있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글이란 언어로 된 문자의 기록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 상상 등이 가져다주는 이야기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공통된 소재를 써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위해 인쇄물로 남겨놓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어가 그대로 글이 되고,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문학을 위한 또 다른 언어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어를 정교하게 다듬고 꾸미어 감동되게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평범한 언어를 연결시켜 새롭고 아름답게 표현하여 놓을 때 비로소 문학적인 문장이 탄생 되는 것이다.
문학의 소재는 생활이라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생각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기 전에, 자신의 체험을 밑바탕에 두고 이를 체계적으로 논리정연하게 꾸미어 놓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문학이라는 의미의 본질이 담겨져 결정짓기에 이른다.
즉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을 어떻게 감동되게 전달하느냐의 수단이 수사학(修辭學)이다. 이런 꾸밈들은 사색에서 해학의 언어를 그대로 문학에 이용되게 함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할 수 있다.
문학은 단순히 감상의 표현뿐만 아니라 경험에서 얻어낸 지혜를 통하여 지식을 전해준다. 그뿐 아니라 개인의 사상을 전달하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삶의 교훈을 주는 인생의 지름길 역할이 되기도 한다.
문학은 언어이며 삶의 노래이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희로애락의 모든 일들이 곧 문학의 소재들이다. 이들을 글로 사색과 예지의 철학을 담아내어 표현한다면 모두가 한 편의 시, 수필, 소설로 엮어질 수가 있다.
우리들은 21세기의 문학 영상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오늘의 문화는 정보화 시대의 언어적 현대로 나날이 새롭게 변화되고, 인류의 사회생활이 영상매체를 통하여 급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영상은 종합적 예술을 이끌어내어 시각에서 청각까지 연결함으로 인간의 사고력까지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독서의 문화에서 영상문화로 이끌리어 가고 있다.
우리는 어느새 누구나 영상문자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짧은 문자라도 그 내용에는 자신의 함축된 생각과 예지를 담아 감동으로 이끌어 내려고 노력을 한다. 이처럼 오감(五感)의 변화를 가져옴으로 문학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미 문학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생의 삶이 예술 속에 빠져 들어갈 때 새로운 기쁨을 얻게 된다.
황혼의 길을 걸어가는 노년의 삶을 문학생활로 젖어들다 보면 값진 인생의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문학생활은 고고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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