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목탁소리, 물소리 / 이 제 부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9. 12. 29. 06:19

본문

                                   목탁소리, 물소리 / 이 제 부

             

  달도 없는 밤에 물소리가 낯설다. 도시에 길들여진 내 귀에 이방인 같이 다가와 멈칫거리는 물소리는 멀리 살던 친구를 만난 듯 거슬림 없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어찌 생각하면 크게 들리는 물소리가 교만한 것 같아 마음에 거슬리지만 쉬지 않고 밤새며 리듬을 만들고, 화음을 창조해 낸다. 안면몰수하고 따진다면 야박할지 모르지만 장맛비로 목청을 너무 돋우었다고 타이르고싶다. 속삭이며 내리는 가는 빗소리도, 촛불에 모여드는 불나비 거친 숨소리도, 짝을 부르는 산새들의 애절한 언어도 가려내지 못하도록 요란하다고 책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은 벌써 그리운 고향에 찾아온 듯 반기며, 청아한 울림에 동화되고 있다

 

 또 하나의 내 귀에는 부처님이 만들어 내신 자비의 소리가 더 가까이 들린다. 소백산으로 연결된 웅장한 황정산 연봉들이 줄줄이 버티고 서 있는 깊은 계곡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대흥선원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 평상시에도 그러하겠지만 오늘밤에는 불교대학생 70여명이 수련법회로 철야 불을 밝히고 기도정진에 들어갔다. 선불장(選佛場)에 빈틈없이 채워 넣은 신비감의 도력(道力)은 중단 없는 염불로 성취했으리라. 부처님 모시는 스님의 정성이 간절했기에 성전이 이곳에 만들어 졌고, 사부대중이 이곳에 모여 힘겨운 삶을 위로 받으며, 불법에 귀의하여 속세에 더렵혀진 마음을 씻고 또 씻어 선업종자 키워내고, 발원 공덕으로 심기일전하며 살아가리라.

 

  나도 저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목탁소리에 마음을 모아 긴 인생 여로에 먼지 같이 쌓여있는 천태만상의 아우성 다 지우고 진실한 나를 찾아보려고 수련법회에 동참했다. 심산계곡(深山溪谷)을 이제 막 출발하는 시원(始原)의 물방울이 모이고, 모여 합일을 이루는 원천의 물소리, 바람, 천둥소리……. 나를 깨우치는 진리의 소리로 들리게 될까. 스님 말씀 따라 기도정진 하면 허욕에 걸려있는 먹구름 걷어내고 또 다른 나의 면모를 확인하게 될까? 조용한 산사의 밤은 내 마음의 바다에 수 없이 많은 물결을 만든다.

 

 가늘어지기는 했지만 장맛비는 쉼 없이 내린다. 두 개의 석등은 넓은 경내를 온전히 지키려하지만 별빛, 달빛 다 지워진 청록색 어두움은 심연의 바다를 연상시킨다. 밤샘 수련법회가 열리는 선불장에만 바다의 등대같이 빛이 가득하다. 불심을 배워가려는 70여명의 눈빛과 부처님께 기원하는 촛불, 우리들을 가지런히 함께 세워 불심으로 안내하는 몇 개의 현광등이 환한 빛을 낸다. 극락과 지옥을 함께 형상화 한 듯 묵언(黙言)의 밤은 나를 경계에 두고 점점 조용해진다.

 

  밤바다에 여명이 밝아오듯 스님의 독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어두운 산곡(山谷)에 조용, 조용히 퍼진다. 내가 처음 태양을 만나 아성(我聲)을 지르며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던 때 티없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불경을 합송(合誦)하며 목탁소리에 마음을 씻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운명대로 살다 가는 것이라면 생로병사는 근심거리가 아닐 것이다. 내가 지은 업에 따라 정말 이정표가 결정되는가? 참선의 침묵 속에서도 마음은 쉼 없는 삶의 지도를 그린다. 불빛에 모여드는 저 많은 날벌레들 같이 부질없던 생각이 불상의 미소 앞에서 계면쩍어 몸 둘 바를 모른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빛을 차단한 어두움의 바다일까? 눈을 감아도 속세를 떠날 수 없고, 눈을 떠도 부처님이 바로 보이지 않는 나를 돌아본다. 얼마 오르지 않으면 70(七十嶺)정상인데 저녁예불을 올리는 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에 매료되어 불빛에 반사되는 그의 승복자락에 시선이 감긴다. 그는 손으로 목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본능을 초월하는 고행 길에 한 맺힌 서러움과 도력(道力)의 떨림으로 목탁을 연주하리라. 신기의 소리로 들린다.

 

 불가에서 내는 소리 중에 웅장하게 퍼지는 범종소리를 제일 좋아했다.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멀면 먼대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 그 속에는 때 묻지 않은 또 다른 세계가 있는듯하여 다음 종소리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침 예불을 시작하는 쇠북소리와 스님의 염불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내 마음이 그토록 꼼짝 못하고 붙들려보기는 처음이다.

 

 그 소리를 가까이 들으면서 불가에 귀의한 제자 생각이 스치며 눈물이 흐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앞에 정좌하고 무아지경에서 쇠북을 울리며 염불하는 소리는 내 정서의 가장 연약한 부분에서 커졌다, 작아졌다 맴돌고 있다. 6학년 때 담임한 제자가 대학생이 되어 찾아왔다. 어머니 없이 자라는 제자가 내 처지 같아서 측은히 여겼는데 그 정을 못 잊고 찾아 온 듯하다. 그는 내 팔베개를 뿌리치지도 않고, 별 말 없이 하룻밤을 지내고 갔다. 그것이 속세와 인연을 끊으러 온 이별인 것을 나는 몰랐다. 저 스님의 나이쯤은 되었으리라. 내가 사는 속세를 거슬러간 그대가 힘든 아라한의 길을 가려고 마음 다지며, 잠든 내 모습을 확인하고 연을 끊던 모습이 서러움으로 다가와 눈물이 된다. 내 세속의 나이가 모자라 큰스님 되는 것은 못 볼 테지만 질긴 인연은 그를 향한 경하의 삼배를 준비하고 있다.

 

  12일간 철야기도를 하면서 아! 나는 늙었구나 1080배 절을 몽땅 따라하지 못하고, 많은 죽비 명령을 내 의지와는 다르게 흘려보냈다. 움직이기 힘든 내 몸을 내가 천대한 것이 아니라 내 육체가 얼마나 긴장이 풀렸나 실험한 것이리라. 땀에 흠뻑 젖은 옷과 육체는 시원한 산 속에서 새벽공기와 가는 빗줄기가 식혀 주지만 내 마음을 식혀주는 것은 물소리와 스님의 목탁소리였다.

 

 나는 늙은 몸도 아까워 마른 옷 갈아입고, 찬물에 적응하지 못 할까 염려하여 샤워도 하지 않고 느리게, 느리게 밤 공기에 몸을 식히며 흐르는 물소리 따라 속세의 길로 빠져드는데. 스님은 똑같이 절하고, 죽비 치고 무슨 여력이 있어 편히 쉬지 않고, 탑을 돌며 염불하시는가? 무엇이 보이기에 저리도 간절하며, 마음을 씻으며 육체를 그토록 혹사시키시는가. 바르게 사는 길, 잘사는 길이 다 힘든 길인데 그보다 더 힘든 고행의 길을 즐거이 가시는가? 나는 흘러가는 물소리 위에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목탁을 건지려는 꿈을 꾸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